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들어준다는 것!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6. 23. 09:11

슬라보예 지책의 <헤겔 레스토랑>에는 큰 타자(Big Other)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렇다할 설명도 없이 뜬끔없이 등장하는 이 용어를 붙들고 씨름하다가 오늘 아침에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다. 여기서는 큰 타자의 개념이 다소 다르게 다가온다.    

혹자가 자신은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는 것에는 몇 가지 심리적 조건들이 있다. 그 조건 중 하나는 그 사람 속에 자신에게 전문가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큰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큰 타자’(Big Other)란 개인의 정신 속에서 의미를 생성해내는 중심 위지, 장소, 개인을 둘러싼 보이지 않은 환경’, 개인이 자의적으로 좌우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주관적타자를 지칭한다. 아이의 정신 속에서 최초의 큰 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대상은 어머니이며, 그 후 아버지, ()가 속한 특정 생활세계의 의미와 규범을 좌우하는 권위자(선생...), 상징계...등등이 큰 타자로 존재한다. 보통 사람의 무의식은 이 큰 타자가 생산해내는 담론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판단, , 행동이 무의식의 큰 타자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산다.

혹자가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새롭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그()의 정신 내부·외부에서 큰 타자로 자리 잡고 있는 특정의미-가치체계와 특정 내적 대상에게 의미 있는 무엇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만약에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 기존에 자리 잡은 큰 타자의 관점과 다르거나 대립될 경우, 내부의 거대한 반발(저항)은 불가피하다.

그 저항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다. 새로운 선생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선생의 권력평가하기, 맞먹기, 비난하기, 특별한 관계 요구하기, 보통 관계처럼 평범화하기, 과도한 질문으로 수업분위기 망치기, 수업의 가치를 하찮게 만드는 웃기기와 웃기, 숙제 안하기, 1차 경고 외면하기, 잡담, 지각, 결석...등등.

이런 행동을 하는 당사자들은 도대체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왜 그런 상태에 놓이게 되는지 지각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 되는 것일 뿐이다! ‘큰 타자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여 얻는 심리적 평안과 향유때문에, 심부름꾼(똘마니, 꼭두각시)노릇을 하는 것뿐이다.(인터넷 검색)

여기까지 읽다가 문득 이런 물음이 생겨났다. “그럼 이런 아이들을 어떻게 하지?” 전직 교사로서의 어쩔 수 없는 직업의식의 발로랄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경청하는 것! 그들에게 중요한(의미 있는) 청자가 되어주는 것이다. 다음 글을 읽어보면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해줄 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 읽은 <헤겔 레스토랑>(슬라보예 지젝)의 한 대목이다.

생존자들이 마주치게 되는 문제는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것, 진정한 증인은 항상 이미 죽었으며 우리는 오직 그들은 대신해서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증언은 항상 할인법의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또한 그와 정반대 쪽에서 마주치게 되는 대칭적인 문제도 있다. 즉 증언하는 것을 받아줄 만한 제대로 된 공중, 청자가 없다는 것이다.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꾼 꿈 중 가장 트라우마적인 것은 살아남은 꿈이었다. 즉 전쟁이 끝나고 가족과 재결합해 수용소의 삶에 대해 들려주지만 그들은 서서히 지루해지기 시작해 하나둘씩 하품을 해대기 시작하더니 테이블을 떠나 마침내 레비 혼자 남은 것이다. 1990년대 초에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 당시에의 한 일화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잔혹한 겁탈에도 실제로는 아무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거나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자면, 여기서 빠진 것은 또 다른 인간 존재, 주의 깊게 들어주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큰 타자그 자체, 즉 나의 말들의 상징적 기입 또는 등록의 공간이다. 레비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같은 말을 이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유대인에게 한 짓은 그것의 공포를 재현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므로 누군가가 수용소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곳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의 말을 믿게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들은 간단히 그가 거짓말쟁이거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단언하고 말 것이다. 레비는 예술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가진 예술적 결과들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셈프룬은 그렇게 했다. <기나긴 여행>에서 유개 화차를 타고 이송되는 현재동안 제라르는 스뮈르 촌놈이라는 별명을 가진 익명의 동료에게 그의 기억을 전한다. 왜 이러한 대화의 상대가 필요할까? 그는 어떤 기능을 갖고 있을까? 제라르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이 동료가 수용소에 도착하면 죽으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그는 분명히 우리 말의 수신자인 큰 타자의 점차 줄어드는 현존을 나타낸다. 강제 수용소에 큰 타자는 없으며, 우리의 증언을 듣고 증명해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만한 사람도 없다. 바로 이것이 심지어는 우리의 생존마저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69-70)

오늘 접한 이 글이 아니더라도 30년 가까운 나의 교직 경험을 돌아봐도 '들어준다는 것!" 그 이상의 답은 없을 것 같다. 진심을 다해 경청하는 그 순간이 아이의 내부에 자리한 큰 타자가 뒤바뀌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겠지만 말이다. 큰 타자의 협조를 받되, 소박하게나마 자기 자신이 생각(삶)의 주체가 되는 자리로까지 말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교사(부모)의 다정하고 무한한 긍정의 눈빛이 아닐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