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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의 궤적을 조명하다

BY 홍원표 2022. 11.27.. 저녁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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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인가

 

계몽주의와 유대인 문제에서 아렌트는 앞의 첫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근대 유대인 문제는 계몽주의에서 시작된다.

계몽주의, 즉 비유대인 세계는 유대인 문제를 제기한다.

내 생각에 두 가지 형태의 반유대주의 국가가 있는 것 같다

유대인 문제가 진짜 존재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를 간명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간단히 정의하면 유대인 문제는 곧 민족 문제이다.

민족 문제는 나라 없는 민족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헤르출은 유대인 국가에서 우리는 꺼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디로 아니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 수 있는가

 

아렌트는 이후 유대인 문제를 한민족의 조국 상실로 간단 정의한다.

동화된 유대인들은 유대교와 거리를 두고,

즉 유대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유대인으로 남고자 했다.

이들에게 유대인 문제는 동화 문제와 연계된다.

 

이 경우 유대인 문제는 개별 유대인이 직면한 하나의 문제였다.

이들에게 유대인 문제는 사회적 인정 차원의 문제였다.

 

헤르츨 이후 유대인들은 유대인 문제를 사회적 인정 문제가 아닌 정치 문제로서 이해했다.

 

아렌트는 1930년대 초반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유대인 문제가 정치 문제라는 점을 인식했고 그 정치적 해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해제에서는 유대인 문제가 정치 문제라는 아렌트의 입장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를 조명하면서 정치 문제가 곧 특정 집단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공동 문제라는 점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유대인 문제라는 특정한 질문에서 왜 정치인가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전환하고자 한다.

 

2 아렌트 숲 속의 특별한 나무

 

유대인성이라는 것은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렌트는 유대인 정치의 핵심 쟁점이 유대인 군대 창설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 군대 창설은 정치 행위로서 새로운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재건에 수록된 논단 기사는 아렌트 평생의 저작을 특징 짓는 정치이론, 즉 정치 행위론의 공개적인 시작이다.

자유로운 정치적 실존의 이상을 추구했다.

소수 민족 문제 이 논문은 유대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기본 시각뿐만 아니라 정치에 대한 기본 입장을 담고 있다.

그는 여기에서 소수 민족의 비정치화와 정치의 실패 새로운 정치 현상인 무국적자의 발생 그리고 유럽 연방 정치와 연대의 필요성을 밝혔다.

 

제롬 콘, 머릿말에서 유대인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을 다섯 국면으로 제시했다.

1국면 독일계 유대인의 관심

2국면 사회적 동화에 대한 정치적 자각

3국면 유대 민족의 의미

4국면 민족과 국민의 차이에 대한 이해

5 국면 유대 민족의 거부에 대한 경험이다.

 

반면에 펠드만은 아렌트의 유대인 역사 개념과 정치 이론 사이에 근본적 연결 고리가 있다고 전제한다.

 

서론에서 의식적인 파리아의 삶,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사적 관계에 나타난 유대인의 무세계성, 헤르츨과 라자르의 정치적 시온주의, 시온주의 분파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이 제기되었다

 

유대인 여성의 삶과 정치적 시온주의 문제를 연계시키면서 아렌트의 대단히 독창적인 정치 철학사를 조명한다.

번스타인은 한나 아렌트와 유대인 문제에서 환원주의적 해석을 경계한다. 유대인 문제라는 큰 나무가 있다.

숲 전체를 관통하는 길을 정치적 사유의 길이라고 하자

3-정치적 사유의 의미를 먼저 밝힌다

4- 반유대주의와 시온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조명한다.

19세기 유럽의 전형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즉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시온주의 운동의 원조가 되듯이 민족 문제는 근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쟁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유대인과 비유대인 관계 유대 민족에 대한 유대인의 자기 의식은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의 중심에 있다.

정치적 사유에서 존재론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정치 행위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5- 정치 공간을 상실한 민족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실천할 기회를 잃는다

유대인 문제에는 유대인 역사와 연계되어 있는 문구들, 즉 국가 없는 민족 국민 안의 국민 땅 없는 민족 없는 땅 등이 자주 언급된다.

유대인 문제에서 영토와 정치 조직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6-정치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 여러 민족이 함께 활동하는 공간 또는 제도에 대한 아렌트 특유의 해답을 살펴볼 것이다.

7-인간다움에 대한 정치적 사유를 언급한다.

모든 공간이 공유하는 이성은 인간성에 기초이다

 

아렌트는 인류를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구분하는 것에 맞서서

인류라는 칸트의 규제적 개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권리를 가질 권리라는 인간 개념을 새롭게 제시했다.

 

 

3 정치적 사유문제; 이야기하기와 개념적 사유

 

유대인 문제는 유대인 또는 유대 민족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정치적 요소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치 문제는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반유대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한 이후 유대인 문제는 정치 문제가 되었고 유대인 문제에 대한 아렌트의 관심은 정치 문제와 직결된다.

아렌트의 저작에서 A정치적 사유 B개념적 사유 C이야기하기는 상호 연계되어 있다.

 

A 아렌트 저작을 이어주는 외올실은 바로 정치적 사유이다.

유대인 난민으로서 아렌트의 경험은 그에게 근본적 경험을 제공했다.

그는 정치적 판단의 기준으로서 세계성을 이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정치적 사유와 행위는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B 정치적 사유의 한 유형인 개념적 사유는 다양한 사물 또는 사태의 유형이나 연계성을 확인하고 주요 쟁점들을 설명함으로써 상황이나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추상화 또는 일반화를 지향한다.

아렌트의 개념적 사유는 노동 작업 행위 구분, 사적 영역 사회 영역 공공 영역 구분, 사유 의지 판단 구분에 잘 드러난다

 

유대인 문제에서 사회적 정치적 반유대주의,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유대인 벼락 출세자 파리아로서 유대인, 그리고 국민 (민족) 폭민의 구별이 적절한 예 이다.

라자르의 반유대주의 역사와 기원 에서 반유대교와 반 유대주의를 연대기적으로 조명하면서 제 10장에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기독교 사회주의 경제적 인종적 민족적 형이상학적 혁명적 반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 세분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를 단순화해서 사회적 정치적 반유대주의로 구분한다.

 

헤르츨과 라자르는 반유대주의의 심화 특히 드레프스 사건의 직면해 동화된 유대인의 입장을 포기하고 시온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특한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시온주의의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

 

악의 평범성은 아렌트의 개념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결실 가운데 하나로서 이야기하기를 통해 정치적 실재를 확연히 드러낸다

 

C 이제 아렌트의 이야기하기 가 지니는 의미와 구체적 대상을 살펴본다

개인의 사사로운 삶 자체는 불명료하고 희미한 실존 상태에 있지만 대중에게 공개될 때 비로소 공적 실존의 형태를 드러낼 수 있다.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의 변화, 즉 전환 또는 전위에는 일종의 행위가 요구된다.

이러한 전환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야기하기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에 예술적 전위에서 발생한다.

이야기하기의 정치는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구체화하는 방법과 연계된다.

 

 

이야기하기는... 개별적 인간의 삶이나 사건들의 보편적 의미를 조명할 수 있는, 즉 언저리 현상을 중심으로 끌어들이는 장점을 지녔다

 

아렌트 저작들은 대부분 이야기하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에서 이론을 통해 역사적 객관성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현상을 충실하게 기술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역사적 탐구에 필연적으로 포함된 개인적 체험은 거의 모든 현대 역사의 해석이 지향하는 비판적 접근의 결과이다.

유대인 문제는 주로 현대 정치를 냉혹하게 비판함으로써 권력 정치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유대인 유대 민족 유대인 역사를 비판적으로 접근했다.

 

이야기하기와 비판은 상호 연계된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해 이야기하기의 중요 요소인 거리감을 유지했다.

아렌트는 유대인 정치가 권력정치의 관습에서 벗어나 정상화를 지향하기를 바랐다

 

1940년대 논문 파리아로서 유대인 숨겨진 전통은 정치 없는 민족인 유대인의 삶에서 이방인 세계에 맞서 어떻게 투쟁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는가를 이야기 방식으로 밝히고 있다.

라자르는 피억압자를 위해 자유를 얻고자 투쟁하는 의식적인 파리아로서 유대인 문제를 정치 영역에서 공개적으로 끌어들여 유대인을 정치화하려고 했다.

 

아렌트는 이들의 개별적 특수한 삶을 통해 파리야의 삶에 일반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세계에 맞서 투쟁한 의식적인 파리아의 현대적 전형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재판 참관기로서 보도하기라는 이야기하기 형식을 취하고 있는 대표적 저작이다.

 

이야기하기의 일부로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보고하기)는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있으며 정치적인 것이 파멸되는 과정과 결과를 드러내고 있다. 긴 분량의 일부 논문과 짧은 단편 들로 구성되어 지면상의 불균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우리는 이 단편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독자들은 단편을 읽으면서 정치적 사유 연습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4. 민족문제; 반유대주의 대 동화와 시온주의

 

민족 문제는 반유대주의 유대인 정치 팔레스타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된다.

계몽주의와 유대인 문제는 지성사의 관점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유대 지식인들의 입장을 조명하고 있다.

유대인의 동화와 민족의 정체성 문제가 핵심 주제이다.

유대인 문제는 결코 유럽 정치에 이질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유럽에서 미 해결된 민족 문제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문제는 또한 유럽 민족의 문제이다. 라는 주장 아렌트는 유대 민족의 근대 역사를 기술하면서 유대 민족을 국가 안에 국가 안 국민 안에 국민 땅 없는 민족 민족 없는 땅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이러한 문구는 유럽 민족과 국가들 사이에서 이산 상태(디아스포라) 로 산재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위상을 잘 드러낸다

유럽의 재앙은 유럽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전체 주위에 의한 유럽 국민의 정복 또는 유럽 문명과 전통의 붕괴이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600만 명의 학살이다.

 

이렇듯 유럽 역사에서 항상 주변적 위치를 차지했던 유대인 문제는 유럽 문제가 되었다.

반유대주의는 결국 전 유럽 세계에 파괴적인 소동의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 유대인들은 어디서든 국가 안의 한 국가를 형성하는 특권을 인정받았다. 국민 안의 한국민을 형성하는 이러한 외국인 매점자에 대한 점증적인 분노는 대중적인 소란으로 이어졌다)

 

 

반유대주의의 역사적 과정은 유대 민족과 비유대인 특히 유럽 민족 사이의 갈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관한 논의가 유대인 문제에서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한다.

 

시온주의 운동은 드레퓌스 재판을 참관한 헤르츨과 라자르의 활동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해 유대인이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자신들을 세계적 사건의 중심에 세웠던 적대감을 심각하게 고려한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유대인이 반유대주의로 야기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동화와 시온주의로 구체화된다.

 

반유대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동화주의와 시온주의 모두의 선조였다.

근대 유대인 역사에서 반유대주의와 동화는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

동화는 역사적 사실이었지만 이후 방어적 투쟁의 맥락에서만 이데올로기가 된다.

동화는 유대인이 역사상의 유럽 세계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유럽 유대인 다수는 동화를 통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아렌트는 동화의 최초 범례인 라엘의 삶을 통해서 유대인성이란 것은 주어진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렌트는 파리아로서 유대인에서 해방이 보장한 자유가 얼마나 모호하고 동화가 드러내는 평등의 약속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이야기한다.

 

유대인성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항상 유대인으로 남아 있다는 역설은 유대인 난민의 역설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니 유대인은 어는 곳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는 민족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유대인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난민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기독교 사회에서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유대인에 대한 반발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유대인은 동화되었지만 유대 기독교인은 동화된 유대인이 인정적으로 문화적으로 유대인이라고 인식했다.

안정의 황금 시대인 1880년대 독일에서 첫 번째 반유대주의 정당이 등장했다.

 

반유대주의로 제기된 유대인 문제의 또 다른 정치적 대응은 시온주의 운동이다.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의 선조였다.

아렌트는 특정한 시온주의 분파에 속하지 않은 채 의식적인 파리아로서의 입장을 지녔다

 

아렌트는 시온주의의 등장 이후 1960년대까지 시온주의 역사 특히 시온주의자들의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헝가리 태생의 헤르츨과 프랑스 유대인 라자르 이들은 자신들을 정치적 시온주의자라고 부르면서 동화를 통한 유대인 문제 해결을 자멸이라고 생각했다.

반유대주의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정치적 수단으로 해결되어야 할 정치 현상이다.

 

동화주의는 유대민족의 자멸을, 시온주의는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두 이데올로기는 똑같이 쟁점을 회피하며 이데올로기를 발전시켰다

아렌트는 이러한 이유로 정치적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도 비판했다.

아렌트와 유대인 다수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 갈등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1940년대 아렌트가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과 결별한 것은 사회적 쟁점과 정치적 쟁점을 혼동한 것에 대한 그의 비판과 유사했다.

 

*시온주의 1세대

 

아렌트는 유대 국가의 우세한 개념에서 사회적 사유, 즉 정치 영역 내에서 인종에 기반을 둔 사유의 불길한 승리를 확인했다.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인 헤르츨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보면 헤르츨은 근대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성격을 오해했다.

그래서 헤르츨은 초월적이고 항구적인 반유대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해결책을 찾았다.

 

반유대주의라는 호랑이에 올라타서 호랑이의 강제력을 활용하기를 바랐다

 

결국 유대 국가의 설립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여전히 반유대주의를 야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수정주의는 헤르츨식의 시온주의 성향을 지녔으며 민족의 고향을 수용하기보다 국민국가를 강조했다.

라자르는 피억압 민족이 민족 해방과 사회 해방을 성취하기 위한 자유 투쟁을 전제하면서 유대인 문제를 정치 영역으로 공개적으로 끌어들였다.

 

(: 19세기 산업화와 근대화에서 급격하게 성공한 유대인들은 사회 변동의 중요한 측면과 연계된 정치적 사건의 책임을 맡지 않고 있었다.)

 

파리아가 정치 영역에 참여하고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 지위로 전환하는 순간 그는 필히 저항자가 된다.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의무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파리아의 대변자로서 공개적으로 출현해야 한다는 것은 라자르의 이념이다.

 

 

 

 

*시온주의 2세대

 

중도파 시온주의자는 중도파 시온주의자인 바이츠만은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 냈다

정치 행위에 대한 실천적 개척 작업의 우위성을 원칙으로 강조했고 이스라엘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 건설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우리의 해답이라는 바이츠만의 공식 입장에서 비정치적 태도를 발견했다.

 

유대인의 정신적 발전을 촉진시키지만 인종적 동질성과 국민 주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대인 문화 중심지를 팔레스타인에서 찾았다.

그 결실이 바로 히브리 대학교이다.

실천적 시온주의 예컨대 유대인 이민운동을 강조했다.

일반 시온주의는 이를 계승했다.

 

마그네스는 히브리 대학교를 아랍인과 유대인 협력의 유일한 장소라고 믿었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한때 이중 민족 국가를 주장했고 아랍 이스라엘 전쟁 당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 사이에 연방을 제안했다.

 

아렌트는 마그네스의 정치적 해결책을 지지했다.

 

보트스타인은 아렌트가 연방과 연계되어 있는 유럽 민족의 조국을 추구하는 마그넷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온주의를 계몽주의 시온주의라고 규정한다.

 

*시온주의 3세대

 

시온주의 3 세대는 사회적 사회주의적 시온주의와 연계된다.

할루츠 운동과 키부츠 운동이 이들의 사회적 이상이었다.

 

이들은 유대인 정치나 팔레스타인 정치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고 사실 종종 그것을 싫어했으며 자기 민족의 운명을 의식하지 않았다.

 

아렌트는 시온주의 운동의 소수파가 다수파로 바뀌면서 시온주의 운동을 이끌어 가자 시온주의 운동 특히 수정주의 과격 단체에 대해 지극히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야보틴스키가 창설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는 헤르츨의 전통을 계승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신생 이스라엘 국가에서 등장한 자유당은 조직 방법 정치 철학 사회적 호소에서 나치당과 파시스트당과 아주 흡사한 정당이라고 규정했다.

 

아렌트는 이를 시온주의의 위기와 연계시켰다

팔레스타인의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 문제는 이중 민족 국가이든 집단 정착촌이든 아랍인과의 관계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생존을 보장하는 정치 공동체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정치 행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5. 행위자와 정치 행위 문제; 배제와 공존 사이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각 분파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서 민족의 생존과 정체성 복구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으나 이를 실현하는 노선과 방법에 있어서 심각한 차이를 드러냈다

 

정치적 시온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자기 동족으로부터 수많은 비판과 도전을 야기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폴리스가 정치와 연계되듯이 민족의 생존, 즉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공동체는 정치 행위와 연계된다.

(: 폴리스 도시 국가는 다양한 형태의 현상 공간을 지칭하는 은유로 사용된다. 폴리스와 유사한 것으로 아고라 피닉스 포럼 레스 푸브리카 평의회 공공 영역 등을 둘 수 있다.)

 

아렌트는 정치 없는 민족이라는 우울한 비극에 대응해서 유대민족은 디아스포라 2000년 동안 직접적인 정치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조건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2차례 가졌다고 밝혔다.

첫 번째 시도는 1600년대 샤베타이 채비 운동이었다.

두 번째 시도는 시온주의 운동이었다.

시온주의 정치를 둘러싼 아렌트와 시온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아렌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시온주의는 자신들의 여행 가방에 이데올로기 세계관 역사의 열쇠를 담은 19세기 정치 운동이다.

 

자신과 화합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 새로운 세계 상황과 투쟁하기 위해 이 과거의 사회적 상황을 이용한다.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현실과의 관련성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렌트는 동화주의자든 시온주의자든 이들이 실제 역사에서 가상적인 인류 역사로 도피함으로써 탁월한 생존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아렌트는 정치란 공개적인 말과 행위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 다원성이라는 사실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조직화할 가능성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했다.

 

이데올로기 정치는 정치의 완벽한 요소를 발현시키지 못해 결국 비극적 갈등을 확산시킬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동화주의자들의 자멸과 시온주의자들의 민족의 생존은 대비되는 것 같으면서도

동화주의의 환상인 통합된 민족 시온주의의 환상인 통합된 실체는 모두 유대인 정치의 목표이다.

 

아렌트는 반위대주의에서 유대인 정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다.

유대인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유대인 다운 실체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정상화이다.

즉 그것은 다른 모든 민족과 같이 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아렌트는 소수 민족 문제에서는 법적인 기반 위에 현대의 소수 민족 권리를 확립하려면 정치를 통해서만 그 상황을 변경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탄생성 시작 행위 와 자유를 강조하지만 유대인 문제에서는 자유와 정의를 일관되게 강조한다.

 

정치적 악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것은 곧 정의이다.

유대 민족의 대안적 상을 제시한다.

네 가지 유형은 술레밀과 꿈의 주인 (하이넬), 의식적인 파리아 (라자르), 혐의자 (채플린) ,선의지를 가진 사람 (카프카)이다.

 

파리아의 특성은 유대인의 마음 인간성 유머 초연한 지성이고

벼락 출세자의 특성은 재치 없음 정치적 우매함 열등 의식 악착 같은 돈 모으기이다.

 

아렌트는 벼락 출세자의 순응주의적 행태와 파리아의 저항 행위의 차이를 제기했다.

아렌트의 경우 행태는 반복적이고 정형화된 활동이며 행위는 새로운 시작이다.

아렌트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항 정치를 강조했던 라자르의 입장을 지지했다.

까뮈의 경우와 같이 아렌트의 경우에도 정치는 저항정치였다.

 

억압에 대한 저항은 모든 인간의 의무이며 구성원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

아렌트는 시온주의 정치에서 한편, 서유럽 유대인의 도덕적 귀족인 지도부 금권 정치가 자선과 다른 한편, 일반인 또는 보통 유대인을 대비시킨다.

아렌트는 유대인 정치에서 품성이 아닌 간교함, 원리가 아닌 기회주의, 정책이 아닌 선전에 경도된 사고방식에서 생긴 정치, 즉 현실 정치를 비판하고 민주적인 정신 상태를 강조한다.

 

이렇듯 아렌트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에서 벗어나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 공적 행위에 참여할 것을 유대 민족 전체에 촉구한다.

 

헤르츨은 정치가 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라자르는 대중의 역할을 강조하고 자기 민족 사이에서 혁명가가 되기를 원했다.

 

일반 시민이 모든 식민지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보다 더 훌륭하게 유대 민족 문제를 잘 이해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이 인용문에서 정치 행위자로서 일반 시민의 역할뿐만 아니라 아렌트의 평의회 정치에 대한 기본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유대인 문제를 통해 유대 종교 민족성 정체성, 즉 문화보다 오히려 유대인 정치를 정의하려는 아렌트의 욕구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전적으로 구분하려는 그의 깊은 애착의 실존적 증거를 근거를 드러낸다

 

아렌트는 정치 투쟁이 유대 민족에게는 정치적 삶의 시작이기를 바랐다

유대인 군대 창설은 실패로 끝났다

아렌트는 전통의 붕괴로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심연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난관없는 사유를 강조했다.

아렌트는 민족이 생존에 의존할 지지대가 없는 상황에서 난간을 마련하려는 새로운 모험과 도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아렌트는 재건의 논단을 통해 1년에 걸쳐 유대인 군대 창설과 그 정치적 의미를 집요하게 제안했다.

아렌트는 19425월 미국 시온주의 의회에서 제기한 이른바유대인 군대라는 표현을 논단 기사의 제목으로 게재했다.

아렌트는 이 기사에서 유대인 지도자의 이른바라는 발언이 행위자가 아닌 제삼자 관찰자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즉 행위자의 적극적인 의지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헤르츨의 위대성은.... 정치적 관점에서 행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의지에 있지만 헤르츨은 선동적 정치인들과 함께 대중을 멸시했다.

 

오히려 헤르츨은 유대인 사회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계급인 지식인의 대변자 역할을 했고 목적을 이루고자 반유대주의적 정치인들과 협상을 했다.

 

아렌트는 헤르츨이 제국주의식의 정치를 답습했다고 비판했다.

헤르츨은 정치를 국민국가라는 고정된 틀에서만 이해했지 계급구조의 차이 정당이나 운동의 차이 다양한 국가나 역사의 다양한 시기 차이 시기 사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민족 없는 나라로 도피하는 것이 해르츨 정치의 핵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는 여러 민족의 화해를 향한 길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한 투쟁이 정치에 핵심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는 여론 정치가 아닌 의견의 정치를 강조함으로써 인간 조건의 하나인 다원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정치를 지향했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존과 화해를 고려하는 정치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시온주의 운동에서 최종적으로 주도권을 장악한 수정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실제로 겪었던 것을 아랍인에게 적용시켰다

유럽 유대인의 자유와 평등이 근본적으로 부정됐듯이 아랍인은 똑같은 상황에 직면하게 될 운명에 놓였다.

유대 국가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수립되었다.

처음부터 헤르츨의 시온주의의 내적 논리 가운데 일부는 아랍인에 대한 폭력과 테러였다.

 

아렌트는 헤르츨의 정치적 시온주의를 비판했다.

아렌트의 경우 시온주의에 전도된 반유대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단 한 가지 위험으로 가득하다,

즉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파도에 불가피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유대인 조국을 구원하는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로, 유대 국가의 사이비 주권에 희생되지 않도록 유대인 조국을 건설하고

둘째로, 아랍인 유대인 협력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며

셋째로, 팔레스타인 이민을 촉진하고

넷째로, 팔레스타인이 정치적 해방에 이를 수 있는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로 지역 자치 정부와 병의회를 수립하는 것이다.

 

 

6. 팔레스타인 영유권과 정치 조직 문제; 연방과 평의회

 

사람들은 반유대주의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라는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영토 정도를 방어하자고 요청한다.

그러나 달은 우리가 여전히 반유대주의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디아스포라로 영토를 잃은 민족이 국민 국가로 구성된 세계 질서 속에서 민족 없는 영토를 찾아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찾는 것은 어렵다

헤르츨과 그의 이념을 수용하는 시온주의 자들에게 유대인 문제는 영토 문제였다.

반면에 라자르의 경우 1차적인 문제는 반유대주의 적에 대항하는 것이고. 영토 문제는 2차적인 것이었다.

 

제국주의 정치의 산물인 팔레스타인 영유권 문제는 시온주의 정치의 가장 중대한 쟁점들 가운데 하나였다.

 

1917112일 영국 외무장관 벨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의 수립을 동의한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국제적 규모의 유대인 정치를 결정화하는 지점들 가운데 하나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국가 기관의 핵심 정착 지역도 형성할 수 있다.

 

아렌트는 당시 유럽 유대인들과 달리 유대인 조국 팔레스타인과 디아스포라의 공존을 인정한다.

 

유럽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은 정착하기 위한 유일한 지역이고 다른 디아스포라 국가에 살고 있는 유대 민족 예컨대 미국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조국이라고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이 주장에는 이중 민족 국가의 틀에서 유대 민족의 조국과 정치적 연방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다.

 

아렌트는 민족과 폭민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경계하며 한편, 이성의 언어를 연대와 책임의 정치와 연계시키고 다른 한편, 폭민의 언어를 배제 및 선동 정치와 연계시켰다

 

아랍 팔레스타인 영토의 분할과 유럽 국가의 건설은 불가피하게 팔레스타인 문제를 야기했다.

아랍인 유대인 갈등의 기원은 이러한 선택에 있다.

유대인 문제의 해결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야기했고 아랍 세계에서 다시 유대인 문제를 야기했다.

아렌트는 재건의 논단에서 팔레스타인의 식민화와 영토화를 둘러싼 시온주의 분파 사이의 의견 차이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극단적 대립을 목격했다.

 

아렌트는 이 기사들을 통해 공통적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 유대인 정치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정치 행위를 강조했다.

 

즉 집단 수용소 또는 물리적 강제력이 충돌하는 전투 공간에서 전개되는 자유 투쟁 자유롭고 민주적인 토론이 가능한 공공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행위를 부각시켰다

 

이러한 지하 운동은 유대인의 문제에 직접적인 해결로 연결되지 않지만 이곳은 유럽의 다른 민족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유대민족의 입장에서 수행하는 의식적인 정치 행위의 과제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한 유대인 테러 단체는 전체주의 사고방식과 전략에 기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아렌트는 이 단체의 테러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세계 시온주의 기구는 시온주의를 촉진하는 조직이다.

유대인 협회는 1929년 시온주의 기구에 집행부로 설립되었다.

 

시온주의 의회는 시온주의 기구의 최고 기관으로 입법권을 가지고 있고 세계 시온주의 의회로 변경됐다.

 

아렌트는 1933년 여름 프라하에 모이기로 예정된 제 18차 시온주의 의회에서 제기하려고 했던 주장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아렌트는 1942년 뉴욕에서 개최된 특별 시온주의 대회의 결정에 주목했다. 이 대회에는 세계 시온주의 기구 회장인 다 있지만 유대인 협회 회장인 벤구리온 미국 시온주의 단체 집행부 임원인 골드만이 참여했다.

 

여기서 채택한 빌트모어 강령은 아랍인 유대인 화해와 유대인 군대 창설에 종말을 알렸다

1944년 에틀렌틱 시티에서 개최된 미국 시온주의 기구의 전국 대회에서 분할하지 않고 축소하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여기서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았다.

 

마그네스의 팔레스타인 이중 민족 국가 구상은 기대 이상의 지지를 받았지만 아렌트는 이에 대한 지지를 유보했다.

3국의 보호 아래 있는 이중 민족 국가에서 유대인은 소수 세력의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 구조 내에서 소수파의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민족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에 다수파 소수파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유지했다.

 

따라서 아렌트는 후술하는 아랍 연방이든 이중 민족 국가이든 소수 세력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연방 체제는 민족 갈등을 해소하는 데 있어서 최대의 성공 기회를 약속하며 정치적으로 다시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민족에게 제공하는 정치적 삶의 기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오랜 전통을 지닌 유럽 세계의 국민국가보다 연방을 바람직한 이상으로 생각했다.

아렌트는 순수한 연방의 모델로 미국을 제시하며 소비에트 연방과 영 연방 또한 사례로 들고 있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더 합리적으로 해결할 대안으로 일종의 지중해 연방을 들었다

유대인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정치적 틀을 유럽 국가들의 대규모 연방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아렌트는 유대 민족이 적극적인 참여로 이러한 연방에 포함되거나 귀속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아렌트의 구상에서 평화 사상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아렌트는 이러한 점을 다시 부각시키고자 비민족주의적 전통의 구체적 표현인 아랍인 유대인 이해 히브리 대학교와 집단 정착촌 설립의 의미를 제시한다.

전반부에서는 아랍인 유대인 회의 그리고 중동의 평화를 실현하려는 말리쿠와 마그네스의 외교적 노력이 강조되었다.

 

중동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바로 비민족주의적 전통의 기조이다.

후반부에서는 아하드 하암과 마그네스의 정치적 노력이 강조된다.

아렌트는 아랍 원주민의 팔레스타인 거주와 평화 유대인 아랍인 우정을 촉진했던 집단 정착촌의 정신이 비민족주의적 전통과 괘를 같이 한다고 생각했다.

 

유대인 문제를 잉태한 근대 유럽 역사의 종말은 근동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잉태한 현대 역사의 시작이 되었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적 비극을 목도하면서 다시 한번 유대인 문제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연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렌트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의 조국이 아니라 주권 국가로서 유대 국가가 건설된 이후 연방을 통한 유대인 문제 해결을 다시 강조했다.

 

아렌트는 절대 주권에 대한 민족주의적 주장이 지역의 발칸화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연방을 제시했다.

즉 아렌트는 여기서 주권 국가의 수립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고려했다.

아렌트는 독립된 두 정치적 실체로 구성된 국가 연합을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상정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 연합을 필수적 조건으로 하는 예루살렘을 공동수도로 하는 팔레스타인 연합 계획을 강조했다.

달리 말하면 연방화와 발칸화 사이의 대안은 정치적 대안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유럽인과 유럽 유대인 아랍인 예를 통해 이러한 갈등을 극복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렌트는 유대인 아랍인의 이해 협력을 위한 팔레스타인연맹을 제안한다.

 

이 연맹은 대량 이미 두 민족 사이의 항구적인 상호 이해에 근거해 유대인 조국으로서 팔레스타인 건설 이중 민족의 지방 행정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이웃 국가들과 구성원 연방에 가입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제 유대인 조국을 구원하자에서 제기한 유대인 아랍인 협력에 담긴 중요한 정치적 구상을 검토하자 이스라엘은 1948514일 건국을 선포했다.

아렌트는 이미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방 체제와 평의와의 연계성을 강조한다.

아렌트는 소규모 자치 조직 예컨대 평의회를 선호했다.

 

아렌트는 키부츠에 대해 이중적 감정을 확연히 드러냈다

할루츠 운동과 기부츠 운동은 새로이 확립된 가치를 지닌 채 새로운 유형의 유대인 심지어 새로운 형태의 귀족제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아렌트는 유대인 아랍인 평의회를 통해서 정치적 해방을 실현할 구상을 제시했다.

가능한 규모가 작고 수적으로 많은 지역 자치 정부 혼합적인 유대인 아랍인 지역과 농촌 평의회는 결국 팔레스타인이 정치적 해방에 이룰 수 있는 오직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다.

 

이렇듯 아렌트는 작은 규모의 분권화된 정치 조직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7. 인간다운 삶의 문제; 인권 보장과 정치적 악과의 투쟁

 

이 모음집을 읽으면 개인 또는 민족으로서 유대인의 정체성과 삶을 특징 짓는 용어에서 비인간적인 수사를 발견할 수 있다.

 

파리아, 벼락 출세자, 산 송장, 불운한 사람, 예외, 정치없는 민족, 역사없는민족, 쫓겨난 사람들, 혐의자, 어느 곳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민족 등

 

이는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아렌트의 이해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부분적으로 유대인의 자기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유대 민족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자기이해를 넘어서 보편적 의미의 인류 구성원으로서 인간성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키고 있다.

 

펠드만은 서문에서 아렌트의 정신 세계를 특징 짓는 용어로 유대인성과 유럽인성을 지적한다.

아렌트가 활동했던 공간관 제기했던 문제가 유대적이고 유럽적이기 때문.

 

(: 아렌트는 정치와 사회의 세속적 현실을 초월하려는 세계 시민 개념과 비판적 거리를 둔다 . -브륄은 아렌트에게 나타나는 범세계적 사유를 확장된 정신능력과 실천 역사에 대한 이해 인간 조건에 대한 이해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경험과 조건이라는 측면에서 언급한다.)

 

소수 민족 문제, 이 논문의 앞부분에서는 소수 민족의 비정치화, 즉 소수 민족 정치의 실패와 무국적자의 발생을 밝히고 있다.

뒷부분에서는 소수 민족 특히 유대인 문제의 정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해결책의 핵심은 유럽 연방 정치이다.

유대인들은 난민과 무국적 문제의 논의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채택된 평화 조약은 수많은 소수 민족을 양산했고 국민국가의 내적 분열을 촉진시켰다

 

주민의 동질성과 정착이라는 국민국가의 형성 조건을 갖추지 못한 동유럽에서 소수 민족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유대 민족은 대부분의 다른 소수 민족과 달리 나라 없는 민족 비극적 민족 또는 역사 없는 민족으로서 국민국가의 법 영역 밖에 놓임으로써 인권을 박탈당했다.

난민은 어떤 행위의 수행이나 정치적 의견의 발언 때문에 피난처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평화조약 체결 이후에 히틀러 집권 이전까지 유대 민족은 소수 민족 무국적자 난민 달리 표현하면 쫓겨나거나 권리를 잃은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됐다.

 

아렌트는 이러한 현실 역사적 현실을 들어 인권을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새롭게 조명했다.

아렌트는 이미 난민과 무국적자 문제를 단순히 유대인 문제에 국한시키지 않고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문제와 연관시켰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팔레스타인을 위태롭게 한다.

아렌트는 소수 민족 문제가 국가 주권으로 자초할 수밖에 없는 당시에 역사적 정치적 현실을 이미 이해했다.

 

인간적 존엄성이 침해받을 경우 자유를 위한 투쟁을 통해서만 인간이 자신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권 문제가 민족 해방 문제와 풀릴 수 없을 정도로 연계된다는 점은 유대 국가의 건국에 지음에 집필한 논문 유대인 조국을 구원하자에 나타난다

 

건국 이후 194849년 전쟁으로 야기된 정치 변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고향을 상실한 민족 아랍 난민이라는 새로운 범주의 탄생이었다.

 

전체주의 기원에서 밝혔듯이 유대인 문제는 영토를 식민화하고 이를 정복해 해결됐지만 유대인 문제의 해결은 단지 새로운 범주인 아랍인 난민을 생산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나치의 최종 해결책은 신체적 해결책이다.

 

아렌트는 유대 신비주의의 주요 추세서평에서 디아스포라 이래 유대인 정치를 시작한 샤베타이 운동 유대인 역사와 유럽 역사를 조화시킬 개연성을 부각시켰다

 

결론에서 악의 평범성이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악은 사유를 거부합니다.

 

사유는 심연에 도달해 뿌리까지 가려고 하며 악과 연관되는 순간에 무가 존재해 좌절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악의 평범성입니다.

 

악은 표피 현상이며 근본적이라기보다 극단적이므로 ....우리는 표피에 휩쓸리지 않을 때 악을 저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이히만은 피상성의 완벽한 표본이다.

 

독일의 책임 문제는 아렌트에게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이 글에서 과거 청산과 책임 문제에 대한 자신의 기본 명제를 밝혔다.

 

극복되지 않은 과거를 극복하자는 주장은 이 글의 결론이다.

아렌트는 ‘600만 명의 절멸에서 나치 점령 유럽에서 유대인 대중의 무기력을 언급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대인들의 분노와 왜곡의 대상이었다.

아렌트는 파리아 민족 가운데 의식적인 파리아로서 동족 대다수로부터 파면당했다.

 

한낱 민족으로만 존재한다면, 개인이나 집단은 정치적 인간 또는 정치 공동체 속에 있지 못할 것이다.

한낱이란 표현은 한 인간과 한 민족의 삶을 생물학적 범주로 규정하고 인간다운 삶, 즉 정치적 삶과 정신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삶을 보장하는 해결책은 바로 인권을 보장하고 공동체에서 평범한 악이 지배하는 것을 차단하는 노력일 것이다.

 

 

8. 마무리하기; 정치와 철학의 공존

 

아렌트는 삶을 통해 유대인 역사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이해하기로 전하고 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논의하면서 각 부분을 정치적 사유라는 외올실로 엮고자 했다.

유대인 문제는 문제의 난관으로부터 벗어나는 돌파구를 찾는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가 깃들어 있다.

 

그는 자연적인 것인 유대인성을 유지하려 유지하면서도 유대 민족만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틀에서 벗어나 문제를 근원까지 천착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사유의 길을 걸었다

 

아렌트는 시온주의 정치에 관한 자신의 이념이 좌절됐을 때 정치적 사회의 중심지를 유대인 문제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정치 혁명 시대의 정치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시절 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정치를 거쳐 정치와 철학의 정점인 정신의 삶으로 전환했다.

이러한 전환을 촉진시켰던 중요 요소는 여전히 정치였다.

아렌트는 인간의 삶에서 정신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면서도 이 한계를 넘어서서 인류에게 공통된 이상인 인간다운 삶을 조명하고자 정신 활동을 지속했다.

 

The End. 20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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