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pp181-237 / 2022.11.11 맑시즘 세미나 / 테츠(哲)
니콜로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 27장 - 44장(pp.181-237)
27장. 사람이 완전히 악하거나 완전히 선하게 되는 경우란 거의 드물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숙청 대상이었던 페루자의 조반 파골로 발리오니는, 근친상간에 살해도 서슴지 않는 사악한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율리우스가 무방비하게 페루자에 입성했을 때 그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마키아벨리는 여기에서 사람이 “멋있게 사악할 수도 완벽하게 선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게다가 어떤 악행이 그 자체로 위대함을 감추고 있거나 어떤 면에서는 고귀한 점이 있을 때에는 이를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182)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아닌지 결론짓습니다. 극단적인 경우란 드물고, 인간에게는 의외의 일면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생각해 봅니다.
28장. 로마인들이 아테네인들보다 자국민에 대해 배은망덕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국 시민을 대하는 로마와 아테네의 태도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술라와 마리우스 시대의 대규모 숙청 시대가 오기 전까지 공화국 시기의 로마의 자유가 찬탈(쿠데타를 말하는 듯 합니다.)당한 사례는 없었고, 따라서 시민들을 박해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아테네에서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사례처럼 선의를 가장하고 시민의 자유를 빼앗았으며, 이후 그의 통치 시기에 피해를 봤던 이들에 대해서 시민들의 복수와 처벌 행위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도편추방 제도가 성립되었지만 그럼에도 정치적 폭력 행위들은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인민은 자유를 지속할 때보다도 오히려 일단 잃었던 자유를 되찾았을 때 더 과격한 행동을 보이는 법이다.”(184)라는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결국 자유에 대한 경험의 차이에 따른 것이지, 아테네에 대한 비방도, 로마에 대한 찬양도 잘못되었다 말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BC600?~527) |
자료: 위키피디아 |
29장. 인민과 군주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배은망덕한가
배은망덕이라는 말이 은혜를 잊고 배반한다는 뜻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군주와 인민의 관계를 상호적인 관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국가는 군주의 것만도 인민의 것만도 아닌데, 누군가 그것을 잊고 탐욕을 부리고 의심하는 순간 상호적인 관계는 깨어지게 됩니다. 마키아벨리는 타키투스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받은 것에 보답하기보다는 상처를 입은 것에 복수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보은은 손해로 여기는 반면, 복수는 이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41)
승리를 이끌고 돌아온 장군이 너무 큰 명성을 얻어서 오히려 중상 모략하는 경우, 의심과 두려움에 시의심(猜疑心)이 싹트고, 군주는 그를 죽이거나 그의 성취를 깎아내리려 합니다. 배은망덕하고 토사구팽하는 경우는 역사의 사례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AD 69년 베스파시아누스와 비텔리우스의 내전 시기, 베스파시아누스의 휘하 무키아누스는 비텔리우스를 패배시킨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권을 박탈하였고, 이에 분노하여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가지만 냉혹한 대접을 받고 죽고 맙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왕이 군대 장군인 곤잘보 페란테에 대해 했던 처사도 사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군주는 자신의 깃발 아래서 승리를 거두어 주군에게 광대한 영토를 바친 사람들의 공훈에 대해서도 은혜를 베풀지 않는 법이다.”(188)
베스파시아누스(9~79) |
아라곤의 페르디난도(1452~1516) |
자료: 위키피디아 |
군주의 배은망덕과 달리, 공화국의 배은망덕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합니다. 공화국의 자유를 유지하려는 나머지 시민을 박해하고 의심을 하게 될 경우, 이미 부패된 공화국에는 재앙이 된다 말하며 카이사르를 언급합니다. 반면 부패하지 않은 국가는 시민들을 억제하는 힘이 되어 장기간 자유를 지속하게 한다 말합니다. 공화국 로마에서 배은망덕한 사례는 한니발을 격파한 스키피오의 능력과 명성, 그의 역량과 덕망(virtù)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고, 그를 ‘비정상적인 현상’(190)으로 느끼게 되어 경계하며 카토에 의해서 탄핵받게 됩니다. 이처럼 두려움에 의한 배은망덕은 용서받을 만한 사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민은 탐욕이 아닌 두려움 때문에 배은망덕 행위를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가 적어 군주에 비해 덜 배은망덕 합니다.
30장. 군주나 공확국이 배은망덕이라는 악덕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또 시민이나 장군이 배은망덕한 행위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군공을 남에게 빼앗기고 이를 두려워하며 배은망덕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군주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 필요가 있습니다. 장군은 자기의 군공을 두고 교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군주의 두려움과 의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게 됩니다. 반면 그것과 정반대로 정복한 모든 것을 자기가 가지고 군주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서는 인민과 주변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매수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서 군주의 배은망덕 행위에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선하거나 사악한 인간이 없듯이 장군도 자신의 처신에 대해 결단하지 못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지체’(193)하게 되고 맙니다.
공화국의 경우 장군을 시민 중의 한 사람으로 보내야 하며, 로마의 경우처럼 귀족이나 시민이 모두 전쟁에 참가하고, 이에 따라 다수의 영웅들이 등장하여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음을 언급합니다. 물론 야심을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다른 이들에게 의심을 불러일으킬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처신했습니다.
31장. 로마 장군들은 그들의 과오에 대해 과도하게 처벌받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무능이나 잘못된 계획이 로마에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처벌받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공적을 세운 경우 외에 처벌을 받는 경우 악의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오히려 과실을 처벌하지 않고 명예를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대를 통솔하는 이들은 군대를 어렵고 위태로운 자리로 여기지 않고 용감하게 임무에 종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그리스 국가의 수많은 장군들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사형과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과 달리, 로마는 중벌을 부과하지 않습니다.
실패가 고의에 의한 악질적인 일이었다 해도, 사형 같은 중벌이 아닌 벌금형에 불과했으며, 전통적인 관습처럼 지속되어 왔습니다. 한니발에 의한 수많은 대패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지휘관들은 극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조국의 비운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의 뜻을 표한 것’(196)에서 로마의 관습의 우수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실패에 대해 관대하고 관용할 때 오히려 책임의식이 성장하는 것일까요.
32장. 공화국 또는 군주는 인민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을 부득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지체해서는 안된다.
인민에 대한 관대함은 난국을 헤쳐나가는 힘이 됩니다. 로마 원로원은 위기 상항에서 평민의 지지를 얻고자 할 때 감세 정책 등을 통해서 평민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전쟁을 이겨나가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선례로 위급시까지 인민에 대한 혜택을 베푸는 것을 연기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으며, 그렇더라도 성공하지 못한다 합니다. 민중은 위기 상황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빼앗아 갈 것을 걱정하고 위정자에 대한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인민의 이익을 위한 법을 평소부터 제정하고 시행하였기에, 인민은 자신들을 위해 조치가 취해진 것이라 생각하였고 공화국에 헌신하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베푸는 당장의 은혜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돌릴 수 없는 것이고, 그렇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고 자신의 파멸을 재촉할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33장. 국가의 내부 또는 외부에서부터 커다란 위험이 엄습했을 경우, 그것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그것을 다루면서 지연시키는 정책이 훨씬 더 안전하다
로마는 국가의 존망의 위기에 놓인 위기 상황에서 임시 독재 집정관 제도를 두어 한 시민에게 최고 권력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유효적절하게 활용해 왔습니다. 공화국의 내외부에서 다가오는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방식으로 내부의 결속은 일인 권력 아래에서 단단히 하고, 섣부르지 않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때까지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 해결해 왔습니다. 다만 때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에게 눈길이 쏠리게 되면서 의심하지 않고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는 실수를 깨닫게 되는 일들도 벌어지고 맙니다.
피렌체의 코시모 데 메디치가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 피렌체의 유력자인 니콜로 다 우차노는 코시모를 몰아내는 것이 실수라 판단하였지만, 그의 사후 시민들이 코시모를 추방하였을 때, 이에 코시모 당파가 반격을 가하면서 복귀하고 공화국의 원수의 자리까지 취하게 되는 사례, 그리고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역량을 찬양하다가 그것이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결국 공화국의 파멸을 촉진한 사례들을 언급합니다.
해악이라는 것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고,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당장에 뿌리 뽑으려다 악화시키는 일이 없도록, 시간을 벌면서 정세를 가늠하고 해악에 대처가 가능한 때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형세를 관망할 수 있을 때 해악을 피할 수 가능성은 높아지게 됩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 |
니콜로 다 우차노(1359~1431) |
자료: 위키피디아 |
34장. 임시 독재 집정관의 권환은 로마 공화국에 유익하면 유익했지 유해하지는 않았다; 자유로운 투표로 주어진 권력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강탈한 권력이 시민정부를 파괴했다
로마의 임시 독재 집정관 제도는 참주정의 원인이 되었다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 위치는 국가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목적에서 봉사하려는 합법적인 권력이기에 그런 해석은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특히 부패하지 않은 국가에서 불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하기란 재력이나 지지자 등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임시 독재 집정관은 한기적인 임기 안에서 비상사태를 타개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였지만, 기존의 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영향을 주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짧은 임기와 제한된 권력, 부패하지 않은 국가라는 조건에서 임시 독재 집정관은 좋은 제도로 작동하게 됩니다.
재난 극복의 상황에서 즉각적인 대처가 필요한 상황에, 평소처럼 지연과 관망의 태도는 더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임시 독재 집정관 제도의 유효성이 드러납니다. 초법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장치의 돌발을 막을 수 있는 여러 요건들이 갖춰져 있다는 점에서 로마 공화국의 제도의 현명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결국 로마는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쳐온 시기에 자신들을 강화시키고 방어할 수 있는 조직과 정비를 통해서 강해져 왔습니다.
35장. 로마의 10인회는 인민의 자유로운 보통선거로 선출되었는데도 어째서 공화국의 자유에 유해한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로마 10인회 제도는 임시 독재 집정관에 비해 큰 권력이 장기간 위임되면서 유해성을 끼치게 되었다 분석하고 있습니다. 임시 독재 집정관이 누군가의 권한을 박탈하거나 제도를 말살하는 권력을 가지지 못했지만, 10인회 제도는 집정관과 호민관이 폐지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마음대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게 됩니다. 이들을 향한 감시와 견제의 세력이 없다보니 횡포를 부리게 되었으며, 유해함을 가져옵니다.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권한이 실재한다면 질료(인민)가 전혀 부패되어 있지 않다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권한은 단시일 내에 질료를 타락시키고, 자신의 지지자와 당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210)
36장. 고위직에 있는 시민들은 하급직에 있는 시민들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 집정관을 했던 인물이 다른 이의 지휘 아래 들어가 싸우는 것을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고, 로마의 제도가 로마를 위대하게 해왔고 그들의 관행과 사고방식, 제도와 습관들이 로마를 성장시켜 왔습니다. 반면 베네치아를 비롯 다른 공화국에서의 경우, 요직의 인물이 하급 직책에 취임하는 것을 거부하는 관행은 공화국에 손실이 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새롭게 승진하는 이들을 보좌하고 경험부족을 매워줄 수 있을 수 있음에도 본인의 명예와 야심으로 공공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37장. 농지법이 로마에 어떠한 불화를 초래했는가; 먼 과거까지 소급하는 효과를 가진 법률을 고래의 관습에 반하여 제정하는 것은 공화국에 불화를 야기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모든 것을 갈구하도록 만들어놓고도, 모든 것을 얻지는 못하도록 만들었기 때문’(213)에 인간은 자신의 야망에 따라 불만을 느끼고 부침을 겪게 된다 말하며, 로마 공화국의 평민들이 호민관의 제도를 통해서 자신들도 명예와 부를 귀족과 같이 공유하겠다는 야망으로 인해 무질서가 초래하고 농지법의 투쟁 상황이 야기되었다고 말합니다. “잘 정비된 공화국은 그들의 국고를 넉넉하게 하고, 시민은 가난하게 해야 한다.”(213) 로마의 농지법은 결함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로마에 분쟁과 소용돌이를 가져오게 됩니다
농지법은 “어떤 시민도 정해진 일정한 양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했고, 다른 하나는 적에게서 빼앗은 토지는 로마 인민들에게 분배된다고 규정”(214)한 것으로, 귀족에게 손해가 되는 법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법에 반대하는 것이 공공선이라 믿었던 귀족들은 이 법안을 지연시키고자 했고, 그라쿠스 형제에 의해 문제로 제기되기까지 문제적 요소로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라쿠스 형제가 농지법 문제를 제기하고 이는 평민와 원로원 사이의 대립을 일으켜 무력충돌로 이어졌고, 대립이 지속되게 됩니다. 평민의 권리를 대변하고자 했던 마리우스의 시기, 그리고 귀족편에 선 술라의 분쟁과 숙청의 시기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카이사르가 ‘로마 최초의 참주’가 되어 자유를 상실했다 평가합니다.
평민의 자유를 지탱하는 법을 통해 공화국이 이상적으로 이끌어져 왔던 시기에 비해, 농지법은 귀족과 평민의 야망이 충돌하여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재산문제에 대하여는 서로 완강한 태도를 보이며 불법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또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그라쿠스 형제를 언급하는데, 부조리를 해결하고자 했던 의도가 좋았다 하더라고 신중하지 못했던 그들의 행동이 공화국의 파멸을 가져왔으며, 해악을 촉진시켰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38장. 허약한 공화국은 우유부단하고 결단을 잘 내리지도 못한다; 설사 그들이 어떤 결정을 내린다 해도, 그것은 선택의 결과라기보다는 부득이한 필요 때문에 강요된 것이다
로마에 페스트가 창궐했던 시기, 로마에 종속된 라티움과 에르니키인들이 주변의 공격을 받자 자신들을 방어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에 대처할 수 없었고 스스로 방어하라 답변을 주었는데, 이는 이전의 원로원의 방침과는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로원은 귀속된 종족들이 무기를 드는 것을 싫어했고, 이들이 나중에 의도적으로 불복종하게 될 것들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약해진 공화국의 상황은 불가피한 결정을 하고 명예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피렌체는 발렌티노 공작인 체사레 보르자가 군대와 함게 영내를 통과한다 요청했을 때, 이를 체면치레로 허가하였지만, 무력에 의한 강제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한 피렌체가 피사와 아레초를 점령하고자 했던 과정에서 취했던 우유부단한 태도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고, 폭력사태로 상쇄되는 상황이 안니면 항상 어중간한 상태에 놓여 있다고 비꼬고 있습니다.
39장. 같은 일이 종종 다른 인민들 간에 일어난다
피렌체가 피사와 아레초를 잃는 과정에서, 그들은 너무도 많은 비용을 전쟁에 지출하면서 고율의 세금을 짊어지게 되자, 이 책임이 시를 이끌던 10인의 평의회 잘못으로 돌리고 이 제도를 폐지하고 시정위원회에 일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신중하게 전쟁을 하던 인재들을 쫓아낸 상황이 되었고, 상황이 더욱 악화되면서 자신들의 오류를 깨닫고 10인 위원회를 부활시키게 됩니다.
로마에서도 평민들이 집정관 제도를 없애서 자신들에 대한 권력을 규제하고자 했을 때, 집정관 제도를 폐지하고 집정관의 권한을 가진 호민관 제도를 창설하였지만, 결국 나중에 집정관 제도가 부활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40장. 로마에서 10인회의 창설 그리고 그 사건에서 배워야 할 점;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해서 그러한 사건이 공화정을 구원하거나 공화정을 참주정으로 몰아넣는지를 고찰하고자 함
로마에서는 아테네 솔론의 법률로부터 로마 법의 기초를 다잡기로 합의하고, 이 새로운 법률을 검토하고 결정할 위원으로서 1년 임기의 10인회를 구성합니다. 이들이 제약을 받지 않도록 집정관과 호민관을 모두 폐지하였으며, 10인회가 지배자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원회 중 한명인 아피우스는 그들의 권력도 장악하여 박해자로 군림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10인회가 매우 분별 있게 처신하고 공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새로운 법의 제정을 위해 두 개의 동판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아피우스의 여론 조성을 믿고 이들의 임기가 1년 연장되었는데, 인민은 집정관을 바라지 않았고 호민관이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러합니다. 이에 지배적 위치에 있는 10인회에 선출되기 위해 귀족들이 그 지위를 노리는 가운데, 아피우스에게 10인회를 선정하여 인민에게 제출하는 일을 맡깁니다.
그런 와중 아피우스가 자신을 제 1인자로 스스로 지명하고 그가 선호하는 9명의 인물이 선정하여 차기 1년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먼저 경호원을 12명에서 120명으로 늘리고 이에 아피우스와 10인회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결국 약속의 두 동판은 완성되었지만 공포되지 않아 권력을 지속할 구실을 밝견하게 되었지만, 당시 외세에서 로마에 전쟁을 걸어오자,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던 10인회는 원로원을 소집하게 되고 결국 자신들이 해왔던 오만한 권력이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10인회를 처리할 수 있었지만, 인민은 집정관을 원하지 않았고, 귀족은 호민관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10인회를 지속하다가, 지속되는 아피우스의 오만한 권력 행사에 대해 결국 농성으로 10인회의 퇴진을 요구하고, 다시 집정관과 호민관이 부활하게 됩니다. 자유를 향한 인민의 욕망과 귀족의 지배욕이라는, 각각의 욕망에 따라 특정한 인간이 지지를 얻게 될 때 참주정이 등장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된 사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피우스의 참주정은 오래 가지 못했는데,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한 인민을 탄압하고 오히려 귀족과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귀족은 자신들의 탐욕에 따라 참주를 거부하기 때문에 같은 편을 잘못 고른 아피우스의 실정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민의 지지를 얻고 귀족에 반감을 받는 참주가 더 오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내부에 세력이 충분하지 않으면 외부의 도움을 얻으면 가능하지만, 아피우스는 이러한 것을 모르고 결국 짧은 기간에 자신의 참주 권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10인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인민과 원로원의 실수는, 자기 수중에 권력을 취하려는 이를 방치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권력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민과 귀족 모두 자신들의 욕망에 따라 실책을 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41장. 중간단계를 적절히 거치지 않고 겸손에서 오만으로, 자비에서 잔인함으로 돌변하는 것은 경솔하고 무익한 짓이다
10인회 아피우스의 참주정치에서 나타난 갑작스러운 태도의 돌변에 대해 마키아벨리도 의문을 표합니다. 임기연장을 괴하기 위해 인민의 편으로 가장하고, 귀족의 예상을 깨는 자기 천거 등 놀라운 일을 벌였지만, 갑작스럽게 성격을 바꾸어서 모든이의 적이 되는 행동은 현명하지 못했음을 지적합니다. 사악한 행동을 하고자 해도 천천히 과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지적하며, 권위의 훼손을 막고 본색을 보여주지 않아야 권위를 지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42장. 인간이란 얼마나 쉽게 매수될 수 있는가
그리고 아피우스의 추종자의 사례로 보아, 사람들은 약간의 이득을 위해 쉽게 변질되고, 분별력을 잃고 참주화하고 말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국가의 입법자는 욕망을 제어하고, 인민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말합니다.
43장.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야말로 훌륭하고 충직한 군인들이다
로마 10인회의 군사적 지도력은 매우 형편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지 않을 수 없는 위기에 몰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용병은 쓸모없는 존재라 평가합니다. 용병은 충성심이 없고, 자기의 적인 조금이라도 용맹한 경우 대항하려는 용맹(virtù)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애착과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투정신은 백성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백성으로 편성된 군대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지휘하려는 지휘관이 10인회처럼 형편없는 경우 사기를 유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로마인들은 자유민으로 싸울 때 자신들의 용기를 되찾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합니다.
44장. 지도자가 없는 다중은 무력하다; 먼저 위협하고 나서 권력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결국 10인회 사건으로 평민들이 무장 농성에 들어가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원로원의 발레리우스와 호라티우스가 비르기니우스를 비롯 20인의 군사위원과 협상을 하게 됩니다. 평민들은 호민관 제도의 창설, 관직 임명에 대한 인민의 동의, 10인회의 화형 등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마지막 요구에 대해서 거절하며 한 조언이 의미심장합니다.
“스스로 권위와 권력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되찾은 연후에 그들의 원을 풀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라”(237)
“사람이란 결코 속내를 드러내서는 안 되며,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 곧 당신은 그 무기를 수중에 쥔 연후에 당신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다.”(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