세미나 발제문/철학

지식인들의 망명- H. 스튜어트 휴즈 / 22. 03. / 16.개벽크

pszizek 2022. 3. 16. 21:35

20220316 지식인들의 망명 6장 결론 발제- 개벽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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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결론 : 대변혁

 

 

1.망명과 냉전

 

1950년대 초 유럽의 생활 및 연구조건이 전쟁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자 망명 지식인들은 귀향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살베미니와 보르게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유럽으로 되돌아왔고, 노이만과 마르쿠제, 하르트만과 에릭슨은 미국에 그대로 남았다.(300)

 

1941년 미국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이후 이 새로운 이주자들은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측면에서 본래의 미국인들과 연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 결속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나치즘과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든가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인물로 보는 태도를 거부했다. (301)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의 기간은 망명자들에게 정신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그 기간에는 3중의 전투 경제공항, 국내의 압제, 인종적 정복 등에 대항한 그들에게 남은 인생의 중심적인 이데올로기적 경험이 되었다.(302)

 

만은 아도르노, 노이만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루스벨트 치하의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일상의 현실로 경험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마침내 스위스에 정착하고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몸담아온 유럽의 문화전통에 대한 변함없는 애착을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신봉과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을지도 발견했다.(305)

 

 

 

2.악마적인 것에서 평범한 것으로 : 파우스트와 아이히만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많은 망명자들이 그저 막연히 느끼고만 있던 조국과의 화해의 절박성, 그런 평가가 나오게끔 15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놓은 놀라운 변화가 저절로 드러난다. (306)

 

만은 그의 주제 악마적인 것을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 루터의 고풍스런 언어에 의존하곤 했다. 그의 동포들의 내부에 수세기 동안 자리 잡아온 악을 필사적으로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의 설명의 틈새를 비집고 악마론이 새어나왔다.(307)

 

레베르퀸이 예술가로서의 만을 대변하는 인물이라면, 차이트블롬은 독일과 세계의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작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309)

 

프롬과 마찬가지로 만은 루터의 시대 속에서 그 이후 그의 국가의 오만과 불행이 배태된 온상을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그 소설은 화자의 게속되는 방백 속에 히틀러 치하 독일의 비극을 반영했다.(310)

 

만이 그의 설명 속에 뒤얽혀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 즉, 독일 지성사를 관류하고 있는 여러 목소리들의 합창을 통합하기 위해 사용했던 마지막 수단은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과 특별히 그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구성하는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만은 과거에는 괴테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럽게 주장했으며, 자신의 창조적인 작업 속에서 한 번 이상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 적도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괴테의 선례도 역시 의심스러워졌다.

 

만은 괴테의 파우스트보다 훨씬 이전의 보다 진정한 파우스트를 다시 획득함으로써, 과거 한 세기 반에 걸친 독일 휴머니즘 사상 전체의 흐름을 평가 절하해버렸다. 결국 악마적인 것이 승리를 쟁취했다. 형체 없는 꿈, , ‘선량한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교하게 함양된 정신이라는 것은 결국 위험한 환상임이 밝혀졌던 것이다.(312)

 

만의 소설 중 등장인물들 가운데 비교적 덜 중요한 인물 한 사람은, 독일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하고 질투한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정도로 남을 소외시키며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은 세계주의자였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독일어를 사용하던 그의 동료들의 대다수가 유대인 출신이었던 까닭에 조국의 비극과 유대인의 비극이 동일한 현실의 두 측면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313)

 

1960년 전쟁이 끝난 지 15년 뒤 이스라엘의 기관원들은 나치 절멸정책의 입안자로 널리 알려져 있던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 있는 그의 은신처에서 납치해왔다. 그는 1962년 처형되었다.

 

나치 기간의 죄악상에 대한 열쇠는 만이 한탄한 것처럼 우주적인 야만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정상적인 사람들이 동의했던 절차의 평범함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314)

 

아이히만과 그의 동료들은 모두 양심의 가책을 기괴하게 반전시켜버리는 방법에 의존했다. “내가 이렇게 무서운 짓을 사람들에게 하다니!”라고 말하는 대신에,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이렇게 무서운 일들을 지켜보아야만 하다니! 이 일은 너무나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르는구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이히만도 잔학행위를 직접 보았을 때에는 사실 자기가 보았던 것에 영향을 받았지만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정상적인 반응 대신에 오히려 자기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스스로 부담해야 할 무시무시한 책임으로 인해 동정을 받을 만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려 했다.

 

아이히만의 재판관들은 살인의 죄를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실제로 그 사형집행 장치를 조작했던 사람은 일반 재소자와 희생자들이었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사건에서 이스라엘 법정은 전혀 사람을 죽인 일이 없는 대량 살인자를 재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316)

 

파우스트 박사가 출판되자 독일인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15년 뒤에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예측했던 대로 반유대주의는 눈에 띄게 쇠퇴했으며, 우익 민족주의 운동은 실질적인 추종자들을 획득하는 일에 거듭 실패하고 있었다.(317)

 

파우스트 박사가 나온 때로부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나온 때까지의 15년 동안 아데나워와 그의 후계자들은 중산계층의 속물성을 주조로 해서 현실적이고 자족적이며 비정치적인 새로운 독일을 건설해나가고 있었다.(318)

 

 

 

3.100주년 기념제들

 

고국에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린 망명자들은, 그들의 동포들이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최소한 그들이 무시당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다.(318)

 

지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탈리아는 과거에 이른바 대독일제국이라고 불리던 나라에 비해 훨씬 덜 황폐해져 있었다. 대부분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파시즘에 대해 신중한 무관심의 자세를 보였다는 사실이 그들의 국민으로 하여금 파시즘의 몰락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의필요성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년 전 자신이 문화적 작업을 중단했던 바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이탈리아의 행복감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동안 파시즘의 정통성과 크로체류의 민족이라는 표피 아래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1930년대 초반에 새로운 사고의 모델과 양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사회사상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즉 그람시의 명민하고 준관념론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어갔다. 1947년 그람시의 옥중저술의 출판은 전쟁 직히 지성계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그것은 10년 가까이 그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던 다수의 역사가와 사회연구자들을 고무시켰다. 그래서 그람시는 살베미니와 보르게세 같은 망명 파시즘 비판가들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던 일 즉, 이탈리아 문화의 전면적인 재평가를 죽은 뒤 국내에서 완수 했다.(319)

 

그람시와 그의 후계자들의 국내 망명은 독일인들이 그 말에 부여했던 의미보다 한층 절망적이고 위험한 것이었다. 아도르노가 그의 조국을 떠나서 수행했던 작업과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신마르크스주의가 뒤늦게 급격하고도 열광적으로 이탈리아에 도래했다면, 정도는 조금 약하지만 정신분석학도 마찬가지였다. 1938년 이후의 공백은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것을 남겨놓지 않았고 1945년 전국을 통틀어 7명의 정신분석가 밖에 없었다. 20년 뒤 그 수는 거의 10배 가까이 불어났다. 하지만 교양층 전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정신분석학은 아직 이탈리아의 사고양식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의 확산은 소설 작품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모라비아와 모란테 소설들과 무엇보다도 시칠리의 왕자 람페두사의 유고 걸작으로 큰 평판을 얻었던 표범 등이 그런 역할을 했다.(320)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독일어에 적합한 소설양식을 고안해냈던 사람들- 독일의 만과 헤세, 오스트리아의 무질과 브로흐는 망명 중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남긴 글들은 패전의 폐허에서 헤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문학의 요구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321)

 

1950년대에 젊은 소설가로 등장해서 독일 국경을 넘어서 명성을 획득한 뵐과 그라스 등은 그들이 청년일 때 보았던 조국의 잔인성과 그 이후 주위에서 볼 수 있었던 속물성에 대한 격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보다 더욱 깊은 인상의 풍자를 포함한, 새로운 표현양식을 만들어낸 강인한 인물들이었다.

 

사회사상에서는 알베르트와 다렌도르프같은 자유주의적 혹은 베버식의 전통을 수정했다. 그리고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하버마스라는 후계자를 발견했다.(322)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1964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베버 탄생 100주년 기념제는 프로이트 100주년제들 중 그 어떤 것과 비교해보아도 훨씬 더 넓은 그물을 던졌다. 주최자는 독일 사회학회였으며, 집회의 공식목적은 그 회의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베버를 가장 영향력있는 창시자로 꼽고 있으며 또한 현재 그의 고국에서 봄이 일어 있는 사회학 분야에서 베버의 모범이 어떤 현대적인 의의를 갖는지 평가하는 일이었다.(324)

 

그러나 예측할 수 있었듯이 결국에 가선 논의의 방향이 정치학 쪽으로 흘러갔다. 베버가 이런 종류의 발언을 그의 과학적작업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그렇게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논쟁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사건전개도 전혀 부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마르쿠제는 베버의 사회학이 창시자의 생각만큼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가치중립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식적 합리성의 개념에 베버의 분석과정에서 아무도 모르는 새에 변화해버렸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지배 또는 통제 자본주의가 역동적인 산업사회 과정을 통해 행사하는 통제의 문제로 변형되었다.(325)

 

베버는 이 지배를 서구인의 운명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마르쿠제의 응담에 의하면 사회는 자연이 아니었다. 경제와 인간관계의 세계에는 운명이라는 용어 즉, 개 개인으로부터 거의 독립된 법칙이라는 의미를 갖는가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누가 그런 운명을 선포했는가? 만약 그것이 인간들 자신이라면 그 밖에 다른 답변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스스로 부과한 지배를 철폐할 수도 있을 것이다.(326)

 

마르쿠제는 관료제와 카리스마적 지배 간의 베버식 연결에 대해서도 아주 시사적인 고찰을 가했다. 관료제는 근대의 경제적 합리성의 행정 형태라고 인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최상부의 지배의 성격에 대해서는 똑같이 말할 수가 없다. , 관료제가 관료제 외적인 권력 혹은 관료제를 넘어선 권력-카리스마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라면 베버의 이성 개념은 비합리성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의 자본주의 분석은 그 자신이 철저히 가치 중립적이지 못함을 보여주었던 반면 즉, 그는 형식적 합리성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정의에다가 지금 논의 중인 현상 특유의 평가작용을 도입했던 반면 바로 그 과정에서 그는 우연히도 근대사회의 비합리성을 드러냈던 것이다. 마르쿠제는 베버의 이성개념 속에는 이해는 되나 수긍할 수는 없는 아이러니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기회가 닿는다면,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인가?”(326)

 

로시는 베버가 기본원리들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가치중립성과 객관성 간의 관계, 그것이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 방법의 기본원칙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로시의 간단한 진술은 베버를 그의 비난자와 무비판적 옹호자들에게서 동시에 구출했다.(327)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이 되풀이해서 주장하던 바와 같이 사회사상의 순수성을 가치관련성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던 반면, 그 증명은 신헤겔주의자들의 정언적 도덕명령에 대한 승인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328)

 

 

 

4.전형으로서의 틸리히 : 융합, 오해, 변형

 

베버 100주년제가 끝난 지 몇 달 뒤 동남아시아의 한 국지전에 미국이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사태가 발발했다. ‘화해라는 동일한 윤리적 목표를 가지고 있던 에릭슨과 마르쿠제는 모두 베트남전쟁에 반대했다. 에릭슨은 간디의 비폭력에 관한 그의 저술을 통해 간접적으로, 마르쿠제는 신식민주의적비인간성을 격렬하게 비난함으로써 각각 반대했다.(328)

 

1960년대 중반 이후 마르쿠제와 에릭슨은 모두 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그리고 더 광범한 청중들에게 그들 자신의 가치를 선포했다. , 그들은 이제 사회이론가라기보다는 논쟁가 혹은 현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 변화로 그들은 더 이상 망명자처럼 주저하지 않고 미국의 정책을 공격해댔다.

 

틸리히는 마르쿠제의 동료였으며, 에릭슨이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그의 추도식에서 송덕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틸리히가 그토록 사랑하게 된 나라에서 그동안 겪었던 경험은, 보통 망명함으로써 동화될 수 있었던 요소구세계에서 유년기에 습득한 가치에 완강하게 집착하는 요소에 대한 최종적인 전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329)

 

틸리히는 그의 자전적인 성찰 속에서 자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거의 모든 추억과 열망들은 풍경, 토양, 기후, 논밭과 가을에 토마토 익는 냄새, 구름의 모양 그리고 바람, , 수풀 등과 한데 뒤엉켜 있었다. 이 구절을 보면 독일 낭만주의의 종교적 성향이 갖는 준범신론적 신비주의 셸링과 슐라이어마허가 그 실례다. 그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토대로 굳어져 있었음을 알게 된다. 틸리히의 사상은 철학과 신학,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순응주의, 유신론과 불신앙 사이에 걸쳐 있었다.(330)

 

틸리히는 결코 신학교수로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가르쳤지만 그는 1954년 노년이 되어서 옮겨온 하버드 대학의 세속적인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331)

 

틸리히는 미국의 토양에서 성공을 거둔 유일한 실존주의자로서, 대부분 미국에서 저항 또는 오해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지적인 사조 가운데 어떤 요소가 동화 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틸리히는 스스로 강인하고 과감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경험적 전통, 그리고 그에 앞서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신실증주의 또는 분석적 경향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332)

 

노이만은 파시즘 연구로부터 권위주의적 지배의 본성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연구로 옮겨감에 따라, 두 가지 양립 불가능한 사고양식 사이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개념상의 난제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달리 하르트만은 자신을 엄격하고 세심한 문장에 국한시킴으로써, 외국어로 저술하는 데 따르는 문제를 그 세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335)

 

망명자 세대는 이론의 정교화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래도 좀 뒤떨어졌지만, 언어와 가치에 관한 고찰이라는 면에서는 그들의 선배들보다 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336)

 

의사소통의 형식에 관한 강력한 관심은 비트겐슈타인과 아도르노의 업적을 메를로-퐁티나 구조주의자들과 같은 프랑스 소장학자들의 업적에 연결시켜주었다. 베버는 적어도 이론에서만큼은,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난 연구자들도 옳다고 인정할 만한 사회학적 증명을 자기가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라던 베버의 확신은 이제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더 이상 프로이트처럼 도덕성을 자명한것으로 보고 과학적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었으며, 또한 베버처럼 과학적 연구를 가치판단의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그는 반파쇼 운동가이자 동시에 망명자였다는 개인적 경험으로 최선의 선배들에게서 물려받은 방법론적 교훈이 전혀 지침이 되어주지 않는 생소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명백히 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맡게 된 것이었다.(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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