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전사연 171213 (수) / 혁명론 - 한나 아렌트 / 6장-1, 2 / 마스터한



 6장 혁명 전통과 상실된 보고


 1. 앞서 아렌트는 미국 혁명의 과정이 공적 자유의 추구라는 점에서 프랑스 혁명에 비해 많은 교훈을 남겼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유산이 망각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렌트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이런 “기억 상실”은 혁명 이후의 사상을 정립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은 개념적 사유를 혐오하고 철학에 무관심했다. 개념적 사유의 틀로 압축되고 정제되지 않은 미국 혁명의 기억은 유지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한편 유럽의 사상가들도 프랑스 혁명에만 이론적 관심과 개념적 사유를 집중시켰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파멸적 종말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전세계적으로 혁명의 모델이 되었다. 

 사유와 기억의 부족으로 혁명의 정신은 상실되었다. 미국과 프랑스 모두에서 혁명의 원리는 공적 자유, 공적 행복, 공공 정신 등이었다. 그러나 혁명 정신이 잊히면서 미국에는 시민적 자유, 최대 다수의 최대 복지, 여론 같은 것들이 남았다. 이것은 정치적이었던 원리가 사회적 가치로 바뀐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서는 이런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빈곤, 즉 사회 문제가 너무나 절박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정치체의 건설보다는 행복을 성취하기 위한 폭력으로서의 테러로 전개되었다. 여기서도 혁명의 고유한 정신들은 질식되었다. 

 아렌트는 혁명 정신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구조의 안정성과 지속성에 대한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각이다. 오늘날 이 두 가지 정신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쌍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그러나 건국 행위에서 이 두 가지는 배타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두 가지가 분리되고 이데올로기로 고착화되고 대립되는 것은 혁명이 종결된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상실된 혁명 정신을 다시 포착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용어에서는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들을 유의미하게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아렌트는 혁명 이전의 정치사상을 재검토하며, 근대 초기 사상가들에게 있어 “영원히 지속되는 안정된 체제”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밝힌다. 공화주의적 정부 형태는 평등주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주의 정부를 혐오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또한 그 평등주의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불안정성(시민들의 변덕, 공공 정신 결핍, 여론과 대중 정서에 휩쓸리는 경향) 때문이었다. 이런 논의에서는 만장일치라고 주장되는 ‘여론’의 지배와 의견의 자유 사이의 대립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즉, “모든 의견이 동일해지는 곳에서는 의견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건국 선조들은 여론에 기반을 둔 민주정을 새롭게 유행하는 전제정의 형태로 간주하였다. 이런 체제는 공공 정신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정념에 휩쓸리는 불안정한 정부형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상원은 여론에 의한 지배, 민주주의에 대해 방어하기 위한 제도였다. 상원은 이익의 ‘다수성’을 대변하는 하원과 구별되는 의견의 ‘다양성’을 매개하는 기관이었다. 이익과는 달리 의견은 철저히 개개인에 귀속되기 때문에 무한히 다양하고, 그것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집중되기 때문에 선택된 사람들의 모임에서만 조정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의견들을 거를 매개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 정서를 획일적인 ‘공개된 의견’으로 주조할 강자를 필요로 했다. 여론의 무제약적인 지배와 조응하는 제도는 국민투표였는데, 이는 모든 의견의 파멸이라는 점에서 정부를 선정하고 통제할 시민의 권리에 종지부를 찍는 제도였다.

 상원이 의견을 형성하는 지속적인 제도였다면, 대법원은 판단을 창출하는 지속적인 제도였다. 이는 정치적 삶의 모든 요소를 ‘지속적인 제도’로 안정화하려는 욕구에서 비롯한 제도적 장치들이었다. ‘영구적인 상태’에 대한 근대 초기의 애착을 보여주는 이들 제도들은 정치체의 가장 ‘보수적인’ 요소들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렌트는 이런 제도들이 혁명 기간 중에 명백해진 정신을 보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2. 아렌트는 혁명정신이 보존되지 못했던 원인을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모순에서 찾고 있다. 혁명의 목적은 건국이다. 그런데 혁명 정신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는 정신일 뿐만 아니라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것을 시작하려는 정신이기도 하다. 따라서 “새로운” 업적을 실현하도록 부추기는 “지속적인” 제도는 저절로 붕괴된다. 이 장에서 아렌트는 제퍼슨과 로베스피에르의 사례를 통해 이 모순이 어떤 방식으로 타협되어 갔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미국혁명 초기에 제퍼슨은 혁명정신의 보존을 위해서 헌법에 반대하고 반란과 혁명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폭력이 자유를 위한 공간을 파괴하는 프랑스 혁명의 파국에서 교훈을 얻은 그는 건국 행위를 “반란과 해체”에서 “건설과 증강”을 위한 노력으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제퍼슨은 세대가 바뀔 때 정기적으로 헌법을 수정함으로 새로운 세대가 자신의 정부 형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준비를 헌법 자체에 마련하자고 제안하였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퍼슨이 지적한 문제는, 혁명이 국민에게 자유를 제공하지만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은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추상적인 정치체계가 구체적 기관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국민 자신이 아닌 국민의 대표자들만이 “자유 행위”에 참여할 기회를 가졌다. 

 이런 맥락에서 “대표성”은 근대 정치의 가장 중요하고 난해한 쟁점이 되었다. 대표자들은 인민들의 직접 행동에 대한 대체물, 즉 “고객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문가들”로 이해될 수도 있었고, 대중적으로 통제된 지배, 즉 “제한된 기간에 자신들을 선출한 사람들에게서 위임을 받은 통치자”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전자에 의하면 정부는 단순한 관리가 되고, 공공영역은 소멸된다. 후자에 의하면 혁명이 폐지하려 했던 통치자와 피치자의 구분이 다시 발생하고 국민은 공공영역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무기력 상태’에 빠지거나, 자신들이 가진 유일한 권력이 혁명의 예비 권력이기 때문에 모든 정부에 대해 저항 정신을 가지게 된다.

 아렌트는 혁명 이전에 정치 행위의 실제 근원이었던 읍 및 읍민회관을 헌법에 수용하지 못했던 것이 미국 혁명의 중대한 오류였다고 지적한다. 반면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자치적인 대중 조직체들(섹션, 파리코뮌, 클럽, 민중협회 등)이 혁명 이전이 아니라 혁명의 결과로 구성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클럽과 협회들을 헌법의 진정한 기둥이라고 주장하며 의회의 박해에 맞서서 이들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집권한 후에는 협회들을 거부하였고, 단 하나의 “전체 프랑스 국민의 위대한 민중협회”, 실제로는 하원으로 대표되는 분리 불가능한 권력만을 인정하였다.  이런 태도 변화는 생쥐스트 등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생쥐스트와 자코뱅 정부는 권력을 잡자마자 협회들에 등을 돌리고 섹션들을 정부 기구와 테러 기구로 변형시켰다. 그리고 인민의 자유는 사적인 삶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정부의 강제력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민중협회에 공화주의와 애국주의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하였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정부와 국민, 대표자와 피대표자들의 갈등이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갈등으로 바뀐 결과였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은 기본적으로 의지는 대표될 수 없고, 대변자를 가진 인민은 자유롭지 못하다고 믿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차이와 구별의 제거를 통해 “성스러운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루소의 가르침을 이용하기도 했다. 아렌트는 공동체 운동과 혁명 정부 사이의 갈등을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거리의 사람들과 정치체 사이의 갈등”이며 둘째는 “인민과 집중화된 권력기구 사이의 갈등”이다. 아렌트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두 번째 유형의 갈등이다. 권력기구는 국민의 주권을 대표한다면서 인민의 권력을 박탈하고 자발적인 권력기구들을 박해했다. 

 자코뱅 정부와 혁명 결사들 사이의 갈등은 세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첫째, 공화국이 상퀼로트의 압력에 대항해 벌이는 생존투쟁, 둘째, 협회들의 공공 정신에 대항해 절대권력을 확보하려는 자코뱅파의 투쟁, 셋째, 연방 원리의 권력의 분리, 분할에 대항하는 국민국가의 투쟁. 섹션과 협회에서는 논쟁, 교육, 상호 계몽, 의견 교환 등에 대한 욕구가 자라났다. 이런 인민 자신의 자발적 조직화 속에서 유럽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연방 원리”가 나타났지만, 이는 중앙 정부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것은 이들이 실제로 공화국을 위협했기 때문이 아니라, 공권력의 경쟁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절대권력을 지향하는 혁명정부의 견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렌트는 정당 체계 형성 초기에 어떻게 일당 독재가 등장했는지를 밝히고 있다. 협회와 정부 사이의 갈등 중 핵심은 협회들의 비당파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한편 정당 체계의 뿌리가 되었던 정당(파벌)은 의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었다. 자코뱅파 정부는 자코뱅파라는 단 하나의 의회 분파만이 혁명적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다른 민중협회들을 “가짜 협회”라고 선언해버렸다. 그런 점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프랑스 국민 전체를 거대한 단일 당기구로 조직하려는 시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기구는 토론과 의견의 교환, 상호 교육, 공공 업무에 대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상호 감시와 비난을 위한 제도가 되었다. 이것은 소비에트 체제에서 볼셰비키 당이 했던 일과 마찬가지였다. 

 근대 정치에서 정당체제가 성공하고 평의회 체계가 실패한 것은 모두 국민국가의 형성 때문이었다. 좌파 정당과 혁명 정당은 보수당이나 반동적 우파 정당 못지않게 평의회 체계에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두 체계 간의 갈등은 실제로는 정당 체계의 근원인 의회와 권력을 대표자에게 양도한 국민 사이의 갈등이었다. 그 결과 자코뱅의 공포 시대는 사회적 유대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국민의회 내의 분파 투쟁에서 자코뱅이 패배했을 때에도 파리의 섹션들은 그들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