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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트러블 - 주요개념들, 옮긴이 해제(16.10.30).hwp

화니짱.

1. 버틀러의 주요 개념들.

1) 사법적 모델 : 인류학이나 정신분석에서 인간 문명의 기원점으로 꼽는 금기나 금지는 사실 금지해야 할 어떤 욕망이 이미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푸코나 버틀러가 말하는 사법적 모델, 법적 모델은 그런 욕망이 있다고 이미 전제하고 조작해둔 것이 법이나 권력이라는 설명모델을 의미한다.

 

2) 생산적인 권력 : 권력은 주로 억압적이라고만 말해져왔지만, 푸코나 버틀러에게 권력은 억압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법에 대한 복종 행위를 통해 법은 스스로 자가증식하면서 개인에게 내면화되기 때문에 법 자체가 생산적이다. 같은 맥락에서 법은 그 반복 복종을 통해 언제나 조금씩 다른 의미로 재형성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내적 전복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역담론’이 발생할 수도 있다.

 

3) 기술적(descriptive) : 규범적(regulator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지배적 제도 규범의 권력효과가 행사되기 이전의 중립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말한다. 버틀러는 ‘기술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정체성이 ‘규범적’이기 때문에 권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4) 남성적 의미화 경제 : 이리가레는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의미화 경제는 남성적인 것이므로 여성만의 대안적 체제, 즉 여성 상상계나 여성적 상징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버틀러는 이 논의 자체가 여성적이라는 관념을 본질화한다는 관점에서 이리가레의 대안적 상상계나 상징계 논의에 비판적이다.

 

5) 드래그(drag) : 드래그는 헤테로섹슈얼인 경우도 많으므로 반드시 호모섹슈얼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범주에서 볼 때는 드래그도 트랜스젠더의 범주에 들어간다. 광의의 트랜스젠더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옷만 바꿔입은 트랜스베스타이트(드래그), 심리적인 동일시도 수반되는 (협의의) 트랜스젠더, 의학적 수술을 통해 몸도 이성으로 전환된 트랜스섹슈얼이 그것이다.

 

6) 수행성(performativity) : 버틀러는 배역 뒤의 배우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연기보다 연행성(퍼포먼스보다는 퍼포머티비티)를 주장한다. 퍼포머티비티는 연극적 행위라는 의미도 있지만 언어학에서 행동을 유발하는 언어를 뜻하는 수행문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수행성으로 옮겼다.

 

7)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 원래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실행이 발생되는 근원적 욕망으로 설명되었다. 이런 전통적인 구분법에 버틀러는 저항하면서 몸의 ‘인식성’과 욕망의 ‘근원성’을 만드는 것도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양식이기 때문에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젠더라고 주장한다. 셋 다 사회적 구성물이고 제도 담론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8) 우연적인 인식 가능성/우연성 : 예컨대 몸이라는 물질에 대해서도 그 물질에 대한 인식성이나 인식 가능성 자체가 몸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때문에 몸과 몸에 대한 인식성은 선후관계라는 시차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성은 역사적으로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배 담론과 제도 규범에 따라 가변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필연적 본질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토대 위에 있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버틀러는 성이라는 것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토대 위에 일시적으로 구성되고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9) 우울증 :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거두어 일정 기간 애도의 시간을 갖다가 사랑의 대상을 옮겨야 한다. 그런데 우울증의 경우에는 다른 대상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하다. 상실한 대상이 무의식적인 것이라서 무엇을 상실했는지 모르며, 따라서 극복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우울증 환자는 이 대상을 자아의 일부로 합체(incorporation)한다. 따라서 우울증은 사랑했던 대상이 내가 되는, 즉 나와 대상 간의 분명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10) 재현(representation) : 버틀러는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안정된 재현 대상을 페미니즘 정치성의 정치 주체로 삼아왔는데, 실은 그렇게 재현된 여성이 계급, 민족, 인종, 식민 경험, 성 경향이라는 다양한 내부의 차이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페미니즘의 정치 주체는 단순히 희생자나 피억압자로 재현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여성은 여성이라는 범주로 재현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내부적 차이들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젠더의 표현물이 곧 젠더이지, 젠더 표현물 뒤에 젠더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행위 뒤에 행위자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젠더 구현의 구체적 재현 양상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젠더의 본질과 같다는 의미이다.

11) 패러디(parody) : 원본이라는 관념 자체가 원래 당연하게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제도와 규범이 만든 이차적 구성물로서의 이상성에 불과하다면 모방본은 원본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으로 가정되는 이상적 관념을 모방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원본과 모방본의 구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버틀러가 말하는 젠더 패러디의 역설이다. 버틀러에게 젠더는 그 자체가 원본을 가정하지 않는 모방본이라는 의미에서 패러디와 같은 것이다.

 

2.옮긴이 해제

“따라서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13)

버틀러는 ‘행위 뒤에 행위자는 없다’는 니체의 논의를 끌고 와 ‘젠더의 표현물 뒤에 본질로서의 젠더는 없다’라고 말했는데 여성 주체가 없는 페미니즘이 어떻게 가능할까? (14) ‘범주’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 비판적 인식은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면서, 실천을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역사가 보인 정체성의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기도 하다.(16) ‘정체성의 정치학’은 정치적 행위의 실천 주체,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범주’로서의 여성에 대한 버틀러의 비판의 중심에 있다. 페미니즘에서 정체성이나 주체의 문제는 ‘정치성’과 ‘재현’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이다. 우선 정치성은 권력의 이중적 기능, 즉 사법적 기능과 생산적 기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권력이 정당함과 부당함을 이분화하며 부당함을 처벌하고 훈육한다는 의미의 사법적 기능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만, 권력이 어떤 개념의 인식 가능성 자체를 통제해 인식 가능한 주체를 생산하고 인식 불가능한 주체는 비체화한다는 사실은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정치학의 사법적 주체들은 보이지 않는 어떤 배타적 실천을 통해서 생산된다. 담론의 구성물을 근본적 전제로 조작하기 위해서다. 이런 은폐된 진리 게임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연구방식이 계보학이다. (17) 그리고 버틀러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범주’로서의 여성 주체에 전제된 보편성과 통일성은 또 다른 폭력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경계 대상이다. 따라서 비정체성의 정치학, 페미니즘 계보학을 위해서 버틀러는 세 가지 논제에 역점을 둔다. 첫째는 섹스와 젠더의 구분을 허무는 것이고, 둘째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을 전도하는 것이며, 마지막은 이 모든 생산 권력의 기저에 있는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밝히는 것이다. (18) 버틀러에 따르면, 젠더가 사회적 인공물인 만큼 섹스나 섹슈얼리티도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문화적으로 구성된 성/본능적인 욕망이나 충동이라는 구분은 제도 권력의 규율 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20) 젠더는 고정될 수 없어 언제나 자유롭게 부표하는 인공물이 된다. 젠더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인 것이다.

그러나 보편 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 주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성은 정치적 사안이 있을 때마다 우연적 토대 위에서 잠정적 일시성으로 소환되었다가 다시 흩어진다.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경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 전환적 여성 주체나, 역사적으로 특수한 계기로서의 체현은 정황적이고 파편적인 우연적 토대 위의 보편성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보편성을 무대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1)

알튀세르에게 주체는 이데올로기가 호명할 때 그에 응답함으로써 탄생하는 것이라면, 버틀러의 주체는 그 호명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잉여 부분을 남김으로써 완전한 복종도, 완전한 저항도 아닌 복종을 하는 것이다. 푸코의 역담론처럼 법의 호명 앞에 완전히 복종하지 않고 남은 이 잔여물은 잉여로써 완전한 총체적 일원체계를 위협하는 전복력을 갖게 된다. (27)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호명은 법의 무의식이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정체성의 침해를 통해서만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이는 재의미화의 가능성들이 새로운 주체의 재형성에 성공할 수 있어야만 복종에 대한 열정적 집착을 새롭게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28)

어떤 이론도 그 자체로 완전하거나 해방적인 것은 없으며, 억압적이었던 것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또다른 정치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방적 이상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것은 언제나 또다른 권력집단의 정치적 관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영영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는 혼란한 세계 속에서 지배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안에 있는 주체가 오로지 반복된 실천을 통해 기존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버틀러의 저항의 정치성이다.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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