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 읽기 / 7-9장 / 25.03.05 / 빛이
▶7장 결혼생활의 목적과 윤리적 실존의 의미
1. 키르케고르의 결혼관과 결혼생활의 신성함.
‘낭만적인 사랑은 결혼과 결합될 수 있고, 또 결혼 속에 존립할 수 있다는 사실과, 결혼이란 낭만적인 사랑의 성화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나의 과제다.(이것이냐2, 60)’ p180
우선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편지를 받는 이 벗을 심미적인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사랑과 관련하여 결혼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하고 있다. p180
심미적인 사랑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결국 ‘비애’의 쓴맛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반면 결혼생활에 진입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주고나성이라는 ‘심미적인 사랑’의 범주에서 물러나 윤리적인 삶이라는 ‘객관성의 범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어느 것을 선택하여도 비고나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p181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벗이 이렇나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사랑의 첫 감각을 편애하기 때문’ 즉 ‘첫사랑에 대한 감정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결혼생활을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결혼생활을 바라보면 확실히 “세사의 남편들이 얼마나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가 있는가”를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181
결혼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는 대다수의 문학작품들이 … 결혼생활을 ‘사랑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끝’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p182
이러한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별과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결혼생활이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혼 생활이 이러한 윤리적인 덕목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p.182
즉, 결혼생활이라는 윤리적인 삶의 범주가 충분히 결실과 완성에 도달하려며 ‘사랑’이란는 하나의 근본적인 원리에 뿌리를 두고서 특유의 변증법을 통해서 심리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과의 관계성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p182
낭만적인 사랑이 결국에는 ‘비애로 끝나게 되는 이유는 낭만적인 사랑이 본질적으로 감정에 터전을 두고 있음에도, 이것이 사랑인 한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이 뿌리하고 있는 ‘심미적인 것’은 시간성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낭만적인 사랑은 결국 에는 ‘진정한 영원성’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p183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인 삶의 첫 번째 과업은 “사랑을 제일 먼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다. 윤리적인 실존이 ‘결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감성적인 사랑이 허위이거나 무가치한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랑을 완수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p183
즉 결혼이랑 ‘심미적인 사랑’을 걸훅한 사랑’으로 다시 말해 ‘영원성의 성격을 실제로 가지게 하는 것’을 지향하는 사건이다 p183
결혼생활이 사랑을 그 중심으로 하고, 이 사랑은 심미적인 사랑까지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 키르케고르는 사랑의 변증법을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주제를 끌어들인다. … 순수한 사랑에는 이것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지극히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목격자가 없다. 하지만 목적자가 있다면 그것은 단 한 분 ‘하느님’이다. … 그렇기 때문에 첫 사랑은 고귀한 것이다. p184
그는 ‘첫사랑’이 ‘결혼’과 공존할 수 있음을 논하고 있다. … 첫사랑에 있어서 역사적인 것의 조건은 곧 결혼인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적인 것 안에서 비로소 첫사랑이 결혼을 통하여 종교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결혼은 ‘서약’을 전제로 한다. p185
서약이야말로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 서약은 ‘확고한 마음가짐과 의무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서약은 영원성의 느낌을 시간성안에서 구현하고자 다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첫사랑을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이 곧 ‘서약’ 즉 ‘결혼’이며, 이는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하느님의 현존으로 끌어들이면서 ‘역사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p186
키르케고르의 진술에서 결혼에 대한 세 가지 의미를 산출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결혼은 심미적인 사랑을 정신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 둘째는 결혼에서는 ‘헌신’이라는 사랑의 특성이 단 한 사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 셋째는 결혼은 심미적인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을 그 자체안에서 가지는 것이다. … 결혼은 심미적인 사랑을 순화시켜 정신적인 것에까지 도약하게 하며, 여기서 종교적인 차원으로 승화하는 문을 열어 주고 있다. … 결혼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곧 두 인격이 이를 통하여 성인이 되는 것과 같다. p188
대다수의 일반인이 결혼의 신성함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상실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 결혼을 그 자체 목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다른 이유를 통해서 고려하는 것… 이 경우 결혼은 ‘심미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상실하고 오직 ‘윤리적인 것’만으로 남게 된다. p189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결혼생활을 어떤 다른 목적에 비추어 도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결혼을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p190.
2. 결혼의 목적과 사랑의 의무
결혼이 ‘자유’를 준다는 이러한 키르케고르의 말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p191
‘첫사랑’이 윤리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곧 ‘결혼’이라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윤리적인 것이 우리로 하여금 관습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p193
결혼생활을 관습적인 것으로 굴레를 씌우고 있는 것은 결혼의 이유를 결혼 그 자체에 두지 않고, 다른 목적에 두고 있기 때문… 그 첫째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 즉 ‘가문을 보존’하기 위해서거나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라는 이유이다. 이러한 이유를 “마치 인간이 하느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심리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제거해 버리는 것… 자식은 결혼의 한 축복이지, 결혼의 목적이 될 수가 없다. p193
두 번째 이유는 ‘가정’이라는 것을 통해서 일종의 노후보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이다. … 이는 자식에게 어떤 멍에를 지우는 것이요,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자유롭게 한다는 결혼의 그 원리와 모순되는 것이다. p195
세 번째 이유는 결혼이 ‘안락한 보금자리’라는 가정을 통해서 ‘안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류이다. … 사실상 진정한 ‘안이’는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수도원에서도 희망할 대상이지 성취의 대상은 아니다. p197
결국 키르케고르에세 있어서 결혼이란 심미적이고, 윤리적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것이다. 첫사랑의 심리적인 것이 결혼을 통하여 윤리적인 것으로 승화하고, 또 다시 종교적인 것의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한다. … 결혼의 윤리적인 삶에서는 심미적인 것이 그대로 보존되고, 또한 종교적인 것 안에서는 윤리적인 것이 그대로 보존된다. p198
어떤 의미에서 결혼생활이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은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책임성’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한 것’이다. p198.
▶8장 인생의 선택과 윤리적 실존의 양태들
1. 인격의 의미와 ‘너인 그것이 되라’
인생이란 ‘선택의 문제’라는 것과 이러한 선택이 그의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이러한 선택이 결국 자신의 인생을 형성하면서 전체저으로 잘 사라는 삶과 그릇된 삶, 진리의 삶과 오류의 삶 혹은 구원된 삶과 어둠의 삶으로 형성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p 200.
이러한 선택의 과정을 통해서 한 개인은 진정으로 고매한 인간이 되고 종교적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p 200.
인생에서는 수많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회들이 주어지지만 이러한 양자택일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순간은 매우 드물다… 한쪽에는 참된, 의로움, 거룩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쾌락, 천박함, 어두운 정열, 다락이 있는 경우이다. … 이 경우에도 올바르게 선택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p 200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비록 무수한 실패와 오류의 과정을 거친다 할지라도, 마침내 진리에 도달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올바르고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갈망은 바로 인간의 본성 혹은 본질에 각인되어 있는 존재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p 201.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이것과 저것이 의미하는 것은 ‘심리적인 삶이냐 윤리적인 삶이냐’ 혹은 ‘윤리적인 삶이냐 종교적인 삶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물음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어느 단계에서건 ‘올바름’과 ‘그릇됨’ 혹은 ‘실존적인 것’과 ‘실존적이지 않음’의 택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p 201
바로 이러한 선택을 통해 한 개인이 심미적인 것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윤리적인 존재로 되고, 또한 윤리적인 것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종교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이 종교적인 존재랑 시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영원성을 획득하는 존재이며, 보편적인 것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개별적인 존재가 된 존재이다. p 201
이러한 최종적인 목표에 도달한 인간이야말로 진정으로 시간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가진 ‘진정한 자기 자신’을 되찾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p 202.
그는 인간을 ‘인격persona’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가장 은밀하고 가장 거룩한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으로서 ‘신성과 연결된 인간성’ 혹은 ‘미학적, 윤리적, 종교적인 것이 통일된’ 개별자, 보편적인 것으로 자기 속에 설립한 개별적인 자기-자신이다. p 202.
세상에는 이렇게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 본질을 형성하면서 이를 드러내는 사람과, 자기-자신을 진정으로 형성하지 않고 거짓으로 드러내는 사람이 있으며, 이러한 거짓이 반복되면 어느 날엔가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낼 자신의 본질이 없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격의 결합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이 그를 사랑할 수 있는 ‘자기’-자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 203-204.
만일 현상학적으로만 인간의 삶을 고찰하자면 인간은 본성ㅈ거으로 ‘모순’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따른 삶이랑 선을 갈망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고, 정의를 갈망하나 정의롭지 않고, 고귀한 것을 원하지만 천박한 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p 205.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혹은 그가 어떠한 범주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의 확신으로 그것을 선택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p 206.
선택의 순간에서 스스로의 확신에 의해 자율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실존적인 사람은 ‘현재’를 거의 절대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는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옳은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한번 옳다고 확신이 들 때에는 선택을 미루지 않는다. … 생각해 보라, 만일 그가 내일이나 모레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무엇이 두려워 이러한 선택을 미룰 것인가! 이것이 순간을 절대적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이다. p 206-207.
오직 자기 자신의 것,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 자신의 인격에 속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내용을 채우고 있는 사람이 진정 실존적인 사람이며, 참되게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너인 그것이 되라’는 토미즘의 윤리적인 언명이 키르게고르의 실존적인 사유에서도 여전히 진리이다. p208.
2. 선택의 문제와 정신의 성실성
키르케고르는 잘못된 선택이나 오류의 선택을 발견하고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서 흥미로운 동화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인어의 바력적인 연주에 홀려 마법에 걸린 사람이 마법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인어가 연주한 그 음악을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거꾸로 연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 거꾸로 연주한다는 것은 곧 내가 지금까지 선택한 일련의 과정을 현재부터 첫 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말한다. p 209.
하나의 나쁜 결과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을 가정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의 오류가 끼어들면 거기서부터 이후의 선택들이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선택의 올바름에서 올바름의 기준이 ‘선과 하기의 문제이기에 선택의 행위란 본질적으로 윤리적인 것이며, ‘선택의 행위’에서 고민한다는 것은 곧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p 209.
그래서 심미적인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심미적인 것은 기호의 문제이며, 어느 것을 선택해도 좋을 선택 즉 선악의 문제가 배제된 양자택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p 209.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의 행위에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심미적인 삶이냐, 윤리적인 삶이냐’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하는 문제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 이러한 선택이 ‘진정으로 나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에 있다. p 210
‘선악의 선택’이 무의미한 사람이란 오직 심미적인 실존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며, ‘선악의 선택’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가 윤리적인 실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윤리적인 실존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즉 선악에 대한 선택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의미가 있기만 한다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p 211
그래서 범주적으로 ‘이것과 저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 앞에선 주체의 내적인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선택행위에 있어서 ‘실존적인 파토스’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이러한 선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정신의 성실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p 211.
철학적 의미에 있어서 ‘정신의 성실성’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자신을 부인한 자라고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존재론적인 죄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자를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그 이유는 비록 그들이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이러한 삶이 그들의 진정한 의미 혹은 절대적인 의미로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p 211.
3. 실존적인 파토스와 선악의 문제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수 많은 윤리적인 문제가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실상 여전히 심미적인 실존의 문제이다. 진정으로 윤리적인 실존이 형성되는 것은 선악의 문제에 있어서 양자의 선택을 감행하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p 214.
선택의 문제는 오직 윤리적인 실존에 있어서만 진실로 의미 있는 문제로 부각된다. 그런데 선과 악을 선택하기 위해… 이를 식별하는 기준 혹은 원리는 무엇인가? … 이는 ‘양심’이다. p 215.
심미적인 실존에 있어 별것도 아닌 것이 양심에 비추어 볼 때 거의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심미적 차원에서는 아무리 크고 대단한 것이라고 해도 양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아닐 수 있다. p 215.
양심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그것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선택’이라는 윤리적 실존에게 있어서는 그 삶의 방식이 본질적으로 거의 절대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p 2015-216.
일반인들이 윤리적인 실존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윤리적인 문제 즉 선악의 문제에서 선택을 요구하는 상황이 매우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미루거나 선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p 216.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자 한다면 그는 여전히 심미적인 실존에 머물러 있으며, 윤리적인 실존으로 도약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옆으로 내빼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문제로서, 악은 악으로 드러나지 않고 선도 선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명백히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여전히 심미적인 실존에 머물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죄의 상황을 묵인하는 것이 되고 곧 자신도 ‘죄 중에 있는 것’이다. p 202.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악의 긍정적인 측면’을 고찰할 수 있다. 만일 악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선악의 선택’이라는 윤리적인 실존이 발생할 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 즉 현존하는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로운 행위도 존재할 수가 없다면 의로운 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관점이다. p 220
물론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선태하지 않는 것보다는 선이나 악을 분명하게 선택하는 것이 보다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최소한 그의 자유를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행사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것이며, 윤리적인 존재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윤리적인 존재로 도약하였다는 사실은 또한 그가 앞으로 계속하여 이러한 선악에 대해 갈등을 진지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222.
반면 선택행위를 미룬다는 것은 여전히 심미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신의 순수성을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 어떤 인간관계도 거부하고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의 오류 처럼, 어른이 되면 죄를 더 많이 짓기 때문에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머물고자 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p 222.
일단 한번 악의 행위를 선택한 윤리적인 실존의 사람은 보다 악의 행위를 선택할 기회가 많아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 하나의 선택은 내일 있을 다른 선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p 222.
그런데, 진정한 윤리적인 실존으로 도약한 사람, 즉 선택의 기로에서 ‘선한 행위’를 선택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으로 이렇게 선한 행위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로 하여금 선을 선택하도록 한 그 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실존적 파토스’의 개념이 등장한다. p 223.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 이렇게 절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양자택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실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거나 절대적으로 의미 있을 때에 그럴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실존을 앞서 심지적 실존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남녀 간의 사랑’에서 볼 수 있었다. p. 224
사랑하는 것에 절대적이 의미를 부여하였던 사람들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들은 심미적 차원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사람들, 즉 파토스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진정한 윤리적 실존으로 스오하하지 못하고 비록 비극적인 생을 가질 수 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심미적인 실존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무감동보다는 차라리 슬픈 감동을 선혼하듯이 ‘열정을 가진다는 것’ 이것이 실존주의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p. 224
즉 사랑이 그들의 ‘에토스(목적, 궁극목적)’였던 것이다. ㅇ니생에 있어서 분명하고 확고한 목적을 가진다는 것, 이것이 ‘파토스(열정)’를 가지게 하는 이유이자 힘이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실존에 있어서 자신의 선택에 ‘파토스’를 가지게 하는 것은 곧 ‘에토스’ 즉 궁극적인 목적이다. p. 225
이 에토스는 곧 ‘자기-자신이 된다는 것’이며, 이는 오직 윤리적인 선택행위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나 자신’이란 “내가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파토스를 가진 사람이란 그것이 절대자가 아니라면 “나 자신이 아닌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으로서는 결코 선택할 수 없느”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p. 225
선악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심미적 실존의 선택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 윤리적인 실존이 되고자 진지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우주를 묘사해주는 심미적인 일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인격 혹은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악을 선택한다는 것은 ‘거짓 인격’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p. 225-226
실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마치 내일이나 모레 곧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할 때, 실존적으로 선을 선택한다는 것은 마치 이러한 선택이 생의 마지막 선택인 것처럼 고려하는 것을 말한다. p. 226.
그들(윤리적 실존을 살고 있는, 마치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진지한 - p. 227)에게 있어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저 멀리 미래 어느 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들의 실존을 가즉 채우고 있는 그 무엇, 즉 ‘내면성’으로 나타나며, 이것이 그들에게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할 ‘실존적인 파토스’를 야기하는 것이다. p. 228.
4. 정신적으로 규정된다는 것과 세상에서 절망한다는 것
한 인간이 진정으로 정신으로서 규정된다는 것을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을 초월하게 되는 실로 엄청난 사건이다. … 정신적으로 된다는 것은 총명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소유한다는 것이며, 진정한 개별자가 된다는 것이다. p. 228-229
개별자가 된다는 것은 일반성 혹은 보편성의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내면적으로 된다는 것이며, 자기 자신 안에서 영원성을 선취하고 구축하는 일이다. … 세계로부터 초연한 사람이며, 어떤 문화적인 율법보다 큰 ‘윤리의 목적론적인 중지’가 현실로 된 사람… p. 229
**윤리의 목적론적 중지
- 헤겔주의자들의 윤리 개념을 비판하게 위해 고안한 개념, 믿음이랑 윤리적인 지평을 넘어 절대적인 지평으로 도약하는 인간현상이라고 말함. 그래서 윤리는 믿음 앞에서 그 권위를 중지하여야 한다고 생각. 상징적인 예 - 아브라함의 이삭 제물
인간이 우울해지는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정신적으로 규정되지 못하였다는 사실, 즉 자신의 죄과 때문이다. …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것만으로는 우울함을 극복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것에 대한 욕구를 느끼고 있는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 p. 232-233
정신이 진정으로 정신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초월 혹은 초탈을 체험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세상에 대해 절망하여야 한다. … 인간은 이러한 진정한 절망 즉 ‘반성된 절망’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 영원한 것에 속할 수가 있다. 이러할 때야만이 오히려 세상을 잃지 않고 최우적으로 온 세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 실존주의의 역설이다. p. 234.
정신적으로 규정되고 세상을 초탈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어려운 이유… 첫째, 현실속에서 마치 자기-자신이 소멸되는 것 같은 엄청난 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총체적으로 ‘포기’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것 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p. 235
그런데 세상에 가끔 이러한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포기한 것은 수많은 것 중 하나일 뿐이며, … 진정한 절망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절망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것 일체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을 말한다. p. 235-236
“인격은 절망 속에서만 안정할 수가 있지만,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에 의해서 절망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절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은 원하지만 한다면 그 어떤 재난 속에서도 여전히 세상의 어떤 것에 기대를 가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절망은 스스로 원하는 것이며,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p. 238
따라서 윤리적인 실존이 선과학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가장 크고 결정적이며, 가장 최추적인 선택이 곧 ‘세상에서 절망한다는 것’이다. p. 238
5. 자아의 역사성과 윤리적 인생관
어떤 ‘절대적인 것’을 선택한다는 것과 이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 그렇다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곧 ‘자기 동일성’에 대한 선택 혹은 ‘자기 동일성으로서’ 선택한다는 것을 말한다. p. 238-239
세상 모든 것이 변하여도 자신은 그대로 ‘자기-자신’인 것으로 남아 있고자 하는 이러한 갈망이 곧 ‘자기 동일성’에 대한 갈망이며, 이는 인간 속에는 어떤 절대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징표’이다. p. 240.
… 이게 대한 가장 추상적인 표현이 ‘자유’이다. 자살이란 인간이 가진 자유의지의 극단적 표현이다. …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자살이란 복잡하고 모호한 존재의 얽힘에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는 한 사람이, 육체의 죽음이라는 선택을 통하여 자신의 동일성을 되찾고자 하는 최후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p. 240.
자살자의 오류는 자시 자신을 선택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것이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무한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한한 의미에서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p. 241
영원성과 관계된 자기 자신을 소유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엄숙한 것이며, 가장 원래적인 의미의 혹은 있는 그대로의 ‘인간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242.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이며, 불안한 존재이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성’의 진정한 의미가 발생한다. … 이 ‘나의 역사’라는 것은 진정으로 혹은 실존의 의미로서 내가 속한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p. 243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나의 역사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p. 243.
요컨대 진정한 자기 역사를 가진다는 것은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정치적인 이념 등의 모든 인간의 자연적인 귀소본능을 초극하여 영원성 혹은 무한자와의 관계성을 가지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p. 245
개인의 역사성을 가지는 것의 방식을 키르케고르는 “뉘우침(회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신과의 관계성을 가지는 것과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참회자”의 양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참회자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것 안에 설립하기 위해서 일체의 상대적인 것에서 돌아서는 자를 말한다. p. 246.
그래서 인간이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신의 은총과 사랑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상에 침잠한 나의 실존을 세상으로부터 들어 올려 신의 사랑에 마음을 활짝 여는 것이 된다. 바로 이것이 ‘참회’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뉘우침은 곧 ‘선택’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p. 247.
참회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인간의 삶이란 그가 존재하는 그곳에 머무르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심미적인 실존의 본질적인 국면이다. 반면, 윤리적인 실존은 앞으로 그가 ‘되어야 할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의 국면이며, 이는 그의 자유를 통해서 실현된다. 따라서 심미적인 실존은 필욘에 의해서 움직이며, 윤리적인 실존은 자유에 의해서 움직인다. p. 249
6. 윤리적 실존에서 보편자와 개별자의 문제
자기-자신이 된다는 것은 곧 개별적인 인격을 완성해 간다는 것이며 따라서 보다 개별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선하게 된다는 것은 보다 일반적인 혹은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나의 존재가 보다 개별자가 되는 동시에 보다 보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가? p. 250
현대인에게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모순은 보다 분명해지며, 여기에 현대인의 오류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현대인들은 ‘차이’를 통해 뛰어난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수치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 이는 심미적인 실존의 특성이기도 하다. 즉 현대인들은 “선량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지극히 하찮은 경력”으로 고려하고 있으며 더이상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게 하고 개별적인 기분에 집착하게 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p. 251
개별자는 전체적으로 차이이고 다름이다. 만일 이들이 세상의 것에서 초탈하여 개별적인 자신의 인격을 확고하게 소유하고 있다면, 이러한 차이를 상실할까 두려워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p. 252
그런데 윤리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개별적인 것 혹은 차이를 포기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윤리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도 심미적인 실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다만 윤리적인 실존으로 도약하면서 심미적인 실존이 보다 상대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이다. p. 252
윤리적인 실존이란 자기의 삶의 중심을 가지 안에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생활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p. 253.
실존적인 선택에 있어서 그 본질적인 국면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완전히 주체적이 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실과의 절대적인 지속성이다. p. 254
다시 말해서 신비주의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경우는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그 첫 선택에 있어서 구체적이고 행동적이지 못하고 형이상학적인 명상에만 안주할 때이다. p. 256.
윤리적인 실존이 된다는 것은 자기-자신을 선택하면서 전체 혹은 무리 속에서 빠져나온 단독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양심의 판단에 근거한 선과 악이란 상대적이거나 개별적일 수 없고 모든 이에게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p. 256-257
그래서 키르케고르는 비범한 인간이란 ‘보편적인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개별성의 극한점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p. 259
▶9장 종교적 실존의 근본적 태도와 건덕적인 지혜
이 글은 종교적 실존에 있어서 ‘의로운 자’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절대자 앞에서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근본적인 실존적인 자세.. 에 대해서 강하게 역살하고 있다. p. 262
키르케고르는 질문을 던진다. 의로운 자가 의롭지 못한 자와 더불어 고통받아야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인지…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옳지 못하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p. 264
그는 자연의 피조물들과 인간 존재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참새와 백합은 하느님 앞에서 옳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외 다른 모든 생물드은 ‘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p. 264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며, ‘죄를 지을 가능성’ 즉 ‘죄성’을 항상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서 옳지 못한 것이다. 자연은 결코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이 옳다는 주장을 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의 옳음을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옳지 못한 것이다. p. 265
인간에게는 섭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한다. p. 265
그렇다면, 죄의 가능성을 인간에게 허락한 신의 행위는 사리에 어긋나는 일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죄의 가능성과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성 속으로 데려가는 신앙’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p. 266
“옳지 않다는 것 - 이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물게 이러나고, 마침내 이러한 희망속에 우리 자신을 확립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의로운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고통을 찾게 된다. … 즉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을 변호할 만한 것을 찾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옳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p. 267
하느님과 관계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의 바람, “내가 항상 옳지 못했으면”하는 바람 밖에 없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생각 속에서만 안정과 기쁨을 찾을 수가 있다. p. 267.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옳지 않음은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대적 존재와 절대적 존재,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 사이의 관계성에 있어서 존재론적인 어떤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영혼은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관심을 돌린 사람이며, 그의 영혼은 진정한 대상을 찾았고, 그의 사랑은 행복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p. 268-269
하느님과의 관계성이란 근본적으로 “내가 옳지 않다”는 정서를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성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무한한 관계에 의해서만 의심을 진정되고, 오로지 하느님에 대해 무한히 자유로운 관계에 의해서만 비로소 그의 불안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p. 270
유한성과 무한성, 상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존재 그리고 시간적인 존재와 영원한 존재가 확고한 관계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이성적인 헤아림을 초월하는 하나의 도약이고 역설이다. p. 270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염원을 단졈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상실한다고 해도 기쁨을 느낄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p. 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