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모스 저작집 서문 - 레비스트로스 / 해설 / 24.02.14 / 노그래
해설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찾아서 (p.87-90)
그 자체 독자적 의의와 논쟁사를 지닌 텍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이들은 서문을 일종의 ‘구조주의 선언문’으로 받아들인다. 모스 사상의 정수가 레비스트로스 사상의 마중물로 변환되는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뒤르켐으로부터 모스에게로 (p.91-96)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뒤르켐의 사회학은 구조주의에 도달할 수 없었던 반면, 모스의 저작 곳곳에는 구조주의를 시사하는 단서들이 존재한다.
뒤르켐은 사회적 사실을 ‘사물’처럼, 즉 인간 정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경험적 대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는데 그침으로써, 개인 심리에 외재하는 사회적 사실이 어떻게 역으로 개인 심리에 규범으로 내면화되느냐는 곤란한 문제에 부딪힌다.
모스는 현대심리학의 반향에 더 귀 기울였으며 두 학문(사회학과 심리학)을 연결하는 다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상징체계와 상징적 사고, 무의식에 호소하는 것은 20세기 초 막 대두했던 학문의 현대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상징체계와 개인/집단: 모스 사유의 모더니티 (p.97-103)
여기서 핵심이 되는 테제는 상징체계의 매개가 보장하는 개인의 심적 과정과 사회구조 사이의 상호 보충성이다.
신체에는 사회적인 것을 수용하고 그것을 특유의 생리적 상태에 맞춰 표현하는 ‘상징적 모공’이 존재한다.
몸은 그 자체 상징적인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사회적인 것과 교차한다. 사회적-심리적-생리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로 인도한다.
상징체계를 생리적∙심리적 차원에 걸처 작용하는 사회적 가치의 원리로 생각해보면, 그는 상징체계의 작동으로 질서 지어진 세계에 포섭되어 있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 (p. 104-109)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에게 기대어 상징체계를 출발점으로 설정해 집단과 개인의 관계가 인과적이기보다는 상보적임을 논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상징체계를 인간 삶의 극복 불가능한 지평으로 명백히 자리매김한다.
상징체계는 한편으로 언어에 의해 대표되며, 다른 한편으로는(친족체계, 동식물의 분류체계, 신화, 의례 등과 같은) 언어적인 것들로서 존재한다.
한편 상징체계와 사회생활은 특권적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인 것은 상징체계에 통합된 사물의 성격뿐문 아니라 상징체계의 ‘체계화’가 이뤄지는 과정 자체도 가리킨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 즉 사회적-심리적-생리적인 것의 만남과 종합은 오직 구체적이고 평범한 개인 ‘안에서만’ 이뤄진다. 총체적 사실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것으로서 ‘존재’하지만, 반드시 구체적 체험의 주관성을 경유해야만 ‘인식’될 수 있다. 총체적 사실은 오직 “심리적인 것 내부에서 이뤄지는 종합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심리적인 것만이 “실재를 검증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객관과 주관의 분리 불가능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실제의 객관성을 그것을 몸소 겪는 인간의 주관성 안에서 되살려내는 일이 요구된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은 당연히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즉 하나의 사물처럼 외부에서 파악하되, 그것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이해까지도 이미 포함하고 있는 사물로서 파악해야 한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 (p.110-114)
일단 관찰자의 의식과 해석이 관찰 대상의 완전한 실재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고 출발해야 한다. 관찰대상과 관찰자는 다른 주체이고 서로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
제삼의 이해가 어떤 식으로든 가능해야 한다. 이 가능성은 인류학의 존재 자체에서 찾아질 수 밖에 없다.
자기/타자를 구분하는 개별 인간 집단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수준, ‘인간으로서 우리’의 수준으로 주체를 끌어 올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집단적 소속의 낙인이 찍힌 주관적 이해들은 인류학을 통해 인간으로서 우리의 주관성 안에 재통합될 수 있다.
무의식 또는 상징적 사고 (p.115-122)
인류학이 목표하는 이해는 주관성을 폐기하지 않는 객관적 이해이다.
주관성의 다른 차원,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공통된 ‘가장 보편적 주관성’, 의식이 미치지 않는 가장 ‘내밀한 주관성’으로 눈을 돌린다(무의식).
무의식은 주관성의 객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문제 해결의 열쇠”이자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을 동시대의 사회과학으로부터 갈라놓는 주요 논점 가운데 하나이다.
무의식은 이런저런 집단에 특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기에, 자기와 타인 사이의 대립은 그 안에서 사라진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상징체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연구로 정립시키고자 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커뮤니케이션은 상징체계의 ‘일’이며, 무의식은 이 일을 관장하는 법칙이 자리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무의식은 우리 외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상징체계의 차원을 가리킨다. 상징체계가 우리를 통해 사고(작동)한다. 상징체계의 정신이 곧 “인간의로서 우리”의 정신이다.
교환(=커뮤니케이션)과 호혜성 (p.123-130)
모스의 증여론 - 레비스트로스는 이 작품에서 경험적 관찰을 넘어 더 근원적 실재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고 평가
『서문』에서 개진된 레비스트로스의 반론은 교환을 요소들의 합성물(모스의 해석)이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의무들이 아니라
교환 자체를 "근원적 현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를 때 "교환은 상징적 사고에 즉각 주어징 종합이자 상징적 사고를 통해 주어지는 종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교환과 커뮤니케이션을 동일시하는 입장을 여러 곳에서 피력한다.
상징체계의 작동을 커뮤니케이션(=교환)으로 볼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징체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대립과 상관관계로 연결된 항들, 역으로 말하자면 항들 간의 대립과 상관관계들이 상징체계를 구성한다.
이 같은 대립·상관관계들의 확립과 재조정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으므로 커뮤니케이션은 상징체계의 작동이다.
상징체계는 곧 커뮤니케이션 체계, 커뮤니케이션을 조직하는 체계이자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조직되는 체계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교환(=커뮤니케이션)에 "근원적 현상"이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상징체계의 작동인 교환(=커뮤니케이션)은 사회생활 속에서
전면적으로, 총체적으로 전개된다. "총체적 현상인 교환은 우선 총체적 교환, 즉 음식과 제작물, 또 가장 값진 재화의 범주인 여자를 포함하는 교환이다."
논의의 지평이 상징체계에서 사회생활로 넘어가는 이 지점에서 무언가를 받았으면 상응하는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호혜성의 개념이 도입된다.
호혜성과 상징체계의 작동인 교환은 사회생활의 근본 조건이자 요구로 변모한다.
부유하는 기표 (p. 131-135)
레비스트로스가 견지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현상은 상징체계를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앞서 언급한 원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마나에 집중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다. 상징적 사고는 보편적인 것이므로, 마나 역시 ‘원시인’에게 특유한 것이 아니라 어떤 “보편적이고 항구적인 사고형태”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언어의 출현과 함께 “아무것도 의미가 없는 단계에서 모든 것이 의미를 갖는 단계로의 이행이 일어났으며, 따라서 모든 사물은 상징체계에 포섭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인식되었다는 말은 아니므로 불가해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마나는 특정 기의에 결박되지 않은 채 상징의 바다를 떠다니면서 의미의 결여를 막아주는 “부유하는 기표”이다.
상징체계는 총체적이어야 하며, 마나∙하우와 같은 부유하는 기표는 이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상징체계의 ‘truc(묘수)’이다. 마나는 상징체계의 중단 없는 작동이 필요로 하는 “의미론적 기능의 의식적 표현”이다.
의문들 (p.136-146)
모든 것은 교환이다. 사회생활의 내용은 교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동물적 삶과 구별되는 인간의 사회적 삶이 시작된 것도 교환과 함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증여를 교환의 일종으로 보는데, 교환의 보편주의가 가진 애매함이 있다.
커뮤니케이션이 곧 교환이고, 교환은 사회생활의 모든 것이라는 식의 무차별성에 만족하는 대신 커뮤니케이션의 여러 양식들을 구별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증여와 대비되는 교환에서는 사물들의 상대적 가치가 커뮤니케이션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환에 앞서 가격을 비교하거나 흥정에 나선다. 반면 교환과 대비되는 증여는 사람들의 상대적 가치를 커뮤니케이션한다.
결국 비판의 핵심은 레비스트로스가 ‘커뮤니케이션의 일반 이론’을 향해 너무 서둘러 달려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가 기대하는 상징체계의 이론은 호혜성이라는 ‘모든 것의 원리’에 만족하는 대신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양식들을 식별하고 차례차례 분석해 나가면서 각각에 특유한 절차와 고유한 합리성을 찾아낼 것이다.
구조주의적 방법과 인류학적 관찰 (p.147-155)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라는 탐구 방법의 정당성을 모스의 저작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해석”을 통해 확보하고자 한다.
레비스트로스를 구조주의로 이끈 것은 ‘구조언어학’이었으며, 레비스트로스의 기획은 음소들의 대립관계에 의해 구조화된 체계라는 아이디어와 그에 연동하는 방법론적 전략을 소리나 단어보다 상위 수준의 언어적(=사회적) 실재에 적용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연구가 겨냥하는 것은 이런 저런 집단에 국한된 친족 현상들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관철되는 친족체계의 구조와 그 변이들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하나의 신화를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개개의 신화는 체계에 통합된다는 조건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신화체계는 차이들 사이에 감지된 논리적 관계를 커뮤니케이션하며, 바로 이 관계가 신화들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체계의 커뮤니케이션은 “신화들끼리 서로 사고”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상징의 사회적 기원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규명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진술이 『서문』 전체를 요약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회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과정과 질서, 현상은 모두 상징체계를 통해서만 출현하고 존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