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와 정치 – 발리바르 / 서문, 1장 / 24.09.12 / 화니짱
스피노자와 정치 – 발리바르 / 서문, 1장 / 24.09.12 / 화니짱
서문
p9 : 만약 정치가 정념의 질서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인간의 욕망 및 활동을 “기하학자들의 방식에 따라... 곡선과 평면, 입체의 문제들”로 인식하자고 제안한다. 만약 정치가 현재성 안에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면, 여기 이 철학자는 현자와 훌륭한 주권자란 모든 독특한 실재를 “영원성의 관점에서” (윤리학)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순수한 사변이 아닌 정치에 대해 말해 줄 수 있는가?
하지만 스피노자 자신은 지성과 확신, 개념과 실천의 결합에서 어떤 모순도 발견하지 않았다.
1장. 스피노자의 입장
p16 : “내가 글을 쓰게 만든 원인들을 제시해 보겠다.”(신학정치론)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힘들에 대한 격심한 공포와 교회들의 타산적 교조주의 때문에 종교가 미신으로 타락할 위험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부터 표면적이거나 잠복적인 내전과 권력가들이 다중의 정념을 조작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가지 인식을 구분해야 한다. 첫 번째 인식은 성경에 대한 엄밀한 독해로부터 도출될 수 있으며 “복종 이외의 다른 대상을 갖지 않는” “계시적 인식”이고, 다른 인식은 자연에만 관계하며 보편적인 인간 지성이 획득할 수 있는 “자연적 인식”(잠정적으로 학문 또는 이성이라고 말해 두자)이다. 여기서 (17) 의견의 자유가 생겨날 것이다. 이로부터 사회 생활의 근본 규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곧 ‘행위만이 소추될 수 있고 말은 결코 처벌되지 않는다는 것’이 공법이 될 것이다. 이 근본 규칙이 준수되는 국가가 바로 스피노자가 뒤에 민주정이라고 부를 국가다. 암스테르담의 ‘자유 공화국’은 여기에 근접한 국가형태다. ‘절대주의’ 군주론자들과 신학자들은 참된 종교와 철학을 위협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 같은 이유에서 자유 공화국을 위협한다. 따라서 민주정과 참된 종교(박애와 정의)및 철학은 단 하나의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유다.
‘자유의 당파’
(19) 홀란트 공화국의 지도자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자유의 당파’로 지칭한다. 곧 네덜란드 민족해방투쟁의 후계자이자 당시 ‘절대주의’ 유럽에서 득세하고 있던 관점과 유사한 군주제적 국가관에 맞서 시민적 자유를 옹호하는 투사이며, 개인적 양심의 자유와 지식인들의 자율성,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자유로운 사상교류의 옹호자로 자처한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유 공화국’을 위한 투쟁에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확신할 것으로 믿지 않았다. 특정 집단의 정책 및 그들의 ‘보편적’ 이해관계와 동일하다는 관념을 필두로 하는 그들의 자유라는 자체에서 문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그들의 확신이 길러낸 환상을 암묵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른다.
(21) 사변적 철학과 정치에 응용된 철학을 구분하는 데서 생기는 난점은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지혜에 대한 중대한 장애물이다. 그러나 철학과 정치의 이러한 통일성은 단순한 것도 이해하기 쉬운 것도 아니다.
종교인가 신학인가?
p23 : <신학정치론> 전체에 걸쳐 공언되고 있는 목적과 일치하는 주요 관념은 철학의 영역과 신학의 영역의 근원적인 분리라는 관념이다. (26) 스피노자는 신학이 반철학적일뿐 만 아니라 반종교적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신학에 맞서 사상의 자율를 옹호하는 데서 출발해서 이제는 이번에는 철학자들까지 겨냥하고 있는 참된 종교(항상 계시와 연루되어 있는)를 옹호하는 데 이른 것이다.
이처럼 스피노자는 단지 신학자들만이 아니라 철학자들 대부분과도 대립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신학자들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종교의 대상에 대해 합리적으로 사변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그리하여 이 대상을 이론적 대상으로 변형시키기 때문이며, 철학자들을 반대하는 것은 그들이 철학을 반종교적 담론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정설과 자유의지 : 종교 이데올로기들의 갈등
p28 : 칼뱅은 ‘인간의 활동’을 통한 구원이라는 관념을 인간의 오만으로 비난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것들은 자신의 창조주 앞에서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피조물의 시도이며, 이는 악의 본질 그 자체다. 자유의지의 교의에 예정의 교의를 대립시킴으로써 그는 논쟁을 격화시켰는데, 이 후자의 교의는 구원이 항상 이미 신에 의해 결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미리 ‘선택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p30 : 스피노자는 자유의지의 옹호자들에게도 남아 있는 숙명론의 잔여(곧 원죄의 관념)를 거부함으로써 이들의 테제를 이들이 기독교도인들로서 인정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곧 선한 활동의 종교적 가치에 대한 모든 질문은 현세의 활동의 본래 성질로 귀착된다. (31) 스피노자는 ‘신의 영원한 결정’을 인간의 본성과 대립하는 은총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실로 충격적으로 그것을 그 전체성과 필연성에 따라 파악된 자연 그 자체와 동일시한다.
사실 ‘자유의지’신학과 예정설 신학 모두는 구원에서 하나의 기적을 발견한다. 곧 전자는 자연적 필연성(또는 육신)에 거스르는 인간 의지의 기적을 발견하고, 후자는 타락한 인간의 자유를 ‘물리쳐’야 하는 신성한 은총의 기적을 발견한다. 이처럼 전혀 상반되는 신학들에 공통적인 허구는 자연적 세계와 대립하는 도덕적 또는 영성적 세계라는 허구다.
p33 : 신에게 모든 인간적 한계나 유한성이 제거되어 이상화되긴 했지만 인간관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빌려온 신인동형동성론적 행위들을 부여했을 뿐이다. 신의 의지를 자유의지로 인식함으로써, 곧 모든 인(34)간적 역량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이지만 어떤 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권능으로 인식함으로써,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신의 심리학’에 대한 환상적인 도표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신학자들에게 하나의 특전을 포함한다. 곧 그들을 신과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필수불가결한 중개자들로, 신의 의지에 대한 유일한 해석자들로 나타나게 해준다. (35) 두 번째로 신학적 표상들의 신인동형동성론은 여느 허구들 중 하나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적인, 곧 이상화된 군주에 대한 상상이다. 기독교 국가의 군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보증물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교회들, 분파들, 당파들 : 홀란트 공화정의 위기
p36 : 1565년의 ‘공화파의 반란’이래 홀란트는 실제로는 결코 전쟁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장과 식민사업의 독점에 기초한 중상주의적 확장의 형태 자체가 실은 영속적 전쟁을 함축했다.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연합주 공화국은 자주 침략을 당했다. 그때마다 진정한 국민국가의 구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각 주들은 독립전쟁에서 좀더 커다란 자율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두 개의 경쟁적인 지도적 집단이 추진하는 두 개의 정책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지방의 오랜 귀족 출신인 오라녜-나사우 家는 전통적으로 군대 지휘권과 총독의 행정권을 부여받고 있었다. 부르주아 집정관들의 집단은 도시행정권 및 지방 재정관들에게 위임되는, 그리고 연합주 공화국 의회와 연방정부의 경우에는 ‘재상’에게 위임되는 공적 금융의 관리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37) 처음에 오라녜 가는 국가를 군주제 쪽으로 밀고 가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집정관파의 주요 지도자인 얀 더빗은 재상이 되어 군대지휘 업무로부터 오라녜 가를 영구적으로 배제시키는 법령을 제정했으며, 나중에는 총독제를 폐지시켰다. 그러나 1660년대부터 오라녜파는 집정관파의 권력에 대항하여 점점 더 강력한 선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선동은 프랑스가 침략한 1672년에는 대중적 폭동을 유발시켰다. 얀 더빗과 그의 형은 군중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총독제는 더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복원되었다. ‘총독 없는 공화국’은 겨우 20여년 동안 지속된 셈이다.
오라녜 가는 우선 ‘국내’ 지방의 토지소유자들이라는 제한된 귀족계급의 수장이었던 데 반해, 집정관파는 도시와 해상, 산업 및 상업의 대부르주아지로부터 생성되었다. 그들은 사실상 권력에서 배제된 중간 부르주아(수공업자, 국내 상인, 어업 종사자들)로부터 점차로 분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적 축적은 수년 사이에 암스테르담과 레이든에서 빈곤한 농민들을 잠재적인 반란상태에 처해 있는 비참한 프롤레타리아로 창출해 내었다.
(38) 연합국 공화국에서 칼뱅주의적 개혁은 ‘로마(카톨릭)식의 우상 숭배’에 대한 거부와 반스페인(이후 반프랑스)적인 애국심을 결합시켰다.
홀란트의 칼뱅주의는 두 가지 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갈등은 사회적 적대들과 정치적 ‘당파들’의 형성을 영구적으로 과잉결정하게 된다.
첫 번째 분파는 간쟁파(remontrants 항의자)였는데, 이들은 아르미니우스의 지지자들이었다. 자유의지의 옹호자들인 이들은 또한 양심의 자유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종교적 관용의 전통에 속해있었다.
(39) 전통과 확신에 따라 집정관파의 귀족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홀란트를 근대과학의 발생지 중 하나로 만들게 될 수학자들과 의사들, 발명가들이 이 계급으로부터 충원되었다. 집정관파는 본질적인 두 가지 점에서 간쟁파와 일치했다. 곧 시민적, 종교적 평화와 따라서 국민적 통합의 조건으로서의 관용 및 교회들의 조직에 대한 시민권력의 우월성이 바로 그것이다.
(40) 이 모든 점에서 다수파인 고마르파(反간쟁파)와의 적대는 화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통파 칼뱅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의 이중적 복종이라는 테제를 옹호했다. 곧 시간의 영역에서는 통치자들이나 군주에 대한 복종과, 정신적 영역에서는 교회에 대한 복종이 그것이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완전히 자율적인 교회는 목사들을 선출하고, 신자들을 통합하고 설교하고 교육하는 데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복종이 이중적이라면, 법은 모든 권위의 유일한 원천, 곧 신 그 자신으로부터 유래한다.
이 때문에 사실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곧 시간적 영역의 군주는 진정한 신앙이 국가 안에 편재되어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독교적 군주’일 경우에만 복종에 대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다. 그리하여 절대주의에 대한 저항의 요새를 구성했던 칼뱅주의가 홀란트에서는 억압적 기능을 수행했다. (41) 고마르파 사제들이 충원되었던 소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농촌의 인민과 프롤레타리아는 대부분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이 ‘개신교 목사들’은 집정관파의 신학적 타협을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양식과 공적 업무에 대한 그들의 독점을 비난했다.
p42 : 재침례파 전통을 지닌 공동체들(멘노파 등의 분파들)에서는 복음주의적 모델, 곧 교회적 위계제 없는 신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의 모델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서, 칼뱅주의적 형태와 대립하고 있었지만, 부분적으로는 콜레지언파와 같은 칼뱅주의적 교파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국가가 자신의 신민들에게 “살생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도록 강요할 권리를 지닌다는 것을 부정했으며, 평등한 사회, 노동과 이웃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길 기원했다.
p43 : 그런데 1610년대 이후로 오라녜 가는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계산에 의해 칼뱅주의 교회들의 보호자로 자처했으며, 이를 집정관파에 대한 압력에 지속적으로 활용했다. 역으로 고마르파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종파의 목표들을 추구했다면, 이는 사실상 ‘총독없는 공화국’에 반대하여 군주제적 경향을 지원한 셈이 되었다. 관점들의 진정한 일치라기보다는 양자의 전술적 일치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동맹은 인민대중이 국민의 번영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의심받는 집정관파를 신뢰하기보다는 엄격한 칼뱅주의와 오라녜 가로 경도될수록 더 불가피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