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왕국과 영광-4 조르조 아감벤 2021.10.31. 바다사자

 

왕국과 통치

4.1

성배전설에서 불구의 왕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떨어져 나와 있다. ‘절름발이 왕에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근대의 주권자라는 예표가 들어 있다(169).

 

4.2

(삼위일체 교의 신학은 근본에서 운영 또는 경영을 내포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정치뿐만 아니라 오이코노미아를 필연적으로 함의한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의 통치-그의 힘-는 그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173).

주권자가 자기 왕국을 지키는 수단인 행정 장치는 신의 세계 통치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의 힘과 그의 통치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다. 신의 세계 통치에 관한 유대적·스토아학파적 관념과 섭리적 오이코노미아라는 그리스(173)도교적 관념은 완벽히 상응한다(174).

 

4.3

정치신학도, 오이코노미아 신학도 순전히 유대교적 유산으로서 그리스도교에서 축출된다(178).

 

4.4.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의 수호자로서 대통령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권위적 국가 원수라고 단언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으로 히틀러 수상의 인격 속에 통치만이 아니라 지도라는 새로운 정치권력의 형상이 존재하는데, 가톨릭교회의 사목에서 근대적 통치 개념의 패러다임을 보인다(179).

슈미트의 국가사회주의의 새로운 질료적 구성이 국가’, ‘운동’, ‘인민’, 3자의 맞물림이다. 사목과 통치의 기능이 당과 총통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도라는 개념은 사목적 패러다임의 세속화로 곧 초월적 성격이 제거된 것으로 나타난다. 통치 모델에서 지도를 소거하기 위한 방법은 인종 개념에 헌법상 지위를 부여하는 것뿐이었다. 그럼으로써 인민은 정치화된다(181). 이런 식으로 통치적·오이코노미아적 패러다임은 정치영역으로 되돌아오며, ‘통치 행위총통의 지상대권의 수단일 뿐인단일한 활동으로 환원된다(182).

 

4.5.

하느님의 왕궁은 좋은 것이고 통치는 항상 나쁜 것이라는 영지주의적인 정치적 발상은 무엇보(183)다 세상과 무관한 무의적 신과 세상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세상을 통치하는 신을 구별한다. 왕국과 통치의 대립은 근대 정치에 남아 있는 영지주의적 유산의 일부이다.

그리스도교적 오이코노미아는 신성 내부에 영지주의적 대립을 삽입함으로써 세상사와 무관한 신과 통치하는 신을 양립시킨다는 점에서 마르키온주의를 극복하려는 하나(186)의 시도로도 볼 수 있다(187).

 

4.6.

이성적 피조물인 자유인은 단일한 원리와 의식적인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않는 반면 노예나 가축은 본성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성은 공통의 목표에 맞게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단일한 질서의 반영을 담고 있다. 초월적 원리로서의 부동의 동자와 본성으로서의 내재적 질서가 양극을 지닌 단일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 본성은 다양하고 서로 다를지라도 집-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원리로 통치된다는 의미이다. 권력은 인간의 권력이든 신의 권력이든 모두 이 양극을 함께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왕국인 동시에 통치여야 하고 초월적 규범인 동시에 내재적 질서여야 한다(191).

 

4.7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질서는 내재적 상호 관계라는 관념을 구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질서는 관계이지 실체가 아니다(192). ‘분리된 존재존재로서의 존재라는 형이상학의 대상, 부동의 동자는 천구들과 별개로 분리되어 있음에도 그것들을 움직인다. 이 지점에서 질서 개념이 도입된다. 질서는 형이상학의 두 대상 사이의 관계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이론적 장치로 초월성, 내재성 및 그것들의 상호 조화는(193)형이상학의 대상의 분열에 대응해 존재의 두 형상을 함께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질서가 분리된 실체가 세상 속에 존재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되어버리는 아포리아가 생겨난다. 존재론의 특권적인 장소가 실체의 범주에서 관계의 범주로, 특권적인 실천적 관계의 범주로 치환된다. 좋음의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관계 문제는 존재론과 실천 사이의, 신의 존재와 신의 행동 사이의 관계 문제가 된다. ‘질서는 분리된 실체와 존재의 맞물림, 신과 세계의 맞물림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질서는 그것들의 아포리아적인 관계에 붙여진 이름이다(194).

 

4.8

아퀴나스 사상에서 질서는 피조물과 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피조물끼리의 관계를 표현한다(197). 모든 피조물은 집안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특수한 본성을 통해 하느님과 관계한다(199). 초월적 질서의 유일한 내용은 내재적 질서지만 내재적 질서의 의미는 초월적 목적과의 관계에 불과하다. “목적에 대한 질서서로에 대한 질서는 서로서로 회부되고 서로서로 정초한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이 순환으로서, 이러한 순환 속에서 두 개의 질서는 끊임없이 서로(200)에게 침투한다.

분리된 실체라는 패러다임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영지주의와, 세상과 무관한 신을 마주하게 되며, 내재성의 패러다임을 끝까지 따라가면 다신론이 된다. 질서라는 관념은 이 양 극단 사이에서 어려운 균형을 사유하려는 시도인데 그리스도교 신학은 항상 이 균형을 잃어버리는 과정에 있다(201).

질서는 비어 있는 개념이다. 정확히 개념이 아니라 표기이다(201). 질서가 표기 역할을 하는 개념들은 존재론적인 개념들이다. ‘질서라는 표기는 존재론의 특권화된 장소를 실체의 범주에서 관계와 실천의 범주로 옮겨놓는 치환을 야기한다. ‘질서라는 표기 덕분에 실체와 관계, 존재론과 실천이 하나의 성좌로 들어간다. 이 성좌는 중세 신학이 현대 철학에게 남겨준 유산을 표상한다(202).

 

4.9

하느님이 질서인 것은 하느님이 단지 창조된 세계를 배치해 질서를 부여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그러한 배치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발출되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다는 것을 원형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와 세계 통치는 서로 정확하게 대응한다(208).

마르크스는 1844경제학·철학 초고이후 인간 존재를 실천으로, 실천을 자기생산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피조물들의 존재를 하느님의 작품으로 보는 신학적 이념을 세속화하고 있던 셈이다. 존재를 실천으로 파악한 후 신을 제거하고 인간이 그를 대신하면 인간의 본질이란 인간이 자신을 끊임없이 생산하는 실천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209).

 

4.10.

왕국과 통치 사이의 구별이라는 신학적 패러다임은 하느님의 행위를 창조보존으로 이중 분절화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은 창조로 인해 단순히 피조물들의 생성 원인일 뿐만 아니라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1원인의 두 가지 작용은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피조물들은 존재의 자기 보존을 위해 하느님에 의한 통치를 필요로 하게 된다(210).

 

4.11

원인론이라는 중세의 논고는 에서 제1원인과 제2원인을 구별하는 것을 통해 초월성과 내재성, 일반성과 개별성 사이의 분절화를, 즉 하느님의 세계 통치 기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분절화를 발견했다(221).

 

4.12

왕국과 통치 사이의 구별이 사법 영역에서 최초로 전문적으로 정식화된 것은 1213세기에 교회 법학자들이 무용한 왕이라는 정치적 유형을 정교화한 논의들에서였다. 이 논의의 토대는 세속적 주권자를 폐위할 수 있는 교황의 권력에 관한 교설이었다(221). 군주나 고위 성직자의 인격과 뗄 수 없는 존엄측근이나 관리자에 위탁되는 운용과 분리될 때야말로 폐위시켜야 마땅하다. 주권적 권력이 깊은 곳에서 두 가지로 분리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현실적 교설도 포함하고 있다(222).

무용한 왕이라는 극단적 사례는 서양의 통치 기계를 규정하는 이중 구조를 드러내고 있다. 주권적 권력은 두 가지 상이한 수준, 측면, 극성에 따라 구성상 분절화되어 있다. 주권적 권력은 존엄인 동시에 운영이며, 왕국인 동시에 통치이다. 존엄이 자신의 무용함과 무효함의 가능성에 따른다는 의미에서 구성상 절름발이이다. 왕국이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무한히 빼버리는 전체(223)로 정립되는 나머지인 것이다.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에서 초월성과 내재성, ‘신에 대한 질서서로에 대한 질서가 부단히 구별되는 동시에 섭리적 행동이 양자를 다시 연결 짓듯이 왕국과 통치도 끊임없는 분리와 분절화의 장을 구성한다(224).

 

4.13

교황의 영적 권력이 주권자의 세속적 권력보다 상위에 있다(에지디우스 노마누스의 교회권력론에서 교리로 체계화된다)는 이론에서 권력의 충일은 로마 교황에게 있다. 루가 복음서의 영적 권력[교권]과 물질적 권력[속권]으로 상징된 두 자루의 칼에서 권력이 분절화되어 있음에 모두가 인정한다(225). 이원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영적인 것의 탁월함과 탁월한 완성자체에 있다. 영적인 것들은 너무나 고귀하므로 영적인 것들에 대해 부족함과 소홀히 함이 있을 가능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2의 권력 제정이 필요했다. 2 권력이 개별적으로 신체적인 것들을 관리한다면 영적 권력은 영적인 것들에 전적으로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227). 동시에 두 권력은 긴밀하게 분절화되는 것의 토대이기도 하다. 두 자루의 칼은 분명히 분할되어 있음에도 물질적 칼이 첫 번째 칼에 포함되어 있다(228). 영적 권력은 제2원인들의 보조 없이 결과를 창출할 수 있으나 물질적 칼로부터 자신을 분할해야만 한다. 영적 권력은 완전하지만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 실행의 실효성이 그것이다(229). 통치 기계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 한다(230).

 

4.13

권력과 권력의 행사 사이의 분리라는 신학적 모델은 하느님에게서의 절대적 잠재력과 질서 있는 잠재력 사이의 구별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 지혜에 관해서 하느님은 자신이 하기로 결정한 것만 할 수 있다. 의지는 잠재력을 절대적 잠재력과 질서 있는 잠재력으로 분리해 하느님의 전지전능함 자체를 부정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전지전능함의 수용 불가능한 결과를 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를 구성한다(234). 이것은 신에게서 절대적 잠재력과 그것의 실제적 행사, 형식적 주권과 그것의 실행을 구별하는 것과 같다. 절대적 잠재력을 한정함으로써 질서 있는 잠재력(235)은 절대적 잠재력을 하느님의 세계 통치의 토대로 만든다. 이는 주권과 주권의 행사 사이의 분리라는 법적·정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여기서도 하느님이 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교설은 힘과 그것의 행사, 왕국과 통치 사이의 구별의 패러다임이 된다.

죄를 짓지 않는 이성적 피조물을 창조하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섭리에 의한 세계 통치가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창조하게 되면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을(236), 은총을 쓸모없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가 확실히 통치되기 위해 하느님은 무능해야만 한다(237).

 

경계영역

분리의 신학적 모델은 하느님의 무능이라는 절대적 잠재력질서 있는 잠재력이라는 구별 속에 존재한다(238).

14세기 초 요하네스 22세가 둘은 같은 것이며 명목적 구별일 뿐으로 본 반면 오컴의 윌리엄은(239) 왕국(절대적 잠재력)은 항상 통치(질서 있는 잠재력)를 초과해 모종의 방식을 선행한다고 보았다. 통치가 왕국에 도달해 규정하는 것은 오직 실행될 때뿐이라는 것으로(241) 오이코노미아-섭리라는 패러다임에 가까운 것으로, 각자의 동일성을 유지하며 통치 행위의 우연성은 주권적 결정의 자유에 대응한다. 보다 민주주의적인 이 패러다임은 절대적 잠재력이라는 교설은 예외적 권력의 모델로 만든 입장에 접근한다. 구성된 권력을 구조적으로 초과하는 절대적 권력[절대적 잠재력)이란 법을 넘어 그리고 법에 반해합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242).

왕국과 영광-4(조르조 아감벤 21.10.31).hwp
0.19MB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