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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문제와 정치적 사유(한나 아렌트)

반유대주의(259-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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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1.. 저녁 9:40

 

멘델스존은 또한 유대인들의 권리와 수용을 증진시킴으로써 전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1781년 빌헬름 폰 돕(Christian Wilhelm von Dohm)에게 그의 저서 '유대인의 조건의 시민적 개선'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멘델스존에게 그의 이론은 유대교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나타냈다.

 

유대인·이스라엘, 그 발명된 신화들

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기생충이 되었다

혁명으로 평등을 쟁취한 인민

 

유대인은 근대국가 시민이 됐지만 공동체를 잃어버려

 

1879년 독일의 선정적인 언론인 빌헬름 마르는 게르만주의에 대한 유대교의 승리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반유대주의’(Antisemtism)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와해하는 유대인에 대한 봉건적, 종교적 속박을 대신하는 담론으로 등장했다.

근대 반유대주의는 서방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차별과 배제의 논리와 형식이 바뀌면서 등장했다. 차별과 박해를 종교적 차원에서 세속적 차원으로 바꾼 것이다.

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에게도 똑같은 시민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른 유대인 해방은 유대인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편입됨을 의미했다.

법령은 시민적 선서를 할 유대교 신념을 가진 개인에게그 선서는 모든 금지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유리하게 부여됐던 예외의 포기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당시 유대인 입장에서는 독립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유대인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질서에서 낙후되는 기존 주민의 불만과 분노의 대상이 됐다. 유대인 해방도 유대인의 역사적인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조건으로 주어졌다.

이는 해방 이후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기생충적으로 보는 반유대주의 형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유대인 차별의 뿌리가 된 독일 근대사상

 

첫째, 독일 통일 과정에서 형성된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민족주의이다.

유대인은 여전히 기독교도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었다.

기독교도의 피를 뽑아서 제례를 치른다는 유대인의 흡혈 의식은 근대에 들어 기독교도의 부를 빨아먹는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으로 변형됐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담론이 봉건시대를 지배하던 종교 교리로 뒷받침됐듯이, ‘기생충 유대인담론은 근대를 지배하는 과학 논리로 포장돼야 했다.

이는 유사과학인 우생학에 기반한 인종주의가 제공했다. 이런 격랑이 가장 강렬했던 독일에서 특히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완성됐다.

독일 정신을 진정으로 구현하는 국가 건설에는 정화가 필요했다. 정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주변 민족들에 대한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해야 했다.

 

우생학 주장유대인 유전적 질병에 시달려

 

둘째, ‘아리안주의라는 유사과학이 그 정당성을 제공했다.

 

문제는 아리안족이 타락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위기의 근원은 다른 열등한 인종과의 교잡이었다.

아리안족은 게르만족으로 등치 됐고, 아리안족의 덕목은 독일 민족의 덕목과 동일시돼갔다.

아리안족의 순수성 회복이 아리안주의 구현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셋째, 아리안족의 순수성 회복에는 우생학이라는 새로운 유사과학이 뒷받침됐다.

영국 프랜시스 골턴은 좋은 혈통을 가진 개인들의 번식을 장려하고 부적합한 이들의 결합을 억제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골턴의 제자인 칼 피어슨은 우생학에 바탕을 둔 본격적인 인종주의를 개척했다.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이민자에 초점을 맞춰, 유대인의 잠재적 병리 증세를 드러내는 신체적 특성에 주목했다.

독일 우생학은 유대인의 이런 생리적 특성을 그들의 사회적 행태와 연관시켰다.

 

반유대주의, 종교 넘어 인종 문제로

 

게르만족 혈통이 유대인과의 성적 접촉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접어들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신념 문제가 인종적 유전 문제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완성됐다. 19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전개가 부르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반유대주의와 결합하면서 유대인 박해로 귀결됐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2021.04.24.

https://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50263.html

 

 

 

 

 

 

 

 

1. 서론

 

 

프로이센 궁정 고문관 빌헬름 돔은 1781유대인의 시민적 개선에 대해라는 제안서를 출판했다.

아이젠 멘거는 1701정체 드러난 유대교를 출간했다.

그라테나워는 1803유대인에 반대하여를 출간했다.

완전한 시민해방이 독일에서 효력을 발휘하던 1869년에 빌헬름 마르는 게르만주의에 대한 유대주의의 승리를 출판했다.

 

유대인 문제는 1870년대쯤에 더 이상 토론의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반유대주의를 구호로 삼는 정치 운동을 결정화하는 논점이 됐다.

따라서 130년 동화 진행된 운동에서 제기된 모든 제안은 완전한 몽상의 수준에 머물렀다

 

독일계 유대인의 조건부 항복에 뒤이어 바로 세계 유대인의 조건부 항복이 있었다.

양심의 가책이 깃든 이 시온주의는 사실상 이미 존재했던 의회의 도피처였다.

궁지에 몰린 민족은 약간의 희망과 약간의 남은 자존심을 지키고자 이 도피처로 피신할 수 있었다.

독일의 재앙에 직면한 독일계 유대인과 세계 유대인이 저지른 정치적 실수는 150년 역사에 철저한 석명을 위한 훌륭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런 재앙은 독일에서 발생했고 독일 파시즘은 바로 그 성격과 강령에서 반유대주의에 초점을 두었다

나치 지도부는 이전의 반유대주의 정당과 단체의 분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독일에서 발생된 재앙은 기존의 환기 이론이나 설명 이론과 전혀 관계가 없다.

첫째, 환기 이론은 누가 무엇이나 다 비난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오래된 농담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라의 말썽꾸러기인 유대인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다며 유대인을 말썽꾸러기로 묘사하는 반유대적인 문구로든 반유대주의의 근거로서 유대인화는 모든 질문을 미해결 상태로 둔다

 

유대인이 반유대주의 근원이라는 주장은 반유대주의자들의 악의적이고 우매한 통찰이다.

그러나 유대인은 바로 이 교회를 자신들의 교의로 삼았으며 필요에 따라 반유대주의의 무시간성이나 세계에서 유대인이 맡는 임무의 무시간성을 증명했다.

 

2000년 동안 유대인이 만든 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민족들이 만든 유대인의 역사는 얼핏 보면 박해와 불행에 관한 단조로운 연대기이자 대학살과 추방 때문에 속죄받은 소수 개인의 훌륭한 흥망에 관한 단조로운 연대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유대 민족이 실제로 자신의 역사를 가졌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유대 민족의 명예를 수호하려고 한 민족주의 시각에서 기록한 역사와 동화주의자들이 기록한 역사의 변증론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유대인의 역사는 동화주의자들의 수중에서 우리에게 타격을 준 부정행위의 역사로 바뀌었다.

우리의 경우 유대인 민족사는 흩어진 민족의 통합된 민족적 발전에 윤곽을 공들여 대충 짜 맞추기 위해 유럽 역사를 배경으로 유대인 역사의 흔적을 추적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서유럽의 유대인은 동등한 시민권으로 외형상 보호를 받으며 유대 민족의 역사를 뒷문으로 밀반출하고 그것을 유대 종교의 역사로 대체하고자 시도했다.

 

동화주의자들의 이런 무관심은 동유럽 민족주의 역사의 최대 장점인 당파성과 대립했다.

따라서 동유럽 유대인은 유대인이 한민족이라는 한 가지 사항을 입증한 유대 민족의 세계사를 쓰는 데 성공했다.

동화주의 역사가들은 이런 주장에 대응해 격렬한 논박을 가했다.

결국 동화주의자들의 관심사는 유대인이 온갖 종류의 혼합제이지 한 민족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두 유형의 유대인 역사학은 반유대주의와 타협할 수 없음을 특징으로 한다. 유대인 역사학은 반유대주의를 유대인에 대한 개별적 견해로 축소하려고 시도한다.

 

(1) 민족주의 역사학은 유대인에게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성향을 찾고자 단순히 역사를 검토하고 이런 견해들을 평가하는 데 만족하며 이 견해들을 조합해 하나의 완성품으로 만든다.

(2) 반유대주의를 적어도 진지하게 고려하는 이점을 갖고 있는 동화주의 역사가들은 진지한 고려가 당대에 진보에 기여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에서 단지 가장 무해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개별적 의견을 반박한다.

 

그러한 주장의 목록은 성격상 무한하며 자기 적들의 창작 능력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그런 접근 방법은 말 그대로 무비판적이기에 무엇이 반유대주의를 가능하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결코 제기하지 않는다.

동화주의자들의 경우 유대인의 역사는 그들이 사는 민족의 역사와 일치한다.

 

이마저도 각각의 유대인 공동체 유물, 즉 변명으로 기록되지만 반유대주의는 의견이든 정치 운동이든 그러한 낙관적 역사에서 배제되고 이후 중세적 야만과 넓은 낡은 편견으로 범주화된다.

 

민족주의 역사학이 유대인과 주인 민족 사이에 원칙상 격의감이라는 무비판적 가정에 비판을 두지만 동화주의 역사학자들도 똑같이 유대인과 전체 주인 국민 사이의 100% 조화라는 무비판적 가정을 선택한다. 유대인이 다름 아니라 독일인이었기에 유대인과 독일 민족 가운데 어느 특정 분파 사이에 이해 관계 차이란 있을 수 없었다

 

시온주의 비판은 독일인들만이 그렇게 매우 긍정적 입장에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러한 불합리성을 제고하는 데 기여한다.

단지 이들은 사실 어떤 사회에도 결코 완전히 귀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추상적 개념 독일 민족 대신 이제 다소간 대립적인 두 개의 추상적 개념 독일 민족과 유대인을 갖게 된다.

시온주의의 경우 사실적인 동화는 여전히 동일한 유대인다운 실체와는 관계없으며 주인 민족의 항구적인 실체는 유대인 다운 실체와 배치된다.

동화주의자들은 사태가 어떻게 안 좋게 바뀌었는가를 결코 설명할 수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의 경우 모든 게 잘 전개될 수도 있었다는 점은 미해결된 채로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결점이다.

이런 결점은 모두 유대인 자신들과 함께 사는 민족 분파 사이 상이한 이해관계가 있고 항상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는 유대인의 공통된 공포에서 발생한다.

유대인의 두려움으로 그들의 상황에 대한 탐구가 반유대주의자들의 일시적인 필수품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소멸과 같은 의미였을 국제적 차원의 동화, 즉 대립된 국제적 이해관계를 알지 못하는 사회 질서만이 이해관계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은폐 시도는 소위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서 가장 명료하게 설명되는 경향이 있다.

 

유대인이 유대인을 위해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것들만이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 대상이다.

러시아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헌법의 법률로 보장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이 헌법은 반유대주의를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한다.

완벽한 동화와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건설은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본질적 명분으로 삼아 왔으며 그 결과 논의 논쟁 정당화 그야말로 탈출구로서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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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더가 처음으로 유대인을 우리 대륙의 생소한 아시아 민족으로 정의했다.

유대인의 해방은 외국에 비유대적인 집합체에서 나타났다.

유대인은 결코 이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으며 이런 역사적 집합체는 유대인의 역사 과정에도 속하지 않았다.

동화주의자들은 이국인성(외래성)을 종교의 무해한 차이로 폄훼하고 그밖의 다른 차이를 억지로 과거 속으로 밀어넣는다

종교의 차이 이외 다른 모든 것은 동화 과정이 스스로 사라질 수 있는 추한 역사의 잔재이다.

동화에서 유대인의 구원을 찾는 모든 이론은 완전히 동화되고 분화되지 않는 유기체를 형성하는 주인 민족이란 전제에 기반을 둔다

 

한 사람이 민족의 어떤 계급에 속한다는 어떤 시인도 거부된다.

이를 감히 언급하는 사람은 누구나 유대계 반유대주의자라는 딱지가 붙는다

동화 과정에서 가능한 많은 유대인을 동화시키고 참여시키기 위해 조직은 전제 조건이 된다.

19세기 초 이후 서유럽 국가의 유대인은 자신들을 사라지게 하는 목적을 가진 조직 안에서만 유대인으로서 정치적으로 존재해 왔다

 

유대인은 마음속으로 모호하게 정의된 독일 민족의 일반 이익에 따르고 게다가 역설적으로 독일 민족의 한 단체였기에 그들은 어떤 정부가 우연히 집권하더라도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특별한 신뢰를 맹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충성을 하면서 후속 정부들로부터 공인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1933년은 단지 독일 민족에 대한 유대인의 100% 순응의 자연적 결과이다.

특별한 독일 민족의 진정한 대표자인 히틀러는 인종 이론이란 자신의 불가능한 생각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고 민족공동체 일원이라는 개념에 감상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유대인을 이용했다.

히틀러는 여전히 충성스러운 유대인도 공공의 적 제 1번이라고 힘껏 선언하는 게 필요했다.

 

유대인의 이국인성을 종결하는 올이 다 드러난 망토로 환원시키는 것은 민족 전체의 속살을 은폐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국제적 유대인의 협조는 모든 그러한 애국심에도 온갖 유대인 대학살의 결과로 일어나는 믿음을 가진 형제들과의 강요된 연대를 통해 증명된다.

종교라는 망토는 점점 더 올이 드러나지만 이국인성은 강렬하고 점점 더 강렬해진다.

유대인은 이 때문에 결국 높은 차원의 반유대주의의 봉사에 기독교인들과 같은 항아리(파멸)에 빠지는 실제로 그들과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부가적인 불운에 직면했다.

유대인은 십자군 전쟁 이후 언제나 800년 동안 박해받고 구타당하고 조롱당하고 이단자로 낙인 찍혀왔다

유럽의 기독교 자체는 독일인들에게서 자신들의 찬란한 종교를 박탈해 온 유대교화이다(모리츠 골드슈타인)

 

실제에 대재앙이 있기 오래 전에 이 고통에 도가니에 역사에 밟지 못한 정직하고 편견없는 사람, 즉 골드스타인이 이런 명백한 모순을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이끌 수 있었다.

온갖 중상이 반박됐고 온갖 거짓 판단이 좌절됐을 때

우리에 대한 그들의 혐오는 여전히 반박할 수 없다.

 

헤르츨은 이러한 통찰을 통해 서유럽을 시온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유대인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유대인 다운 실체의 발전을 위한 조건의 정상화이다.

즉 그것은 다른 모든 민족과 같이 한 민족이 되는 것이다.

실체의 이런 이국인성과 이에서 발생하는 혐오와 비교할 때 모든 개인적 비난과 비방은 단순한 징후이며 그 자체로 치유되거나 진지하게 고려될 수 없다.

물론 동화주의적 변명의 개별적 사항에 대한 합의는 있지만 그의 효능감에 대해서 합의는 없다.

동화주의적 변증론은 반유대주의를 개개인의 오류와 비방으로 해부했지만, 시온주의는 개인 의견 이면에 있는 중요한 것을 전제하고 발견한다.

 

 

이런 관점에서 역시 시온주의는 동화주의자들이 계승한 유산을 확실히 수용하지만 그것을 위아래로 전도시킨다.

동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독일 민족과 같아졌다고 상상했지만, 시온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아니 반유대주의가 입증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교체 불가능한 실체를 근거로 다른 민족에게 전적으로 이방인이 와서 이들로부터 멸시를 받는다.

그러한 도식적 일반화는 반유대주의에서 민족 공동체의 세계관을 결정화하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을 완전히 따르는 것 같아 독일의 시온주의는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그랬듯이 점차로 서유럽에서 선도를 달렸다 시온주의는 전적으로 비역사적인 이론에 기반을 두기에 어떤 현실적인 분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유럽 유대인의 이해관계에서 시온주의는 동화주의자들이 항상 그랬듯 충실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중의 애국심을 유지해야 한다.

시온주의는 부유한 유대인의 도움에 좌우된다.

따라서 시온주의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호소하고 동유럽의 믿음을 가진 형제들을 자신들의 조국과 상당한 거리를 두게 해야 한다.

그래서 시온주의를 현실적으로 분석하려는 헤르츨의 초기 시도는 결코 발전하지 못했다.

부버의 시온주의는 의사철학적 심오함으로 유대인 다운 실체를 설명하고자 시도한다.

실체적인 것에서 이국인성을 응시하는 것은 유대 민족·유대인·유대인 다음 등을 정의하려는 광적인 충동을 형성한다.

 

어쨌든 이론적 시온주의는 또한 그런 문제들을 단순히 제기함으로써 항구적이고 고도로 위험하게 최악의 파당적 이해관계와 반유대주의적 정리에 근접하게 된다.

정의(定意)가 실제로 촉구되면 인종에 기반을 둔 정의는 가장 확실하고 참된 정의인양 보일 것이다.

 

시온주의는 모든 면에서 동화의 정당한 소산이다.

시온주의는 동화가 실패했을 때 등장했고 자포자기하고 실패한 해방의 결과이다.

시온주의는 동화주의자들의 환상적인 정책 때문에 서유럽 전체가 직면했던 불행과 고통으로부터 정당성을 도출한다.

그들은 순전히 팔레스타인에 초점을 맞추어 왔고 유대인 디아스포라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심을 상실했다.

시온주의는 통합된 민족이란 동화주의적 환상에 의지하기에 통합되고 영구적인 실체라는 환상을 대체해 왔다

 

시온주의자들은 지구적 차원에서 유대인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없다.

그들은 소비에트 헌법이 유대인에게 부여한 권리의 평등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반유대적인 정부와 기꺼이 협상한다. 그들은 표면상 통합된 세계 유대인의 이익을 옹호함으로써 동유럽 유대인 대중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져버린다

민족적 존엄성의 박탈은 팔레스타인 이해관계의 우위성에 대한 주장과 유대인 다운 실체의 재생으로 정당화된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가들은 현실 정치의 실천가들, 즉 잠정적인 권력관계를 맹목적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됐다.

이상가들은 소수 유대인 자본가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유대인의 박해를 항의할 위험이 없는 집회를 개최한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세계적 차원의 유대인 정치를 포기했다.

유대인 정치는 시온주의가 서유럽 유대인 부르주아지 가운데 상당히 진보적인 집단만을 대변한다.

1882년 핀스커가 출판한 소책자 자기 해방에서 핀스커는 이미 부르주아지의 동화를 실패작으로 표현하고 유대인에 대한 증오, 즉 각 국가에서 나타나는 이런 영구적인 유령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새로운 해답을 모색한다.

자기 해방은 오히려 민족의 재탄생, 게토로부터의 자기 해방일 것이다.

핀스커의 자기 해방의 보증은 민족의 재탄생을 획득하려는 투쟁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팔레스타인은 자기 해방이 성취될 수 있는 영역으로 간주됐고 현재도 그렇다

 

시온주의는 호소문의 근거를 전 세계 유대인의 위상이 팔레스타인의 건설에 좌우될 것이라는 명제, 즉 이것만이 그들에게 더 훌륭한 정치적 위상을 제공할 수 있다는 명제에 둔다

시온주의는 이를 위해 유대인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전적으로 이에 기여하는 독립된 정책의 출현을 적어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시온주의가 날이 갈수록 영국과의 봉신 관계를 강요당하고 있는 방식이다.

유대인은 벨푸어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영국 제국주의의 선두주자로 불려왔다

확실히 영국의 경우 유대인 없는 팔레스타인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인권이란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로써 우리에게 부여된 민족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해방의 수령인이다.

심지어 유대 국가는 외국 이익의 부록 그리고 외국 역사와 대형 제국 일부로 우리에게 표현됐다.

 

폴란드 귀족들은 농민들을 철저히 착취 하려고 했다.

유대인을 자기 나라에 초청하고 농민들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했다.

중유럽 유대인은 그때는 중세 말 유대인 대학살을 회피해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동유럽의 천국으로 이주했다.

 

팔레스타인의 현실로 야기된 시온주의 운동의 파산은 동시에 자율적이고 고립된 유대인 정치라는 환상의 파산이다.

다양한 이익을 둘러싼 일상적인 투쟁에서 훨씬 벗어나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유대인 다운 실체가 있다고 상상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자신의 이익이 최악의 이해 당사자의 수중에서 배반당하는 것을 볼 것이다.

뿌띠부르주아지는 서유럽 부르주아지에 의해 도중에 수용되어 재정 지원을 받았다.

두 집단은 어떤 정치적 양보도 하려고 대비하고 반유대주의 정부의 지원을 수용하거나 영국 제국주의를 수호하는 군대가 되려고 대비하고, 즉 유대인 정치 일반을 포기하려고 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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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반유대주의 발생의 전형적 대지

 

어느 국가도 현대 세계사에서 독일만큼 유대인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지 않았다.

어느 국가도 현대사에서 독일만큼 유대인에게 더 많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프로이센만큼 유대인의 해방에 더 기여한 곳은 없었다 레싱으로부터 훔벌트에 이르기까지 프로이센은 유대인 문제와 유대인 해방이 인간의 자유와 보편적 정의를 위한 투쟁과 동일시된 곳이었다.

 

우리들의 경우 1933년은 유대인의 선거권 박탈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인것과 같이... 유대인의 인권 선언 소식을 한때 유포시켰다

그러나 근대의 제 1차 대학살 1880년대 러시아는 계몽된 반유대주의적 작품을 통해 단정되고 정당화됐다.

근대 유대인의 대량 이동이 1880년대 러시아의 대박해로 시작됐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1880년에서 80년까지 매년 평균 3000명의 유대인이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이동했다.

러시아 대박해의 물결 속에 5만 명의 유대인이 19세기 후반 20년 동화 매년 이주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 135000명의 유대인이 매년 이주했다.

 

히틀러의 집권과 더불어 다른 나라로 이주할 필요성이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의 강도로 증대됐다.

그러나 유대인 이민은 독일의 반유대주의의 결과인 전반적인 유대인 박해 때문에 다시 막혔다

세계 어느 나라도 유대인 대중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대인을 동유럽 유대인과 동화된 유대인으로 구분하던 시대에 이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근대의 첫 번째 대박해가 러시아에서 자행될 때 반유대주의자들의 제 1차 국제 회의가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유대인은 대부분 유럽 국가에서 해방을 아직 인정받지 못했다.

유대인을 파멸시키는 근대의 전쟁은 독일의 지적 영향력에 보호하래 유대인에게 적대적인 많은 나라에서 예고되고 있었다.

 

독일은 반유대주의의 완전한 승리에 이르러 유대인 문제와 관련해 순수한 전형적인 지위를 획득했다.

유대인 문제는 프로이션에서 18세기 말경 당시에 유럽 역사의 가장 긴급한 정치적 문제 일부로 제기됐다.

처음부터 유대인은 대표적인 유명한 유대인이 되었고 개개인은 원리가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은 인간다운 게 어떤 뜻인가를 나타내는 원리가 되었고 유대인의 해방은 인간 해방의 상징이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항상 이론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인간의 권리에 관한 논의이지 기독교 국가와 주변 세계의 신념과 다른 신념을 가진 동료 시민을 위한 동등한 권리를 성취하는 것에 관한 논의는 아니다.

유대인은 이러한 타락과 수양을 드러낼 수 있는 범례이다.

돔의 목적은 유대인 사회나 유대인을 위한 변명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인류의 대의와 권리를 제시한다.

 

독일이 유대인에게 제공한 최고의 기회는 온갖 결점에도 유대인의 대의와 이런 연결고리를 단절하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독일 계몽주의가 유대인의 대의와 인권의 대의를 이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제기한 이후에도 프랑스 혁명이 그러한 연결고리를 실천한 이후에도 우리의 역사가 따르려고 했던 모범은 여전히 흔적을 드러냈다

 

경제적 동화는 독일에서 거의 80년 동안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제한적인 특권과 기능을 지닌 피억압 민족은 이 과정에서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시민이 되었다.

유대인은 이때 자신들의 가장 훌륭한 정치적 친구들을 잃었다

 

이들은 이제는 해방을 모든 피억압 민족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요구했던 특권으로 전환시켰다고 유대인을 비판했던 계몽주의 후계자들이다.

유대인 해방을 주장했던 친구들은 최종적으로 반유대주의자가 됐다. 유대인은 자신이 문제를 정확히 평가한다면, 자신의 특정 고통을 제거하거나 특정 예속을 철폐하겠다고 제안하거나 희망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원리를 전복시키겠다고 제안하거나 희망해야 한다.”

 

우리의 절친한 친구인 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구 표면에서 그들을 갑자기 제거하거나 그 목표를 점진적으로 성취하는 조치를 취할지 또는 그들을 지금까지 있었던 바로 유해한 사회 구성원은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 둘지이다.

또는 그들을 세계에 더 훌륭한 시민이 되게 하는가이다.”

 

사람들은 대표적인(그 유명한) 유대인을 위해 전적으로 확실히 유해한 유대인을 못 본 체할 수 있다.

유대인을 항상 유대인다운 특성들의 집합체로 변형시키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유대인을 대표적인 유대인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런 특성들은 모두 근대 반유대주의에서 발견되는 성향들이다.

그때 반유대주의는 정확히 추상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중세의 유대인 증오와 구별될 수 있다.

 

독일은 근대의 추상적 반유대주의를 가장 근본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했기에 오히려 반유대주의 등장에 전형적인 대지가 됐다.

독일은 전체 세계의 모델로 기여할 수 있었다.

 

 

3.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증오

 

근대 반유대주의가 중세 시대 전례들의 유산이고 따라서 고대 유대인 증오의 유산이기도 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근대 유대주의는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공포에 호소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반유대주의 선동자들은 근대에 그렇게 빈번하게 다시 활동하는 유령에 대한 이런 전래되는 공포를 꾸준히 훌륭하게 이용하는 법을 알았다.

반유대주의가 원래 대부분 유대인과 거의 관계가 없는 정치 투쟁에 여러 성향을 제공할 수 있었던 이론으로 이동한 후에만, 반유대주의는 정치적으로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정됐다.

 

보통 사람들의 건전한 본능과 반유대주의의 동일화는 결과적으로 정치 투쟁에서 고통을 없앤다

중세의 야만과 항구적인 반유대주의는 모두 우리 유대인에게 어떤 희망도 전하지 않는다.

야만이란 관점에서 근대 세계는 중세 세계를 훨씬 능가했다.

 

마르는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증오에서 발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인 증오는 반유대주의의 초기 형태, 즉 종교적 형태의 덧에 걸린 반유대주의이다. 하느님과 종교는 모든 유대인 박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

 

궁극적으로 봉건사회의 유대교화와 중세의 야만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의 증오는 유대인을 예수를 낳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한때 선택됐으나 이후 영원히 저주받은 민족으로 간주한다.

유대인에 대한 의견과 그들에게 가해진 증언은 한결같이 교회에서 유래하며 유대인의 개정은 교회의 구원과 전도 계획이 중요하고 실제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세례받은 유대인은 더이상 유대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다.

유대인은 중세 시대 반유대주의 문헌을 모두 집필했거나 이 문헌에서 권위자로 인용된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구약으로 긴밀히 묶여 있고 신약탈무드로 서로 분리됐다.

우리 시대 유대인의 무한한 박해는 중세 말 16세기와 17세기의 박해와 전혀 비교할 수 없다.

이때의 박해는 진짜 절멸 운동이다.

이 새로운 형태의 집단 학살은 이미 루터에서 정당화를 발견했다.

루터는 루터의 유대인 증오는 첫 번째 근대적 요소를 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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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금융 기능이 주변에 존재하는 한에서만 그들은 일반적인 경제적 삶의 일부로 용인된다.

이런 기능이 사회의 다른 부분에 더 중요해지고, 더 결정적이 되면 될수록 유대인은 그 부분으로부터 더 빠르게 분리된다.

그들의 종교적 존재가 기독교에 필요하고 기독교 진리의 증인으로서 그들의 존재가 교회에 필요하듯이 그러한 특권이 보장하는 지엽적인 경제적 권리는 종종 통치자의 경제 운영에 필요하다

 

중세 시대의 유대인 증오의 완전한 역사적 기반은 예수와 모든 기독교 문화에 대한 유대인의 완고한 반대에 있다.

동시에 유대인 증오의 완전한 사회적 기반은 상업과 은행 업무에서 유대인이 수행한 역할에 있다.

유대인에게 강요된 규정된 사회적 역할’character mask을 표현한다. 근대의 연상은 특정한 필요에 의해 제약되며 이것의 기초에 이해될 뿐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다.

 

이런 근대적 자의성은 유대인에 대한 정의로부터 나타난다

유대인은 서유럽 국민들 속에서 명백한 정체성을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

유대인이 종파 또는 국민인가 민족 또는 인종인가 국가 또는 종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비유대인이 유대인에 가진 특정한 견해에 좌우된다.

 

유럽의 여러 민족이 국민이 됐을 때 유대인은 국민 속의 한국민이 됐다.

독일인이 국가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대표성 이상의 무엇인가를 근본적 본질로 찾기 시작했을 때 유대인은 국가 내의 한 국가가 됐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적 지위로 격화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유대인의 지위가 비록 자금을 빌려주는 권리에 불과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특권을 지녔다

유대인이 이 사회의 문화에서 단지 예수에 적이듯이, 그는 이 사회에서 단지 고리대금업자로서 지위를 지녔다

종교적 증오는 그러한 방식으로만 사회적 증오와 결합됐다.

두 가지 형태의 증오는 중세시대 대박해에 광신적 행위를 초래했다.

청년 헤겔주의자인 브루노 바우어는 유대인을 유럽 역사의 일부로 만든 것이 기독교 문화에 대한 그들의 적극적인 적대감이었다고 명료하게 지적하고 강조한다.

 

그것은 그들과 역사를 연결시키는 끈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들의 명분은 완전히 상실된 명분이었을 것이다.”

모든 형태의 근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증오의 기저를 이루었던 근거, 모든 왜곡의 근거로서 기여했던 유대인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항상 유대인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많은 다른 경향을 은폐한다.

사람들은 역사를 연상의 역사로 논의할 수 있었다.

 

4. 고리대금업자, 파리아, 기생충

19세기와 20세기에 유대인 증오의 소멸과 반유대주의의 등장 이전의 중유럽과 서유럽의 유대인과 주인 민족 사이의 관계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유대인은 이 시대 이전 재앙과 추방 기간에만 다른 민족과 접촉했다. 고리대금업자는 사실 게토의 외부 거래를 독점했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자기 민족의 대변자였다.

그러나 게토 공동체들은 궁정의 재무관으로서 공동체 보호에 필요한 관계를 유지했던 후원자들에게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의존했다.

따라서 그곳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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