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발제문/심리학

광신 / 알베르토 토스카노 / 3장 이성과 함께 날뛰기: 광신과 계몽 / 2020. 8. 30. 세미나

에피_메테우스 2020. 8. 30. 12:19

3장 이성과 함께 날뛰기: 광신과 계몽

종교적 비이성이 정치를 침식하는 것에 맞서서 계몽주의를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는 최근의 움직임들은 이데올로기적 기원과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게 나뉘기는 하지만, 광신을 합리성과 사회적 평화에 대한 전 지구적 위협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다(p. 191).

 

알프레도 토스카노는 이러한 소박한 계몽주의다수는 천박하고, 방향을 잘못 잡았거나, 위선적이라고 함.

 

이들의 계몽주의는 정치적 긴장, 지리적 특이성, 철학적 차이가 모두 제거된 통일적이고 균질한 것으로 제시된다(p. 192).

 

계몽주의 벗어나기

단순하고 표준화된 계몽주의의 성격은 이미 기존 질서의 기저가 되어있는 요소들의 집합에 의해 과거로까지 소급 적용되며, [이 계몽주의는] 내부의 과거 회귀 경향과 외부의 적들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광신에 맞서 수행되는 현재의 이데올로기 선전전의 독특한 흐름은 우리가 진정 계몽되었다는 의기양양한 신념에서, 그리고 이에 수반해 계몽주의는 만들어지고 진전되고 반복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유래한다.

스스로 편견을 경계하고 비합리적으로 영속되는 권위와 결탁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비판적 사유의 망각(p. 194)

수세에 몰린 용감한 소수파의 일원이라고 스스로를 포장하면서도 실은 강한 자들의 편에서 싸우고 있는 데서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적 편안함만 남음

푸코가 주목한 계몽에 대한 칸트의 사유로부터 멀어짐: 철학이 속한 현재의 문제적 위치에 대한 철학 스스로의 성찰(명백한 현실태, 어떤 구체적 권위, 항상 의문시되어야만 하는 우리”)

 

 

광신의 정의

알프레도 토스카노는 계몽주의를 적수, 대조물, 혹은 반자신’antiself으로 보일 수 있는 광신, 열정, 고양 등의 프리즘을 통해 접근하려고 한다(p. 195).

 

알렉상드르 들레르의 백과전서에서 나오는 광신

- 행동으로 나타나는 미신(p. 197)

- 인민의 광기(p. 198)

- 학살을 통해 하늘을 진정시키려 하는 신성화된 불의

- 성스런 것을 매도하고 종교를 상상력의 변덕과 격정의 방종에 복속시키는 허위의식의 효과(p. 199)

- 원인: 어떤 알 수 없는 폐해로 인해 이성과 삶의 자연적 경계 밖으로 나가 버린 과도한 상상력(p. 198-199)

 

 

광신을 기괴하게 치장하는 최초의 요소는 아무래도 그 배타주의와 당파성이지만, 들레르는 입법 목적에 부합하지도 않는 지역과 사람들에게까지 자신들의 법을 확장하려고 하는 입법자들처럼 광신 역시 보편성 과잉의 효과라고 보는 많은 논평자들에 합류한다(p. 200).

 

들레르의 광신에 대한 대응

- 광신은 치료를 요하는 것이다(p. 200).

- 추방, 감금, 조롱

- 진정한 치료는 정치: 종교재판식의 정치제도가 정체를 안정화하고 살육의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검토해 보려 하였음.

- 박해는 저항을 낳고, 저항은 박해를 촉진

- 이후 애국자의 광신”, 난로 제의를 호소: 이 과도한 열망, 민족주의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 세속적인 형태의 정열적 귀속감이 없이는 어떤 위대함도 생겨날 수 없다고 단언함(p. 201).

 

볼테르가 말하는 광신

- 광신의 편재란 모든 역사가 광신의 역사임을 의미(p. 198)

- 종교를 수호하기 위해 무장했으되 그것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는 데 열중해 있는, 종교의 변질된 자식(p. 202)

 

볼테르의 광신에 대한 대응

- 일단 광신이 뇌를 부패시키면, 치료는 거의 불가능(p. 204)

- 오직 철학의 점진적 전파만이 광신의 전염 효과를 상쇄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p. 205).

- 다원주의: 종교적(그리고 정치적 무관심) / “영국에서 하나의 종교는 독재를 낳고, 둘은 내전을 부르지만, 서른 개는 평화를 가져온다.”

 

들레르와 루소에게서 광신의 어떤 부분은 회복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볼테르에게는 그런 게 없다. 볼테르가 모든 열광적인 정치적 신념을 평화와 안정에 유해한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그의 사유를 넓게는 반정치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p. 201).

 

들레르와 마찬가지로 정치체를 활성화하고 통합하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광신을 수용하는 루소가 반감을 가진 것은 바로 이 무관심이다(p. 206).

 

볼테르가 믿음을 둘러싼 폭력적 갈등으로부터의 평화롭고 철학적인 이탈을 꿈꾼다면, 루소는 오직 이해관계가 군림하는 영역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격정을 소산시키는 교의가 갖는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쇠약한 효과를 두려워한다.

 

루소의 입장에서 볼 때, 볼테르류의 사람들은, 평등 및 해방과 연계될 가능성을 가진 정치까지 포함해, 정치에서 격정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할 수도 없다(p. 208).

 

마호메트에 대한 볼테르와 루소의 상반된 평가(p. 208)

 

이런 맥락에서 광신은 단순히 사회적이고 영적인 질병이 아니며, 사회계약의 본질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계몽주의에 출몰하는 딜레마 중에는 광신을 외부의 적으로 여겨 맞서 싸워야 할 것인지, 혹은 무조건적이고 열광적인 애착(이것이 없다면 가장 합리적인 정체마저도 허약한 정서적 토대에 의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을 통해 광신에 대한 면역력을 획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p. 209).

 

열정의 양가성

 

어원(p. 209-210)

- 광신: 벨로나 여신과 그녀의 파눔’(사원)에서 벌어지는 피투성이 의식

- 열정: 델포이 신전에서 혼령을 가득 채우다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신성함을 주입하거나 흡입하는 것

 

비방의 용어가 되는 상황에서도, 열정은 고귀한 초월성이라는, 선함, 진실함, 아름다움으로 인도하는 운반체라는 흔적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는 것 같다(p. 210).

 

열정이 비난받았던 역사

- 17~18세기 경 잉글랜드에서 열정에 대한 광범위하고 다양한 비판 전개(p. 210-211)

- 16~17세기에 종교-정치적 질서를 위협하는 적으로 여겨진 열정주의자(와 광신도)에 대한 공포로 인해 급진적 종교개혁과 반체제적 독일 재세례파를 위험한 신념의 대표적 상징으로 보는 많은 문헌 생성

- 17세기 중반 이후 대의나 불변의 본질을 좇는 열정을 기능 부전의 생리학이나 과잉 자극된 상상력에서 기인한 망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 길을 터주게 된다(p. 213).

 

포콕:

열정은 모든 체계에 대한 적용 가능성을 향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속에서 정신은 자신이 해석하는 우주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동일한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제시된다. 따라서 정신은 우주의 사유가 되고, 자신[정신]과 그 대상의 동일성으로부터 도출된 권위를 획득한다. …… [열정이 의미하는 것은] 정신이 자신 안에 있는 생각과 동일하다는 점이고, 이는 다시 현실의 실체와 상통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규정된다.

 

흄은 이런 현상을 자기도취적 정신의 자기 신격화라고 불렀다(p. 214).

 

프레드릭 바이저는 열정이라는 문제를 무엇보다도 인식론적 문제라고 여기고, 열정에 대한 비판을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본질적 차원으로 파악한다(p. 215).

 

로크의 인간 오성론

진리를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어떤 주장도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증거가 보증하는 것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지고환대하지 않는다고 논박한다. 증거를 넘어선 곳에 있는 것은 병적인 관심과 애호 속에서 발생하는 잉여물일 뿐, 진정한 애정은 아니다(p. 215-216).

 

열정은 다음과 같은 원을 끊임없이 순환하도록 이끄는 도깨비불이다. 즉 확고히 믿기 때문에 계시가 되고, 계시이기 때문에 믿는다.” 그것은 또한 게으름의 형태이기도 한데, 열정은 가정된 진리에 대한 증거를 찾고 제시해야 하는 수고를 면제해 주기 때문이다.

 

열정에서 나온 비논리적 주장들에 대해 경험적 토대를 갖춘 이성이 맞선다는 이 깔끔한 이미지는 우리가 그 속에 담긴 문화적·정치적 맥락을 고려하는 순간 복잡해진다. 열정주의자라고 낙인찍힌 수많은 행동들 뒤에서, 우리는 권위에 대한 의심을 발견할 수 있다(p. 217).

 

마이클 헤이드에 따르면, 열정에 대한 비판은 부상하는 계몽주의와, 종교적 영감 및 합리주의 신학이라는 퇴행적 형식 사이의 단순한 전투라기보다는 성경, 인문주의 학습,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학풍, 갈레노스식 의학에 기초한 질서가 위기를 맞으면서 생겨난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17세기와 19세기를 거치며, 근대성과 합리성이라는 일련의 관념은 변형 가능한 열정을 자신의 대립쌍으로 하여 스스로를 구성했다(p. 219).

 

계몽주의자들은 그들이 몰두하던 기획의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까지 출현하는 지적 광신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가차없이 엄밀하게 칸트가 파헤쳤던 것은 바로 이 이성의 광신이다(p. 220-221).

 

광신자 칸트

계몽주의를 권위의 초월적 근원에서 나오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특권에 맞서 내재성이라는 세속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면, 칸트의 철학은 내재성의 한계를 정하는 일이다. 칸트의 철학은 그 한계의 위반을 막으려는 비판적 경계심에 의해 지배되는데, 이는 한계가 없이는 비판이나 오만함이나 미신으로 퇴행해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p. 221).

 

광신이 이성의 외부에 있는 행위와 신앙의 형태들을 의미한다고 여기는 계몽주의의 담론과는 반대로, 칸트에게 광신은 인간 합리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비이성에 대한 경계는 더 이상 적절한 정치적 배치나 사회적 치료, 세속주의의 확립이나 광기의 통제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비이성에 대한 경계는 초월적이거나 불합리한 이성의 활용으로부터 내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활용을 분리할 것을 요청하는, 이성 자체의 작동과 역량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p. 222).

 

칸트주의는 삶을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정의의 원칙에 종속시키는 도덕적 광신으로 낙인찍혀 있다(p. 223).

 

필요 불가결한 열정을 어떻게 해로운 광신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가?(p. 224)

계몽의 기획에 어떻게 정동을 포함시킬 수 있는가?’

 

광신은 언제나 열정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전자는 자신이 더 고차원적인 세계와 즉각적이고 특별한 교감을 나눈다고 믿는 것인 반면, 후자는 그 어떤 것과도 초자연적인 교감을 나눈다는 환각 없이, 적정한 정도를 넘어선 애국적 덕, 우정, 종교 원칙 등과 같은 원리들에 의해 불타오르는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p.225). 칸트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대한 고찰

 

칸트는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도덕적 인간의 성질이 악화하면서 어떻게 진지함이 낙담으로, 헌신이 광신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이 열정으로 기울어 가는지에 대해 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미 열정과 정치 사이의 친근성에 대한 암시뿐만 아니라 광신과 그릇된 내향성 사이의 연관에 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숭고한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정신적 질병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칸트의 비판적 경계는 자연히 내면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경계가 자기관찰로 전환하지는 않는다(p. 226-227).

 

칸트에게 광신적 자기관찰은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게 우리 안으로 유입되는 가상의 고차원적 영감과 힘으로 생겨나는 정신의 혼돈을 거쳐, 광명주의 혹은 심지어 테러리즘으로 향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이다. 자신에게 넘쳐나는 그런 과도한 집중은 경험을 통한 우회로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재현의 대상을 자신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얻어지는 사유의 능력과 정신의 권위라는 자유를 의미하는 관념의 활용으로 상쇄되어야 한다(p. 227).

 

형이상학자의 꿈에 비추어 본 시령자의 꿈

- 수렴점과 상상의 초점

- “자신의 상상이 낳은 대상에 불과한 것을 실제로 자신 앞에 현존한다고 여기면서 자신의 외부에 위치시키는사람은 정신착란의 희생자이다(p. 229).

- 인간이성의 한계에 관한 문제를 다룸(p. 230)

 

순수이성비판

경험의 주관적 구성에 대한 탐구는 지식을 향한 독단적-광신적 의지에 맞서는 투쟁을 새로운 토대 위에 올려놓음.

정신적 공동체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보편적 인간 이해에 대한 의존이자 도덕적 책무를 탄생시키는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들의 의지에 대한 의존이다. 명백히 루소적인 용어를 사용해 칸트는 가장 깊숙한 동기에서 우리는 일반 의지에 의존한다고 쓴다(p. 230).

 

칸트에 따르면, 이성은 교조주의적이고 존재론적인 광신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 면역성을 갖출 수 있다(p. 232).

 

칸트는 이성의 자기법제화야말로 광신적 입장이 가진 전복적이거나 무신론적 영향에 대해 취해질 국가의 억압을 미리 피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묘사한다. 자율성은 권위와 타율성에 대한 해독제로 등장한다(p. 232).

 

병적인 정동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동의 근거로 이성이 참조되어야만 한다(p. 234).

 

학부들의 논쟁

프랑스혁명을 초래한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행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무관심한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킨 격정이다. 정동이 인류가 진정 스스로의 발전의 매개자가 될 수 잇다는, 역사에 인간의 진보라는 것이 있다는 징표 역할을 했던 것이다(p. 235).

 

판단력 비판

칸트에게 광신은 내면의 상상을 외부의 감각으로 착각하거나 주관적 신념을 객관적 지식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칸트는 열정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도덕성의 이런 순수한, 영혼을 고양시키는, 순전히 부정적인 현시는 광신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다(p. 236).

 

자신이 광신자로 비난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칸트의 강력한 대응

칸트는 “‘실천이나 행복에 대한 요청이 기존 질서의 유지에 대한 요청이라는 점을 밝힌다.

이론의 거부는 급진적 변화를 위한 어떤 기획 기존의 사회-정치체제를 초월한다는 이유로 공허하고 추상적이라고 평가되거나, 혹은 무자비한 투쟁을 통해서라도 새로운 사회-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자는 주장으로 인해 파괴적이고 소름끼친다고 비난받는 기획 도 거부하라는 일인 것이다(p. 237).

 

니체는 광신을 일차적으로 종교적 분파주의나 미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이미 탐지할 수 있는 이성의 광신으로 이해한다. 플라톤 강의에서 철학의 폭압적 성향에 대해 말하며 니체가 언급 했듯,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신념이 그를 광신자로 만든다(p. 238).”

 

신념은 감옥이다라고 니체는 쓴다(p. 239).

 

신념의 인간은 수행적 모순의 먹잇감이다.

 

니체에게 있어 진정 위대한 지성을 추동하는 힘은 믿음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주어진 진리에 대한 헌신에 묶이지 않은 채 가치를 제출하고 파괴할 자유를 표현하는 거대한 열정이다.

 

광신을 치욕의 용어로 다루는 니체의 정치적 의도는 칸트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특히 명백하다(p. 240).

 

보편적 기준의 추앙은 치명적으로 위험한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의 소모로, 긍정의 전제 조건인 본능적이고 자연적 즐거움 자체의 억압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p. 241).

프랑스혁명에 대한 헌신은 칸트적 도덕에 내재한 위험의 증거가 된다.

 

니체에 따르면 칸트의 도덕적 광신은 두 측면에서 작동하는 은폐에서 기인한다. 한편으로는, 특정한 가치판단이 초월적인 추상을 통해 상정됨으로써 삶의 즐겁고 긍정적인 차이를 괴멸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한 칸트의 헌신은 신념의 심리학의 한 사례라는 점에서 볼 때 토대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니체의 눈에 정언명령은 단지 당파적 인간에 대한 설득에 불과한데도, 칸트는 도덕을 최상의 동기에, 궁극적으로는 선에 연결시킴으로써 이를 위선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p. 243-244).

 

한계가 남긴 유산

유한성의 윤리를 정교화하는 데 칸트가 활용되는데, 이 유한성의 윤리란 세상사에 관한 이론적 지식에서 정치가 생겨날 수 있다는 가정에서 기인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자부심을 중성화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 피해야만 하는 것은 현실을 정면으로 거부하면서 개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 관념의 정치가 가진 위험성이다(p. 245).

 

인간의 감각 경험이라는 한정적 요소들에 지식을 묶어 둠으로써 마치 사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태도는 제한적이거나 유한하지 않은 도덕적(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적) 원칙의 보편성에 대한 주장을 수반한다(p. 246).

칸트에 대한 니체의 다양한 비판으로부터 등장하는 광신적 휴머니스트상은 정치적 자유를 쇄신하기 위해 칸트의 열정 개념을 활용하려는 현대적 노력에 흥미로운 빛을 비춰준다(p. 247).

 

아렌트의 이론은 광신을 명백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이성의 공적 활용에 참여하는 원거리 관객들의 공평무사하고 열정적인 판단과, 낡은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어지러운 현실을 실제로 만들어 내는 잠재적 범죄자로서의 격변을 병치시킴으로써 광신과 혁명 간의 관련성을 제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p. 248).

 

아렌트는 칸트의 종개념이 인류 혹은 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복수성이 핵심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한다.

 

종개념이 인류개념으로 단순히 환원되는 게 아님이 분명하긴 하지만, 아렌트의 복수성 지향은 정치에서 관념에 대한 칸트의 옹호를 차단하게 된다(p. 249).

 

아렌트의 논지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저 관찰자라는 수사는 무엇을 의미할까?

 

아렌트는 자신의 강의에서 칸트가 행위의 능력 혹은 필요 중 어느 것도 알지 못한다고 언급한다(p. 250).

 

관객과 행위자[배우]간의 충돌

행위자는 극의 일부이기에 자신의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 그는 정의상 한쪽에 치우쳐 있다. 관객은 정의상 불편부당하다. 그에게는 어떤 역할도 배당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당파적 행위자를 한 편에 놓고 공평한 즉 보편적인 관객을 다른 편에 놓는 이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칸트의 논지에 담긴 중요한 요소를 경시하는 것이다. 이 관객들로 하여금 정동을 통해 선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인류 진보의 상징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은 그들의 불편부당함이 아니라, 처형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혁명의 편에 선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p. 251).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관객의 열정이 자기 종이 행동할 수 있는 역량에 대한 열정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관객이 공적 당파성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통해 행위한다, 그의 열정이 향하는 곳은 집단적 역사-정치적 행위자가 되려는 인류의 역량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p. 252).

 

전체주의 비판의 결과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라는 맥락 속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위한 유한한 정치학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유하는 전체주의적 오만함을 제거한 을 구성하려는 시도는 칸트를 그 수호자상으로 삼았다(p. 253).

 

리오타르는 정동과 역사 간의 고리를 급진적 이질성의 관점에서, 즉 하나의 경험 담론 체제를 다른 체제로 포섭하는 것의 실패, 불가능성, 혹은 부당함의 관점에서 바라본다(p. 254).

 

칸트의 미학 사유에 대한 리오타르의 공들인 독해는 부정적 현시로서 열정에 내재하는 보편성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 열정의 실패와 광범위한 생리학적 차원을 강조하는 데 사용된다(p. 255).

 

칸트의 도덕적 목적을 포스트모던한 이질성이라는 목표들로 탈구시키려는 의도하에서 보편적인 것에 대립하는 사건을 구성하려 애쓰는 리오타르의 방식은 원칙들을 보편성의 관점에서 다루거나 역사를 총체화의 관점에서 취급하는 일이 어떤 식으로든 끔찍한 악과 압제의 원인이며 혹은 최소한 공모 대상이라는 식의 반전체주의적 상투 어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p. 255).

 

코다: <열정> 이후의 열정

보편성과 밀접히 얽혀 있는 열정은 이질성 속에 분산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행위자에게는 열정을 박탈하면서 관객들에게만 부여해서도 안 된다. 광신 비판의 다양한 외관을 횡단하는 일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 정동의 이론, 선한 것에의 정동적 참여에 관한 이론을 다듬을 수 있게 한다. 조건 없는 정치적 헌신과 추상적 격정 속에서 오직 폭력과 재난의 서막만을 보는 저 회의적 혹은 수축적 원칙들에 의해 결코 쉽게 묵살당하지 않는 그런 이론 말이다(p. 258).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신비교도이자 계몽철학자다(p.189)

자크 데리다,“철학에서 새로 떠오른 묵시록적 경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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