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발제문/페미니즘&Queer

젠더 트러블 / 개정판 서문 / 서문 / 161030 / 호섭이

hoseob 2016. 11. 5. 10:48

개정판 서문(1999)

10년 전 이 원고를 쓰면서 나는 나 자신이 특정한 형식의 페미니즘에 적대적이거나 호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당시 나는 페미니즘 문학 이론에 널리 확산되어 있던 이성애적 가정을 비판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젠더의 의미를 남성성/여성성이라는 기존 개념으로 한정짓는 관점을 반박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한 관점의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안에 배타적 젠더 규범을 설정하므로, 그것이 때로 호모포비아를 낳는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즉 나는 페미니즘이 새로운 위계와 배제 형식을 만들어 내는 특정 젠더의 표현물을 이상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보았다. 특정 종류의 젠더 표현물은 거짓과 변종이며, 진짜와 원본은 다른 데 있다는 식의 진리체계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젠더 트러블』의 요점은 독자들에게 새롭게 젠더화된 삶의 방식의 모델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젠더 가능성’이라는 장을 열고자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다. 
이 책에서 나는 ‘젠더화된 삶에서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 자체가 습관적이고 폭력적인 전제로 인해 배제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했다. 여기에는 소수자 젠더와 섹스의 실천을 불법적으로 낙인찍는 시도들의 뿌리를 파헤치는 것도 포함된다. 우리가 새로운 결론에 도달하기에 앞서 소수자의 실천 행위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이런 실천들을 대면했을 때의 당혹감을 토대로 그들을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방식들이다. 젠더 이분법의 붕괴는 그처럼 쇼킹하고 공포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젠더를 생각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명백히 배제되어야 할까? 이러한 경향에 저항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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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제 중 몇 가지는 ‘프랑스 페미니즘’에서 빌려 온 것이다. 후기구조주의가 때로 사회적 맥락이나 정치적 목적과 동떨어진 형식주의를 낳아 왔다 해도, 최근 미국에서의 전유는 그렇지 않다. 내 논지의 요점은 후기구조주의를 페미니즘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들을 페미니즘으로 재공식화하는 것이다.
후기구조주의를 일의적이고 순수하며 단일한 무엇이라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 후기구조주의 이론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연구, 탈식민주의와 민족 연구로 이동함으로써 기존의 형식주의를 버리고 문화 이론 영역 안에서 새롭게 변모했다. 이론은 필시 불순한 거처를 갖게 되고, 그곳에서 사건으로서  문화적 번역이 된다. 이는 역사주의로 이론을 치환하는 것도, 이론을 단순히 역사화하는 것도 아니다. 외려 그것은 문화적 지평들이 만나는 현장에서 이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편, 『젠더 트러블』은 ‘프랑스 이론’에 기초해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이론 자원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젠더의 특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쟁들,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젠더 및 섹슈얼리티와 친족에 관한 게일 루빈의 작업들, 드래그에 대한 에스더 뉴턴의 최초 연구, 모니크 위티그의 이론서와 소설,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한 인문학적 관점들 등. 이 책은 이들 사이의 오래 연계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은 레즈비언-페미니즘에서야 말로 레즈비어니즘과 페미니즘이 만났다고 가정했지만, 이 책은 레즈비언 실천 행위가 페미니즘 이론을 증명한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이 두 용어 간에 더 큰 문제적 관계를 설정하려 했다. 레즈비어니즘은 일련의 정치적 신념이 성애적으로 완성을 거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 책은 묻는다. 어떻게 비규범적 성의 실천들이 분석 범주로서 젠더의 안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가? 성적 관행이 젠더의 안정성을 위태롭게 한다는 관점은 게일 루빈의 “여성 교환”을 읽으며 얻은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규범적 섹슈얼리티가 규범적 젠더를 강화한다. 지배적인 이성애 틀 안에서 여자의 기능을 해야만 여자라는 것이다. 그 틀을 의심하면 젠더 위치를 잃는다. 바로 이것이 ‘젠더 트러블’의 첫 번째 공식이다. 레즈비언과 게이 부모 되기, 부치/팸 정체성 등을 고려할 때 이것은 더욱더 민감한 문제가 된다. 부치 레즈비언은 언제 왜 ‘아빠’가 되고, 상대편은 언제 왜 ‘엄마’가 되는가? 레즈비언 일부에선 부치가 ‘남자가 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그들의 부치다움이라는 것이 남자라는 선망의 지위로 가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는 성적 관행의 형식이 특정한 젠더를 생산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규범적 이성애의 조건하에서 젠더를 통제하는 것이 때로 이성애를 안정되게 만드는 방법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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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퀴어 이론가들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간의 인과론적 혹은 구조적 연관성을 거부한다. 만약 이러한 구분이, 이성애적 규범성은 젠더를 정렬하지 않아야 하고 또 우리가 그런 정렬화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젠더에는 어떤 성적 규정도 없다는 것은 의미한다면, 이는 예컨대 ‘호모포비아’에 가장 열심히 맞서는 사람들이 정작 호모포비아의 중요한  차원을 인식하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내 작업의 상당 부분은 ‘수행성 이론’을 명시하고 수정하는 데 바쳐졌다. 원래 나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대한 데리다의 독법에서 젠더 수행성을 어떻게 읽을지 그 단초를 얻었다. 어떤 사람이 법을 기다리며 법의 문 앞에 앉아 자신이 기다리는 법에 어떤 힘을 부여하는 것, 권위적인 의미에 노출되리라 기대하는 것, 이것이 역으로 법에 권위가 부여되고 설정되는 수단이 된다. 나는 우리가 젠더에 관해서도 비슷한 기대를 하며 연구하는 게 아닌지 퍽 궁금했다. 젠더가 곧 드러나게 될 어떤 내적 본질로 작동하고 있다는 기대, 젠더가 바로 그 현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여기서 젠더 수행성은 먼저 젠더화된 본질에 대한 기대가 젠더 자신을 외부에 가져다놓게 된다는 메타렙시스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젠더 수행성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반복적이고 의례적 행위로 나타난다. 이 행위는 일부 문화적으로 유지된 시간적 지속성으로 이해되는 동시에 몸의 맥락에서 몸의 자연화를 통해 그 효과를 획득한다. 
젠더가 수행적이라는 관점을 통해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우리가 젠더의 내적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이 일련의 지속적 행동을 통해 만들어지며, 젠더화된 몸의 양식화를 통해 그 위치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내적’ 특성이라 생각하는 것은 특정한 몸의 행위, 극단적으로 말해 그동안 당연시된 제스처의 환각 효과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고 생산해 낸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심리의 ‘내적’ 세계 전부가 양식화된 행위 양식의 효과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내면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이론적 실수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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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참여해 온 사회운동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다. 또 이 책을 쓰기 전 14년간 몸담았던 미국 동부 해안의 레즈비언/게이 커뮤니티의 맥락에 영향을 받았다. 나는 많은 회의와 술자리, 행진에 참여했고, 다양한 종류의 젠더를 만났으며, 나 자신이 그 몇 개의 젠더들의 교차점에 있다고 생각했고, 그 몇 가지 문화의 가장자리에서 섹슈얼리티와 만났다. 나는 성적인 인식과 자유를 위한 의미 있는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하려 애쓰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고, 희망과 내적 불화 양쪽에서 그 운동의 일부가 되어 가면서 기쁨과 절망을 느꼈다. 학계에 편히 몸을 숨기고 있는 동시에 이런 벽 바깥의 삶도 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젠더 트러블』이 계속 학계 밖에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내겐 가장 고마운 일이다. 퀴어네이션이 이 책을 선택했고, 그 중 이 책을 퀴어의 자기 재현에 관한 연극성에 반영한 작품 몇 편이 ‘액트업’ 전술과 공명했다. 또 미국 정신분석학협회와 미국 심리학협회 회원들이 동성애에 관한 현재의 억견 중 몇 가지를 재평가하도록 촉구하는 데 도움을 준 자료에 속하기도 했다. 
역으로 나는 나의 정치적 개입과 관련해 『젠더 트러블』에서의 입장 몇 가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 나는 ‘보편성’을 극히 부정적이고 배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광의의 인권 문제에 관련해 성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게이와레즈비언인권위원회’의 이사회 회원과 회장을 지내면서, ‘보편성’에 비본질적이고 열린 범주로서 중요한 전략적 용례가 있음을 알게 됐다.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은 현실을 불러내고, 서로 만난 적이 없는 문화 지평들의 수렴 가능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수행성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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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의 옹호자와 비판자 모두 이 책의 ‘문체’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문체’라는 것 자체를 복합적인 것으로 본다. 문체나 문법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 지적 화술을 지배하는 법칙을 배운다는 것은 규범화된 언어를 주입당한다는 뜻이다. 상식에는 급진적인 면이 없다. 
문법을 비트는 글 형식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짜증스러울 것이다. 그 형식은 독자에게 더 많은 수고를 요하고, 때로 불쾌감을 준다. 그런데 이 같은 언어적 어려움에는 어떤 파생 가치가 있다. 위티그가 주장했듯 젠더가 문법적 규범을 통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라면, 가장 기초적인 인식 층위에서 젠더의 변화는 젠더 관련 문법에 저항함으로써 일부 이루어질 수 있다. 
나는 자라면서 젠더 규범의 폭력성을 인식해 왔다. 또한 배제당한 삶에 가해지는 폭력성을 보아 왔다. 그것은 ‘삶’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며, 유폐나 중지, 유예된 사형 선고 형태를 띤다. 『젠더 트러블』은 이상적 성 규범의 폭력성에 저항하려는 강한 욕망과, 섹슈얼리티에 관한 학문적 담론의 전제인 ‘이성애’를 근절하려는 욕망을 바탕으로 젠더를 ‘탈자연화’하려고 시도한다. 이 탈자연화 글쓰기의 목적은 단순히 언어와 유희하려는 욕망을 충족하거나 ‘진짜’ 정치의 자리를 연극적 익살극으로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 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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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은 페미니즘 사상의 규범적이거나 규정적인이지 않은 면을 보여 주려 한다. 이때 ‘규범적’이라는 것은 특정 종류의 젠더 이상형이 수행하는 세속적 폭력을 기술하는 표현으로, 나는 이를 “젠더를 지배하는 규범들과 관련된”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런데 이 ‘규범적’이라는 말은 또한 윤리적 정당화와도 연관된다. 이는 젠더가 어떻게 설정되었고 이로써 어떤 구체적 결과가 비롯되는가와 관련 있는 문제로, 『젠더 트러블』에서는 이론적 기술에 바탕을 두고 ‘젠더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우리가 어떻게 판단 내릴 수 있는가’ 하는 화두와 연결된다. 젠더화된 세계는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적 시각이 없이, ‘규범적’ 젠더 형태에 반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의 확정적이고 규범적인 시각이 사실상 “내가 말하는 대로 젠더를 전복하면 삶이 나아질 것이다”라는 식의 규정 형식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나는 비전복적인 것과 전본적인 것을 구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판단은 특정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전복적 수행도 반복을 통해, 특히 시장 가치를 수반하는 상품문화 속에서 죽은 상투어가 될 위험에 놓인다. 전복성의 범주를 명명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실패하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물을 필요가 있다. 인식 가능한 삶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며, 구성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규범적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정은 어떻게 ‘인간’의 자격, ‘살 만한’ 것의 자격을 미리 결정하는가? 규범적 젠더의 가정이 어떻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기술 영역의 경계를 정하는가? 우리가 이런 경계 정하기의 힘을 보게 되는 수단은 무엇이며, 우리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젠더 트러블』에서 젠더의 구성적이고 수행적 차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드래그’는 딱히 전복의 모범 사례는 아니다. 이를 전복 행위의 패러다임 혹은 정치적 행위 주체성의 한 모델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요점은 다른 데 있다. 이 책의 요점은, 드래그를 진정한 모범 젠더의 표현물로 치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젠더 규범(이상적 이분법 형태론, 몸의 이성애적 상보성, 적합하고 부적합한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상과 규칙, 이종잡혼에 반대하는 순수성과 금기의 인종적 코드 등)은 인식 가능한 인간이 무엇인지, 또 ‘실재’로 간주될 것과 간주되지 않을 것은 무엇인지 설정한다. 즉  젠더 규범은 몸을 어떤 주어진 합법적 표현물이 될 수 있게 하는 존재론적 장을 설정하는 기제다. 따라서 『젠더 트러블』의 ‘규범적’ 과제는, 거짓과 비실재, 인식 불가능으로 간주되어 온 몸들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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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간 이 책과 관련해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고, 나는 이에 답을 구해 왔다. 몸의 물질성은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에서 재고되었다. 페미니즘 분석에서 ‘여성들’이라는 범주의 필요성은 “우연적 토대”에서 관점을 수정하고 확장했다. 
또한 나는 ‘나’라는 것이 유효한 언어로 표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언어 안에서 ‘나’의 불투명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젠더 트러블』 출간 이후 점점 더 정신분석학으로 선회하게 만들었다. 권력 이론에서 심리 이론을 분극화하려는 노력은 내게 반생산적인 것으로 보인다. 『권력의 심리적 양상』에서 나는 푸코와 정신분석학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다. 또 행위 주체성 이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수행성에 대한 내 관심이 주의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을 활용하기도 했다. 
때로 『젠더 트러블』은 마치 젠더가 단순한 자가발명품이라거나, 젠더화된 재현물의 심리적 의미를 그 표면에서 직접 알 수 있다고 읽힐 수 있다. 이는 내가 수행성을 언어적으로 이해해야 할지, 연극적으로 생각해야 할지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격분하기 쉬운 말』에서 나는 ‘발화 행위’란 수행되는 동시에 언어관습과의 암묵적 관계를 통해 일련의 결과를 끌어내는 언어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발화는 전적으로 육체적 표현물에 속하지도 언어에 속하지도 않으므로, 말이자 행위로서 그것의 위상은 필연적으로 모호할 수밖에 없다.
만일 지금 『젠더 트러블』을 다시 쓴다면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슈얼리티에 관한 논의, 이상적 젠더 형태의 이분법이 이 두 담론에 작용하는 방식, 이와 관련된 관점이 주장하는 외과수술 개입과 맺는 관계들을 포함시킬 것이다. 또 급진적 섹슈얼리티와 이종잡혼(및 인종 간 성적 교환의 낭만화)에 대한 금기가 어떻게 젠더가 취하는 자연화/탈자연화된 형식의 핵심이 되는지를 다루고 싶다. 
나는 정체성의 단순 범주를 초월해, 양성성의 말살을 거부하고 규제적 몸의 규범이 부과한 폭력에 대항하며 그것을 일소할 성적 소수자들의 연대를 계속 희망한다. 그 연대가 환원 불가능한 섹슈얼리티의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성과 여러 담론적이며 제도적인 권력 역할 안에서 갖는 함의에 바탕하고 있기를 바라며, 그 누구도 성급하게 권력을 위계로 환원하거나 그것을 생산한 정치 차원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란다. 성적 소수자로서의 위상에 대해 인정을 얻는 일이 법과 정치, 그리고 언어를 지배하는 담론에서 어려운 과제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것이 생존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정치화의 목적을 위해 정체성의 범주를 동원하는 것은, 정체성의 가능성 때문에 언제나 그것이 반대하는 권력의 도구가 될 위협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체성을 활용하지 않거나 정체성에 활용당하지 않을 이유는 못 된다. 권력이 순화된 정치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으며, 아마도 그런 불순성이 행위 주체성을 규제적 체제에 반한 잠재적 간섭이나 전환으로서 생산되게 할 것이다. 

초판 서문(1990)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트러블에 도달했다. 젠더의 불확정성은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트러블이라는 현상이 꼭 부정적 가치만 갖는 것은 아니다. 트러블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외려 더 중요하다. 
트러블은 여성성의 신비와 통상 관련되어 왔다. 나는 보부아르와 사르트르의 글을 접하면서 이를 좀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남성적 욕망의 주체는 여성 ‘대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작인의 갑작스러운 침범을 받곤 한다. 이 여성 ‘대상’은 시선을 뒤집고, 응시를 역전시키고, 남성적 지위의 권위나 장소에 저항한다. 남성 주체가 여성 ‘타자’에 근본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은, 남성의 자율성이 환영일 뿐임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증법적 반전은 내 관심을 그리 끌지 못했다. 권력이란 주체들 간의 교환물 또는 주체와 대상 간의 지속적 역전관계 이상의 것, 즉 젠더에 대한 사유의 이분법적 틀 자체를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권력 형태가 주체와 대상,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관계, 관련 용어들의 내적 안정성을 구성하는지 물어 왔다. 
그렇다면 젠더 위계와 강제적 이성애를 지탱하는 이 젠더 범주를 문제 삼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심각한 범주’를 면전에서 비웃어버리는 일이 페미니즘에는 꼭 필요하다. <헤어스프레이>의 주인공 디바인의 여성 분장은 젠더란 실재인 척하면서 계속되는 분장 같은 것이라고 은연중 주장한다. 그/녀의 연기는 자연스럽거나 인위적인 것, 심층과 표층,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간의 구분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실’인가, 아니면 문화적 퍼포먼스에 불과한가? 그도 아니면 성의 범주 안에서 또는 그 범주를 통해서 몸을 생산하는 담론적으로 규제된 수행적 행위가 이 ‘자연스러움’을 구성하는 것인가?
권력 형성의 효과로서 섹스, 젠더, 욕망의 범주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보학’이라는 비평적 탐구 형식이 필요하다. 계보학적 비평은 젠더의 근원이나 여성 욕망의 내적 진리를 거부하며, 억압으로 은폐된 진정하거나 진실한 성적 정체성을 탐색하지도 않는다. 계보학은 이런 정체성 범주의 기원이나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연구한다. 정체성이라는 범주가 여러 개의 산발적 지점에서 시작된 제도, 실천, 담론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이 연구 작업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제적 제도를 해체시키려 한다.
페미니즘 이론이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기원적 정체성의 문제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는 이제 더 이상 확실치 않다. 그 대신 우리는 정체성 범주에 급진적 비판을 들이대고 새로운 형태의 정치학의 가능성을 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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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젠더 범주의 비평적 계보학을 끌어 위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부 “섹스/젠더/욕망의 주체들”은 ‘여성들’의 지위를 페미니즘의 주체이자 섹스/젠더의 주체로 다시 고찰한다. 언어는 성의 범주를 어떻게 구성하는가? ‘여성적인 것’은 언어의 재현에 어떻게 저항하는가? 강제적 이성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는 어디서 어떻게 조우하는가? 이 둘이 갈라지는 지점은 어디인가? 언어는 어떻게 다양한 권력체제를 지탱하는 ‘성’의 허구적 구성을 생산하는가? 어떤 문화적 실천이 센스, 젠더, 욕망 사이에 있는 전복적 불연속과 불일치성을 생산하고 또 그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는가?
2부 “금지,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성애적 모태의 생산”은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의 몇몇 글들을 선별적으로 읽는다. 이 글들은 ‘근친상간 금기’를 이성애의 틀 안에서 내적으로 일관된 젠더 정체성을 강요하는 기제라 설명한다. 그러나 『성의 역사』의 억압가설 비판에 견주어 보면 금기의 구조 또는 사법적 구조는 남성 중심주의적 성 경제에 예속된 강제적 이성애 중심주의를 발족시키기도 하지만, 그 체제에 비판적으로 도전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은 반근본주의적 탐구인가, 아니면 위계질서를 위해 작동하는 정체성 가정들의 토대인가? 
3부 “전복적 몸짓들”은 섹스와 섹슈얼리티의 문화적 인식 가능성을 지배하는 내면의 규범들을 보여 주기 위해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구성한 ‘모성적 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3부 마지막 장 ‘몸의 각인, 수행적 전본들’에서는 메리 더글러스와 크리스테바의 논의를 빌려 몸의 경계와 표현 또한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보여 주려 한다. 몸의 범주를 탈자연화하고 재의미화하는 전략의 하나로서 몸,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범주를 파열시키려 한다. 나아가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는 몸,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재의미화와 증식을 야기할 젠더 행위 수행 이론과, 이에 기초한 일련의 패러디적 실천들을 설명하고 또 주장하려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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