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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혁명과 반발 -1945년 8~9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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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혁명과 반발:19458~9

 

1945년에 끝난 전쟁은 세계적 중요성을 띤 세계대전이었다전쟁이 전개되면서 생겨난 전례 없던 혼란과 뒤섞인 관계는 사람들의 공통된 삶이 됐다. 깨어난 사람들은 과거가 지나갔고 새 시대가 밝았다고 결론지었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새로운 운명을 만들고자 했으며 혁명의 전염이 지구를 휩쓸었다.

1945815일 일본이 항복한다고 일왕 히로히토가 발표하자 한국인은 감격하여 축하했다. 새 제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에 드려움을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갈등이 내재한 위기의 정치는 현재 지배층, 신분과 계급 관계, 제도. 가치. 상징. 신화의 폭력적이고 근본적이며 급격한 변화나 좀더 단순하게는 지배계급 전체에 적의를 품은 파괴적 행동으로 정의된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과 반혁명으로 표현된 모든 것을 옹호한 주장으로 나타났다.

 

일본 식민 통치의 종식

한국인은 소극적 저항 외에는 일본의 무장 권력을 실질적으로 위협하지 못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투옥된 약 3만 명의 죄수가 대부분 정치범이거나 사상범이었다는 사실은 한국인의 저항과 일본의 정책적 실패를 생생히 증언했다.

일본인은 한국인의 보복을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법과 질서를 보존하고 일본인이 한국을 무사히 떠나게 해줄 과도적 행정기구를 수립하기 위해 영향력 있는 한국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송진우는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고, 여운형은 제안을 수락하기 앞서 5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 전국에서 정치범과 경제범을 모두 즉각 석방할 것. 2) 앞으로 석 달 동안 식량 공급을 보장할 것. 3) 치안 유지나 독립을 목표로 한 한국인의 행동에 절대 개입하지 말 것. 4) 학생과 청년을 교육하는 데 절대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시켜 훈련하는 데 절대 개입하지 말 것.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은 연합군과 망명인사들이 외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과도적 행정기구로써, 친일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정치 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한국인의 나라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연합군에게는 엄격한 중립을 요구, 국내외 정치적 갈등에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817일 건준의 공식적 수립이 전국에 발표됐고, 닷새 뒤 지도부의 명단이 공개됐다. 건준지부와 산하 단체는 하룻밤 사이 전국에 생겼다. 8월 말 남한과 북한에 145개 정도의 지부가 존재했다. 이런 정치 활동은 10년 동안 잠복돼 있던 것으로, 한국인은 근대적 형태의 정치동원을 어느 정도 경험했다.

815일 이후 한국에는 군사적 또는 준군사적 조직이 여럿 나타났는데, 일본군에서 제대한 군인과 장교들이 주요역할을 맡았다. 조직은 대체로 일본군을 따르면서 새로운 이름 (조선국군준비대)을 채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8월에는 대부분 건준 아래에 있었다가, 9월 미군이 진주한 뒤 이 조직들은 수많은 개인적 군사 조직과 청년단체로 나뉘었다.

조선국군준비대는 남한의 모든 도에 지부를 두고 6만 명 정도의 신병을 입대시켜 적어도 15천 명을 훈련, 다른 비공식적 군사 단체보다 더 강력한 조직력을 갖게 됐다.

가장 인상적인 조직 운동은 8월에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단체가 초기 대중조직을 수립한 것이다. 몇 주 만에 이런 조합과 대중조직이 폭넓은 규모로 나타났고 그들 대부분은 좌익과 연결됐다. 공산주의자와 좌익은 1930년대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었다. 근대적 대중 정치가 한국에 소개된 것도 소련. 중국. 일본의 사례를 모범으로 삼은 좌익의 업적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대중조직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노동자. 농민을 통제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의지한 것은 경찰과 관료조직이었다.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은 1920~1930년대에 이뤄진 선구적 조직 활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은 19193.1운동 이후 산발적으로 조직됐다. 그 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깊은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은 지방에 분산돼 있는 조직을 통일하려는 목표로 1924년 조선노농동맹을 결성했고, 26~27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이라는 두 조직으로 나뉘었다.

조선노동총동맹은 1929년 석 달 동안 원산 파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조선농민총동맹은 1931년 만주사변에 저항하는 의미로 청진파업을 전개했지만 일본에 진압당한 뒤 지하로 숨었다. 적색농민조합은 전국의 농촌에 뿌리내림으로써 1945년 부활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제공했다. 지방조직은 자연적이고 분산된 형태로 넓은 지역에 조직, 11~12월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최종적으로 전국적 대중조직과 중앙사무소를 설립한 뒤 추인받았다.

 

건준의 주요역할은 불을 피울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건준 지도자들은 주요한 두 파벌에 소속됐으며, 서로 다른 정치적 지지와 충성을 가진 하위 파벌로 다시 나뉘었다. 한 파벌은 여운영을 지지했고, 비공산주의자였으며, 다른 하나는 대부분 공산주의자였다. 여운형 계열은 194410월에 창설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조직에 기초했다. 조동호, 김세용, 이만규, 이여성, 감리교 목사 이규갑. 함상훈, 민족주의자 안재홍, 성대파 소속 공산주의자인 이강국. 최용달. 박문규들이 있었고, 다른 계열에는 이영. 최익한. 정백. 홍남표 등 장안파 공산주의자였다. 건준의 공산주의자들은 훈련받은 공산주의자가 아닌 지식인의 한 집단에 불과했다. 강령은 독립, 일본인 추방, 친일파와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민족의 대동단결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정치 활동의 자격을 결정하는 핵심적 시험은 일제 치하에서의 행적이었다. 공산주의자는 대체로 이 시험을 쉽게 통과햇다. 다수의 민족주의 지도자는 부합되지 않았다. 건준에 참여한 지도자들은 단 한명도 친일파로 고발되지 않았으며, 대안적 후보 인사도 없기도 해서 458월에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건준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총독부는 건준이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건준을 치안 유지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818일 여운형은 테러를 당했고, 좌우익의 협력은 어려워졌고, 건준은 일본에 스스로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조선인민공화국

일본군은 한국 북단에서 소련군과 작은 접전을 벌여 남진을 지연, 8월 마지막주까지 38도선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다.

남한의 공산주의자와 좌익이 소련의 남진을 환영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코민테른이 한국 내부의 공산주의자와 영향력 있는 관계를 갖지 않았으며, 그들은 독자적으로 한국 정부를 세워 명예를 되찾으려 했다.

8월 마지막 주에 소련이 남진을 멈췄고 미국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돌았다. 이 소식은 남한의 정치 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은 자신들이 좀 더 오래 한국에 영향력을 펼 기회라고 느꼈다. 좌익을 지지한 한국인은 건준의 기반을 넓혀야 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우익에 선 한국인은 더 이상 건준을 매개로 일하거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 대신 그들은 자신의 조직을 만드는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미국의 38도선 분할 제안을 수락했고, 일본인은 식민통치 특징과 어울리는 선물을 한국에 주었다. 그들은 남은 물품들을 폐기했고 화폐를 마구 찍어냈으며, 친일 성향의 한국인에게 은사금을 나눠줬고, 창고에 있던 음식, 기름, 옷 등 자산을 처리하는 동안 남한 경제는 거의 파괴되었다. 또한, 일본 식민 당국은 미군과 접촉해 공산주의자의 반란 및 시민 소요와 관련된 사항을 전달하면서 동정을 얻으려 했다.

건준 선언서는 치안유지 목표에서 벗어나 새 정부 수립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고 봉건 잔재를 일소하며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한 민족 반역자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91일 한국 정부를 수립하려는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그런 노력은 여운형. 허헌. 박헌영이었다.

96일 서울과 지방에서 활동하던 건준 활동가 수백 명은 서울 경기여자고등학교에 모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미국의 장기적 후원이나 미국의 호의를 얻은 인물의 집권을 미리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한국 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과도정부를 구성할 지도자 87명을 선출했다. 지도자 55명 가운데 42명은 좌익이나 공산주의와 연합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이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13명만이 민족주의자이거나 우익이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1945년 한국의 공산주의는 크렘린에 경도되거나 마르크스적 국제주의에 헌신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 민족과 독특한 전통을 보존해야 하며, 한국에는 독특한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민족주의자. 보수주의자와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98일 인공은 내각명단을 발표했다. p144) 주석:이승만, 국무총리:허헌, 문교부장:김성수, 내무부장:김구, 사법부장:김병로, 부주석:여운형, 외교부장:김규식, 경제부장:하필원, 재무부장:조만식, 체신부장: 신익희. 인공 배후에 있는 혁명적 추진력은 강령과 선언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인공 지도자들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잿더미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세계적 조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선언에 이어 27개 항의 시정방침이 발표됐는데, 제국주의와 봉건잔재를 청산하는 데 집중됐다. 일본인과 반역자가 차지한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해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몰수한 토지에는 “37에 바탕한 합리적 소작료를 부과했다. 광산공장철도해운통신은행 같은 주요 산업은 국유화하지만 중소규모의 상공업은 국가의 감독 아래 개인이 운영하도록 허영했다. 산업화를 급속히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이뤄졌다.

시정방침에는 언론집회신앙의 기초적 자유도 보장했다. 민족 반역자를 제외한 18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는 선거권을 부여했다. 모든 특권을 없애고 여성 행방을 포함해 모든 인민의 절대적 평등을 실현하겠다고 주장했다. 하루 8시간 노동의 확립과 아동노동금지, 최소 임금 보장을 약속하는 등 노동문제에도 개혁적 자세를 보였다. 국가에서 기초 교육을 의무적으로 제공하게 했다. 끝으로 한국의 외교적 태도와 관련해 그 시정방침은 민주주의 진영에 있는 미국소련중국영국과 긴밀히 제휴하는 한편 외국 세력의 내정 간섭은 절대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시정방침의 조항들은 앞으로 수립할 정부와 관련된 의제를 정의했으며, 그 뒤 3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질 사회정치적 논쟁의 주제를 결정했다. 그 뒤 3년 동안 정치적 담론을 지배한 것은 토지 개혁, 노동 조건 개역, 정치 활동의 자유 등과 관련된 요구들이었다. “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은 많은 한국인에게 목표를 이루는 수단의 상징으로 다가왔고, 인공이 당초 의도한 목표를 상당히 뛰어넘은 결과였다.

인공 수립 방식에 비판이 제기됐다. 우익보다 좌익이 비판에 적극적이었다. “대중의 직접적 참여가 거의 없었다. 고립된 자본가적 관료 기구와 전혀 다르지 않고, 혁명적 관점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대중 집회가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인공 지도자들은 오래 유지되는 조직을 건설하는 데 미숙했고, 지방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운동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을 지적하더라도 남한의 어떤 세력보다 인공 지도자들이 조직과 동원을 주도하고 민족적 목표를 설계해 주권을 확립하는 기초 작업을 뛰어나게 수행한 것은 사실이다.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대

한국의 특권계급은 일본에 협력했다는 오점 때문에 그동안의 정통성을 잃었고 회복할 수도 없었다. 지방의 급진적 농민운동은 일본인과 한국인 지주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했다. 그러나 일부 하위 협력자와 지주는 건준 지방 지부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이끌기도 했다. 송진우김성수 같은 보수주의자는 자기 목적에 맞춰 건준을 움직이려고 시도했다.

8월 마지막 주 미국이 남한을 지배하리라는 소식은 우익의 기초 조직 수립에서 핵심요소로 작용했다.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조선국민당.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환영준비위원회는 98일 미군 진주와 때를 맞춰 인민공화국 타도 결의문이라는 제목의 문건을 발행했다. 916일 그들은 연합해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한국민주당은 해방된 지 몇 달 만에 우익의 기둥이 됐으며 미군정 내내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우익정당으로 남았다. 미국 자료들은 대부분 대지주와 부유한 사업가로 구성됐다고 말했다. 한민당 중심은 김성수송진우 등이 이끈 지주기업가와 신문잡지 등의 발간에 종사하는 인물의 모임이었다. 이 집단을 대일 협력자로 불러야 할 것인지는 보는 사람의 정의와 시각에 달려 있을 것이다.

대중은 식민정책을 지지하지 않은 부유한 한국인이라도 일본의 끄나풀로 봤다. 한국인에게 식민주의와 자본주의는 전통 한국의 경제와 사회의 차분한 자급자족을 혼란에 빠뜨리고 무너뜨린 외부의 침입을 상징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자급적인 전통 경제를 복원하려는 반동주의자와 사회주의에서 해결책을 발견한 진보주의자 모두를 묶을 수 있었다. 이런 일반적 태도는 해방된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민당 지도자에는 서구에서 공부한 사람이 많았다. 장덕수, 장면, 장택상, 안호상, 구자옥, 김준옥, 조병옥 등이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애국심을 온전히 지킨 뒤 나타난 사람들도 있었다. 이인, 원세훈, 김준연, 김약수 등이다. 오세창, 권동진 같은 연로한 애국자를 지도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좌익 세력을 포함하지는 않았다.

한민당은 그 목표를 분명히 밝히거나 방침을 호소하지 않았으며, 처음부터 인공과 그 연합 세력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유일한 존재 이유였음이 드러났다. 인공을 비판한 주요 논거는 전후 한국의 분열을 야기했고, 다른 이들이 정당한 소유권을 빼앗았으며, 공산주의자와 친일파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민당의 지상 목표는 건준과 인공 그리고 그것을 계승한 단체를 뒤엎어버리는 것이었다.

한민당의 정강과 계획은 세계평화와 민족 문화 증진, 국민 기본 생활의 확보,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과 관련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일반론으로 구성됐다. 이런 모호하고 아리송한 의제를 설정한 까닭은 지주제를 유지하고 개인이 산업을 소유하며 대일 협력자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만 처벌하고 일제 치하에서 영향력을 지녔던 한국인이 계속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은 1945년 한국에서 지지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45년 시점에서 한민당은 지지 기반을 만들고 유권자를 포섭하는 과정에 무지한 사회적 저명인사들의 모임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정치는 조선 후기와 연결됐다. 내용은 그대로 두고 구조만 변화시켜 국가 관료 조직을 이용한 옛 조선의 제도를 따라 계급적 특권을 보호하면서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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