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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과 리비도>

 

-자기고백(?)에서부터 시작함.

욕망은, 육체의 모든 쾌감 중에서 제일 으뜸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쾌감을 이끌어 가기 위해, 영혼의 정념과 육체적 욕구를 결합하고 혼합하면서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뒤흔들 정도의 충격을 준다. 그 결과로 쾌감이 절정에 이르면 모든 예민한 감각과 긴장된 생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은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 -476

성행위가 육제적으로건 정신적으로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신체적 사건’” -477

 

-성에 관한 양자택일식 논법

1. 성행위가 완전한 창조와 모순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2. 이런 수치스러운 약점을 본래 인류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것

 

-율리아누스의 윤리적 분할점 만들기.

창조주의 작품이기 때문에 욕구는 죄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욕구는 인간의 의지에 속하는 것이 될고, 인간의 의지가 정해진 규범 같은 걸 따르게 되면 무죄다. 결국 죄를 지을 때는 무절제한 관계를 가졌을 때=의지가 불량할 때.

 

-펠라기우스파와 논쟁.

 

-아우구스티누스의 천국에서의 성관계 4가지 유형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인간

욕망을 억제하고 적절한 시기가 될 때까지 욕망과 싸우는 인간

필요할 때 의지에 따라 지혜로운 예측에 의해 성관계에 이르고, 이러한 관계에 따르는 욕망-리비도를 생기게 하는 인간

리비도 제로. 신체기관들을 쉽게 의지의 명령에 복종시키는 인간

 

-아우구스티누스는 3번만 단지 양보할 수 있는 유형으로만 인정.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진 리비도가 배제된 행위로 특별히 정의. 리비도가 없는 성관계. “천국에서의 성기는 손가락을 사용하는 방식으로도 순응해서 움직였고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485

 

-아우구스티누스. 상관관계를 갖는 자기와 자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복종과 지배의 관계가 어떻게 변경되어 나타난 것인지=주체의 구조를 통해 의지가 육체의 물질성에 도달하는 변화.

하나님은 불복정의 결과가 죄와 인간의 힘과 구원의 가능성에 맞추어서 완전하면서도 정확하게 조정될 수 있기를 원했다. 하느님은 자기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인간의 불복종이 계속 재현될 수 있게 했다.” 타락한 인간=이중화되고 자기배반적이고 원하는 것을 놓쳐 버린 인간. 487,8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에서의 성 해석

타락이후 성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남녀. 단순한 순진성의 상실이 아닌 물질적 현실을 새롭게 발견한 일. ‘짐승들의 교미’. 신체기관들의 법칙이 정신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음. 계율을 위반한 결과. 무의지적 변화. 가시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발기. -488~492

성기는 불복종의 표지로, 시선의 주의를 받으면서 솟아오른다’”-491. 발기 자체가 신에 대한 반항이란 말인데...황당하다. 어쨌든 그리하여,

반역적인 영혼에 대항하여 육체의 발기와 그들의 알몸을 가려야 했던 반항의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그들은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음을 자각하는 상태에서 최초의 죽음을 의식하게 되었다.-493” 무의지적 욕망=영적 죽음.

 

-‘리비도의 등장 by 아우구스티누스

무의지적 욕망의 형태와 힘. 성행위의 통치(government)” 가능성.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부수적인 요소일 뿐. 독립적인 것.

 

-푸코의 비난 & 맹비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이러한 성적 변화와 그 움직임들을 끌고 가는 힘이 절대로 성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도, 무의지적인 것의 형태를 분리시켜 보려 한다......(중략)......이러한 분리는 반대로 의지를 초월하게 되어 현실적으로는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리비도는 주체와 무관한 본성에 속하는 것,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인가? 리비도는 주체 밖에서의 일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인가? 리비도가 (독립된) 본성이라면 어떻게 하느님께 그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지 않는가?” -496~498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책임 떠넘기기작업

육욕의 원칙과 육욕을 관통하는 무의지적인 것의 출발점을 영혼에 설정하기 시작. 나쁜 의지가 육욕보다 앞선 것이 아니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원칙 환기.

 

-푸코의 의문: 어떻게 자유로운 영혼의 의도적인 죄가 하느님이 본성을 결정한 육체 속에서 무의지적 움직임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 무의지적인 육욕이 주체와 대립하기 때문에 주체를 낮은 곳으로 이끌어 가는 본성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의지와 정반대로 가길 원하게 되는 주체의 결핍된 존재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결핍이 엿보였다. 방탕했던 시절, 그의 결핍은 무엇이었을까? ‘분열이라는 표현도 자기고백적으로 들린다.)

자기 자신과 대립함으로서 원하는 자유를 얻기는커녕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 위에 군림하는 존재의 명령에 복종하는 힘겨운 생활을 하면서 비참한 예속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그는 본의 아니게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501

의지적인 것, 무의지적인 것의 분할선은 영혼과 육체 사이에 놓이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 내부에(분열되어) 놓여있다. 동물과 비교하자면, 인간의 육욕이 동물과 유사성을 갖고 있더라도 절대로 정신과 대립된 행동을 하지 않는동물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분열이나 반항, 타락의 결과이다.

우리의 의지가 육욕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육욕이 독립적이기를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하고, 또한 은총의 힘에 의지해서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하다.”-504

 

-“의지가 의지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유죄의 책임을 질 수 있을까?” -504

반 펠라기우스파의 논설들. 대국적 논쟁들. 의지가 죄가 아니라면, 육욕에서 발생한 일이자 본성의 결과에 불과한 것을 어떻게 의지의 죄라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의 도식: 육욕은 원죄의 실제적 원인이 아니라 결과일 뿐. 그러면서도 최초의 결정적 잘못으로 인해 지워지지 않는 결과와 늘 새롭게 되풀이되는 원인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성욕이 없어지는 날은 죽음같은 육체에서 해방되는 시간의 종말에 이르렀을 때 뿐이다...-506,7

 

-세례의 효과

세례를 받은 후에 육욕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주체 속에서 작동하지 않는 죄로 간주되지 않을 수 있다. -509

 

-그런데도 여전히 그것을 죄라고 부르는 이유 -510

그것이 근원이 죄이고

의기양양해서 죄를 짓기 때문

 

신체에 가해진 상처는 신체의 기관들을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게 하거나, 그것들의 움직임을 어렵게 만든다......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상처는 인간이 정의롭게 산다는 의미에서 삶에 대한 상처를 가리킨다.” -510

 

-“부모의 병적인 성향이 어떻게 보면 성행위에 의해 전달되어 자녀들의 신체에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주 있는 일이다” -511

 

-동시대 카시아누스와의 다른 점. -516,7

카시나누스는 보다 간결하다. 욕망(=육욕)은 의지와 서로 다른 양상으로 작용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육욕은 의지의 형태에 속함. 의지 그 자체에 대한-의지의 대상보다 의지의 형태에 대한-의지의 행위. “의지는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동의의 문제에 대한 둘의 차이가 발생.

 

-그리하여 만들어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용법’ -518

성행위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의지의 형식이다

성적 행동은 부부 사이에서도규범화된다. “성행위의 전개과정을 소단위로 나누어 경비망을 펴듯이, 어떤 조건과 어떤 시기에 허용될 수 있고 금지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본 방침으로 작용한다.” 523

그것은 회절이 계속 남아있다는 식으로, 그리고 분해가 가능할 것 같은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육욕의 주체에 대한 분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논리는 이렇게 재구성된다.”-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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