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레비스트로스 3부 2022.11.09. 개벽크
3부 신세계
8 농무지역(적도 무풍대)
우리는 다카르에서 구세계에 대하여 이별을 고하고, 카보베르데 군도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1498년에 콜럼버스가 그의 세 번째 항해에서 북서쪽으로 항로를 변경했던 그 숙명적인 북위 7도에 도달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원래 브라질을 발견하기 위하여 계획했던 진로를 변경함으로써 2주일 후에는 기적적으로 베네수엘라 해안과 트리니다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대의 향해자들이 그토록 무서워하였던 적도 부근의 농무지대가 가까워짐에 따라서 양반구에 고유한 바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191)
그들은 미지의 지역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어떤 새로운 지역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구세계의 과거를 확인하려고 갈망하였다. 그들은 자기네가 목격하였던 것에 의하여 아담과 율리시스를 확인하였다. 콜럼버스는 그의 청 항해에서 서인도 제도의 해안에 도착하게 되었을 때, 이곳이 일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이 지역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 후로 400년이란 시간이 경과 하였으나 그들은 신세계가 1만 년 또는 2만 년 동안 역사의 동란으로부터 벗어나 있었던 환경의 굴곡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192)
남아메리카는 단지 ‘귀중한 물구덩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그 모습도 변하고 그 본성도 영원한 것으로부터 역사적인 것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부터 사회학적인 것으로 변해버렸다. 콜럼버스가 첫인상으로 ‘인간의 천국’이라고 예감했던 남아메리카는 부자들에게만 허용되는 감미로운 생활 속에서 연명은 해왔어도 다른 한편으로 파괴되기도 한 것이다.(193)
우리는 몇몇 특정한 사건들을 통해서 16세기의 항해자들이 직면하였던 난관들이 얼마만큼 절대적이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저 히스파니올라-오늘날의 아이티와 산토도밍고-지역을 예로 들어보자. 1492년에 그 섬들에는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로부터 몇백 년이 지나는 동안 단 200명으로 감소되어버렸다. 유럽 문명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마치 천연두나 백인의 공격만큼이나 효과적으로 그들을 절멸시켜버렸다.(194)
아메리카 대륙이 눈앞에 있다. 대륙은 그 엄연한 모습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대륙은 저녁 무렵에 그 만의 안개가 자욱한 수평선에 생기를 부여하는 모든 종류의 존재로 이어져 있다. 나를 사방에서 온통 둘러싸고 압도하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하고도 무서운 실체, 바로 신세계다.(203)
9 구아나바라
리우데자네이루는 그 심장부까지 후미져 굽어 있다. 그래서 배에서 내리면 그곳이 바로 도시의 중심부인지라 마치 도시의 나마지 반이(Ys: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렸다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전설의 도시)처럼 바닷물 밑에 가라앉아버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204)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창설자인 빌게뇽은 지금부터 꼭 378년 전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였다. 그는 칼뱅이 파견한 다른 10명의 제네바인 프로테스탄트 교도들과 함께 그의 학창 시절 친구인 빌게뇽을 찾으러 여기에 왔다. 그런데 빌게뇽은 구아나바라 만에 정착한 후, 겨우 1년이 지나자 막 개종을 하고 난 참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매리 슈튜어트와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2세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여왕을 납치하기도 했다.
그는 단순한 식민지 이상의 식민지인, 실제로 하나의 제국을 그곳에 설립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당면한 목표는 유럽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1555년 7월 12일에 사회의 각계 각층으로부터 모집된 600명의 개척자들을 배 두 척에 태우고 브라질로 떠났다.(205)
결국 프랑스인들은 즉시 이 새로운 나라를 브레질이라고 불렀는데, 브레질이란 명칭은 적어도 12세기부터 이 신비의 대륙에 은밀하게 주어져왔다. 그리고 프랑스어도 원주민들의 용어로부터 많은 낱말들을 그 자체 내에 포함시켰다.(206)
빌게뇽은 만의 중앙에 있는 섬에 콜리니 성을 세웠다. 원주민들이 그 성을 지었으며, 이 작은 식민지에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항상 주기만 하고 되돌려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 싫증을 느낀 원주민들은 도망을 갔고, 그들의 촌락은 황폐해졌다. 죄수들이 빌게뇽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그들을 모두 학살하여버렸다.(207)
원주민들 및 800여명이 질병으로 사망하자 위기를 느낀 빌게뇽은 종교적 신념에 몰두하게 하였고 칼뱅에게 선교사들을 보내줄 것을 청원해 1556년 레리가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게 되었다.(208)
마침내 빌게뇽은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그들을 굶겨 죽이려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동체를 떠나 내륙에 들어가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이같은 목가적 이야기는 민족학의 걸작이라 할 쟝 드 레리의『브라질 대륙 기행』에 기술되어 있으며, 그 모험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한편 섬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처형이 빈번하게 거행되는 가운데 식민지가 해체되고 있었다. 이제 빌게뇽은 모든 사람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콜리니 성은 포르투갈에 점령되어 버렸다. 빌게뇽은 자유로이 걸어다니면서 리우데자네이루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209)
10 남회귀선 여행
리우데자네이로부터 산투스까지의 해안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우리가 꿈꾸어온 열대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2천 미터가 넘는 해안의 산맥들이 바다를 향해 깎아지른 듯이 높이 솟아 있었고, 바다에는 작은 섬과 암초가 무수하였다.(217)
세계는 금을 탐식한 뒤에 설탕을 갈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설탕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노예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광산의 발굴이 끝나자 이와 함께 삼림은 도가니에 불을 땔 연료를 공급하기 위해 황폐하게 되었고 노예제가 철폐되었으며, 다음에는 커피에 대한 세계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상파울루와 산투스의 항구는 이 같은 변화에 민감하였다.
황금은 처음에는 황색이었다가, 그 다음에는 흰색, 그리고 이제는 흑색으로 바뀌었다. 비록 산투스는 국제적인 상업활동의 중심지로 변하였지만 산투스의 풍경은 그 은밀한 미를 간직하고 있다.(220)
인간과 대지와의 관걔에서, 구세계에서는 몇천 년 동안이나 상호작용을 통해 유지해온 친밀한 관계의 바탕이 되는 저 세심한 상호관계가 이곳에서는 일찍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곳 브라질의 땅은 약탈당하고 파괴되어버렸다. 농업이라는 것도 신속하게 이익을 얻기 위해 땅을 강탈하는 짓이 되어버렸다. 사실 100년도 못되어 개척자들의 활동 영역은 상파울루 주를 가로지르며, 천천히 타오르는 불길처럼 처녀지를 잠식학면서 이곳을 폐허화시켜버렸다.(223)
남아메리카든 북아메리카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아메리카에서는 무언가 유럽의 상황과 가까운 멕시코와 중부 아메리카 및 안데스 고원지대처럼 인구가 보다 조밀한 지역을 제외하고 오직 두 개의 선택이 우리에게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선택은 너무나 무자비하게 우리들의 필요를 위해 사용된 결과 하나의 풍경이라기보다는 마치 야외의 공장과 같이 돼버린 자연이다. 두 번째 것은 인간이 매우 오랫동안 저거한 결과 파괴되어버렸으나, 어떤 점진적이고도 계속적인 적응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풍경’의 수준으로 재상승된 자연이다.
프랑스의 여러 개의 주를 합해놓은 만큼이나 큰 이 공지는 한때 인간들이 소유하였고, 또 짧은 기간이나마 인간들이 개간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 또는 20년 동안, 인간이 그의 용도에 알맞도록 바꾸어놓으려고 노력했던 이 지역에는 하나의 새롭고 무질서하며 단조로운 식물군이 서서히 재생하고 있었다. 이 무질서는 그것의 순진한 표정 밑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기만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 무질서는 아득한 과거에 있었던 투쟁들에 대한 기억과 윤곽을 완전히 보존해오고 있다.(225)
11 상파울루
어떤 독설가가 미국을 정의하기를 “야만에서 문명을 거치지 않고 퇴폐로 옮아간 나라”라고 하였다. 이 정의는 오히려 신세계의 도시에 더 어울리는 말인지도 모른다. 신세계의 도시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들은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들었다.(226)
우리는 유럽의 도시들이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그것들을 더욱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아메리카에서는 해가 지남에 따라서 도시에는 불명예스런 요소가 나타난다. 왜냐하면 아메리카의 도시들은 단지 새롭게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최근에 만들어진 것일수록 더욱 훌륭한 것이다.(227)
도시는 새로운 건축물들이 세워짐에 따라 끊임없이 진전해 나가면서 과거에 세워졌던 건물들의 폐허 위에 다시금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시카고에서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100년이 채 못 되는 이 수수한 모습 (시카고의)이야말로 고대의 흔적을 여러 부분에서 나태낼 수 있기 때문이다.(228)
상파울루 시는 맨 처음에 두 개의 작은 강 아낭가바후 강과 타만두아 테아 강이 만나는 지점인 북쪽의 박차 모양의 대지에 세워졌다. 상파울루시의 기능은 단지 ‘원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은 16세기부터 포르투칼인 제수이트 교도들이 원주민들에게 문명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던 선교의 중심지였다.(230)
개화된 브라질 사람들은 개론서와 대중 보급용 저서들을 탐독하고 있었다. 외국에 대해서 그 당시 프랑스가 확보하고 있던 비길데 없는 특권을 자랑하기는커녕 우리 사절들은 그러한 특권이 어디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려고 애쓸 만큼 현명했다. 그 당시부터 슬프게도 그것은 기울어져가고 있던 과학적 창조의 독창성과 풍요함에 기인했다기보다는 많은 우리 학자들이 아직까지 부여받고 있었던 재능에 기인한 것이었으므로, 그 재능으로서 어려운 문제들을 그들이 조심스럽게 이바지했던 문제의 해결로 접근시킬 수 있었다.(233)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남아메리카가 지는 프랑스에 대한 사랑은, 부분적으로는 소비를 하며, 또 남들로 하여금 소비를 쉽게 해주는 동일한 성향에 근거를 둔 비밀스러운 공모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곳 남아메리카에서 존경받고 있던 위대한 이름들은 파스퇴르, 퀴리, 뒤르켐같이 모두 과거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234)
내가 그대들의 원시적 시절을 언급함은 절대로 빈정대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것이 내게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몇 세대를 걸처서야 얻어질 걸로 기대해야 할 지적 발달을 그대들이 지나간 30년 동안에 이루어놓은 것을 보고서 한 사회가 어떻게 사하지고 태어나는지를 나는 알게 되었다. 또한 나는 책에서 보면 암흑상태 한가운데에서 작용하는 익명의 힘들의 임직임에서 비롯되는 듯 보이는 저 거대한 역사의 변혁들도,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소수의 젊은이들의 남성적인 결단력을 통해 순식간에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