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_키르케고르_110p ~ 1편 끝까지(156p)_발제용용
B. 의식의 규정하에 볼 수 있는 절망 95p
b.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있는 절망 106p
α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 약함의 절망 110p
1.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 112p
2.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131p
β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 -반항 142p
요약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있는 절망의 유형은 크게
α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약함의 절망)와
β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반항)로 나뉜다.
α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는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과,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으로 나뉜다.그러나 지상적인 것에 대한 절망은 결국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과 같다. 지상적인 것이 너무 중요해져 영원자로부터 위안 받길 원하지 않는 것이 결국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β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 절망한 인간은 신이 인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대신 자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하여 자아 안에 있는 영원자를 반항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α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 약함의 절망 110p
1.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
직접적인 인간은 단순히 정념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그의 자아는 시간성과 세속성의 영역 안의 어떤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변증법은 쾌와 불쾌이고 그의 개념은 행·불행·운명이다. (112) 직접적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고 있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문자 그대로 웃옷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아라는 것을 단지 외면성만으로 인식하고 있다. (117)
그런데 직접성이 그 자신 안에 일종의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 보자. - 그렇다면 절망의 형태는 다소 변한다. (118) 그러나 이런 노력도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를 좌절시킨 곤란이 그에게 모든 직접성과 절연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에 응할 수 있는 충분한 윤리적인 반성이 그에게는 부족하다. (120) 이렇게 하여 그는 절망한다. 이 경우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집에 대한 관계 이상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스토브에서 연기가 새어 나온다든지 하는 사정으로 자기 집이 불쾌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는 밖으로 나간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 집을 떠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새로운 집을 빌리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여전히 그 옛집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그는 자기 집이 다시 기분 좋은 상태가 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절망자의 경우도 그와 같다. 어려운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는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처럼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윽고 그런 상태가 지나가고 사정이 변하여 어두움은 사라지고 대개 잊히리라. (121)
이리하여 그것을 서서히 잊어 가는 일에 성공한다. 다시 말해 유능하고 활동적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122)
2.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관한 절망은 그것이 절망인 한 사실은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이것이 실로 모든 절망에 대한 전형이기 때문이다. (131)
그런데 이 절망에는 주목해야 할 진전이 있다. 이제까지의 절망은 약함의 절망이었지만 이것은 자신의 약함에 관한 절망이다.
그리하여 전체를 보는 눈이 바뀐다. 이제 절망자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지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며 또한 절망하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절망자는 자신이 영원적인 것에 대해, 즉 자기 자신에 관해 절망해 있다는 사실, 자신이 지상적인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 약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32)
여기에는 단계가 있다.
그것은 먼저 자기에 대한 의식 속에 나타난다. 사람이 절망하는 것은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이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에서는 절망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욱 높은 의식이 나타난다. 여기서의 절망은 영원적인 것과 자기 자신을 잃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기에는 좀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한 발짝의 전진이 나타난다. 이 절망은 점점 도가 강해져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구제에 한 발짝 가까워진다. 그런 절망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잊기에는 너무 깊은 것이다. (133) 그런데도 절망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형태로 환원된다.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식과 의절할 때처럼 자아는 약해져 버린 자기를 자기 자신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절망한 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 또한 이와 같다. 이 절망은 먼저의 절망보다 질적으로 한층 더 깊은 것으로 세상에서는 드물게밖에 볼 수 없는 종류의 절망이다. 그는 그 자신으로 있지 않으려고 일로써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을 폐쇄성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이 폐쇄성을 다루기로 하자. 이것은 직접성의 정반대이며 또한 직접성을 매우 경멸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절망자는 자신을 대단히 잘 폐쇄하고 있어서 자기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을 자신의 자아에 관한 일에서 멀리하고 있다. (136) 일반적으로 고독에의 충동은 정신의 징후이며 고대와 중세 사람들은 그것이 의미하는 것 앞에 아직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사교적인 시대는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범죄자와 같은 부류에 들어가게 되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다. (137)
β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절망 - 반항 142p
앞에서 말한 절망은 여성의 절망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절망을 남성의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142) 처음에는 지상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있고 다음에 영원자에 대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있다. 그 다음에 반항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본래 영원자의 힘에 의한 절망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하여 자아 안에 있는 영원자를 절망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143)
자아는 자신의 무한한 형태인 까닭에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자기 뜻대로 처리하려고 한다. 아니, 자기 자신을 만들려고 한다. 구체적인 자아 속에 가지고 싶은 것과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을 스스로 규정하려고 한다. (144) 절망한 자아는 신이 인간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대신 자기가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것에 만족한다. (145) 이렇게 절망한 자아는 공중 누각을 세우며 끊임없이 허공을 향해 헛되이 칼을 휘두를 뿐이다. 이런 모든 실험적인 성품은 겉으로는 훌륭하게 보이며 이런 자기 지배, 이런 부동성, 이런 무감동성(아타락시아)등은 엣날이야기 같은 것과 접해 있다. 자아는 절망하여 스스로를 자기 자신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을 전개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있다는 만족감을 향락하려고 한다. (147)
그는 자기 자신으로 있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구체적인 자아로부터 무한한 추상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국 그런 방법으로 영원이 되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고 한는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악마적인 광상이란 말인가! 절망이 점점 정신적으로 되고 폐쇄성 안에서 내면성이 점점 자신의 세계를 형성함에 따라 절망을 감싸는 외면은 그만큼 더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된다.(153)
우리는 인간이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지 않는, 가장 도가 낮은 형태의 절망으로부터 시작했다( α 1). 악마적인 절망은 절망이 가장 강화된 형태로서 여기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오히려 그는 자아의 존재를 증오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그는 전존재에 대하여 반항함으로써 전존재를, 전존재의 호의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잡고 있는 듯이 생각한다.
약함의 절망자가 영원이 그에게는 위안이라는 따위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반항의 절망자 역시 영원의 위안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가 다르다. - 후자는 전존재에 대한 반항이고자 하므로 위안 따위는 오히려 스스로의 몰락이 된다고 생각한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한 작가가 무심코 오기 (誤記-잘못 기록함)를 저지른 것과 같은 것으로 그는 이 오기가 자신이 잘못 쓴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 오기는 그 작가에 대하여 반란을 기도한다. 작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이미 쓰인 자기 스스로가 정정되는 것을 거부하면서 광기 있는 반항으로 작가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 싫다! 나는 말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반박하는 증인으로서, 네가 서투른 작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