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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H.스튜어트 휴즈 - 의식과 사회, 5장 소렐, 6장 독일관념론 딜타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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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디칼리스트, 조르주 외젠 소렐(출처: 위키피디아)

5장 소렐의 현실 탐구

  소렐은 주로 폭력론에 의해서 알려져 있는데, “‘증오도 없고 복수심도 없이정화하는 힘으로서의 폭력의 개념, 역사적 신화’, 특히 총파업이라는 생디칼리즘적 신화를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대중을 일치된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상으로 규정한 것, 이러한 신화에 의한 사고 보다 역설적으로 현대 과학의 방법론에 도입한 것”(186)으로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일부일 뿐으로, 다양한 연구자들이 소렐의 사상에 대해 어떤 한 측면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고서는 그에 대해 전혀 쓸 수 없다.’(187)는 평가처럼 모호해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양 극단이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얽혀 있다.’는 것으로, 그 긴장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핵심적 주제라고 말합니다. 소렐의 모호성 혹은 얽혀 있는 긴장관계적 특성을 그의 전기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렐은 부르주아 계층이었지만 부모의 재정적 실패로 고립된 경향이 있었고, 인문학적 교육이 아닌 기술적 교육을 받았으며, 독학하며 지적 자립의 성향을 가지고, 다양한 연구적 태도를 보이는 등 훈련과 직업으로 보면 기술자였고, 기질적으로는 모럴리스트’(189)라고 말합니다. 그는 “‘만드는 사람들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190)하고, ‘질서 있는 인공적 세계의 창조(190)에 관심이 있는 기술자적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면서 구식적인 모럴리스트로, 성의 정조나 도덕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윤리적 문제에도 질서를 부여하기 원하며 “‘회귀’ - 고대의 영웅적 가치들의 회복에 의한 인류 역사의 쇄신”(191)이라 설명될 정도로 모럴리스트적 특성을 보입니다.

  니체 철학과의 유사성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는데, “영웅시대의 군주도덕에서 생명을 부여하는 힘을 발견했다.”(191)는 표현처럼,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와 윤리적 성실성’(192) 등의 사상에서 유사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코를 통해서는 행동하는 행위와 인식하는 행위를 결합’(192)시키면서 도덕적 차원의 이해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소렐의 다양한 변절적 태도에서 모호성을 느끼게 되지만, 이는 놀라운 탄력성’(192)으로 발견될 수 있기도 합니다. 소렐은 실제 정치에서의 구현을 추구와 실망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정말을 극복하고 희망을 걸 만한 새로운 운동을 발견’(192)해 나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소렐은 분리(diremption)'라는 개념을 전개하며, 어떤 상황이나 사건의 어떤 부분을 전체와 연결시키는 모든 연관을 고려함이 없이 이 부분을 검토하고 고립시킴으로써 그 활동의 성격을 어떤 방식에 의해 결정하는 것”(193)이라는 정의를 통해, 임의적인 추상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는 베버의 이념형(“이념형이란 하나 혹은 다수의 관점에 의해 강조된 한 쪽 입장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고, 엄청나게 다분화되고 각각의 통합에 의해 그리고 한 쪽 측면으로 강조된 관점들이 분석적 구성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현재 혹은 종종 구체적인 현상의 부재 등으로 구성된 개념”, 출처: 위키피디아 이념형‘), 이후 사회과학자의 모델(인간과 사회 현상의 가설과 검증을 위한 모형의 설정)이라는 설명과 유사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렐의 추상은 정밀하지 못한 상태라 할 수 있지만, 그의 자연과학의 정밀성에 대한 불신적 태도(연구자의 회의와 망설임, 193)에서 그러한 것이라 추정합니다. 소렐은 개연성 있는 부분적인 가설을 시험해보고 일시적인 근사치에 만족해야 한다.”(194)는 설명처럼, 분리라는 개념을 너무 엄격하게 하지 않고 현실적인 유동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둘 것을 권고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공식들은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하며, 현실이기도 하고 상징이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뛰어난 것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불합리하다. 모든 것은 우리가 이를 이용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194)는 말에서 소렐 사상의 모호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회의 유동적 성격을 반영하기 위해 사회과학에서의 추상의 개념과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공식을 통해서, “모든 사회적 현상은 변화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강조하던 태도와, 비논리적 동기에 대한 새롭고 보다 충분학 인식을 결합”(195)시켰다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모럴리스트적 관점으로더 도덕적 인식이 함축된 신화의 개념을 통한 현실 반영의 이해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베르그송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신화에 의한 인간 행동의 설명을 통해 현실성을 설명하려 합니다. 사회이론에서 추상적 특성에 의해 환경과 관찰자의 지식도 변하고 수정’(196)되지만, 신화는 자율적이고 그 자체로 완전하며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되는 것’(196)으로서, 분리되지 않는(않아야 하는) ‘복합체 전체로서 역사적 힘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종의 사회학적 신비주의’(196), ““역사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체를 제시하고 현실은 모호성에 의해 보호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196)

  이렇게 신화라는 개념으로 현실성과 동떨어진 역설적인 상황에서, 제임스의 철학적 실용주의의 영향이 그를 일시적으로 구제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모든 타당한 사회이론의 근원은 실천적 행동’”(197)이라는 그의 주장에 실용적 접근법이 함축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소렐은 제임스의 실용주의적 사상을 보급하며 관심을 보이지만, 제임스의 불가지론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며 완전히 실용주의에 몰두하지 못했습니다.

  소렐은 언제나 실용적이고, ‘자신의 철학적 다원론을 분명히 인식’(198)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입장에 함축된 회의적 상대주의적 태도를 방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198)는 역설성을 여전히 보이고 있습니다. 소렐의 사상은 일관적이지 않고,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기에 소렐을 단면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해이며, “가장 간접적인 의미에서만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선구자로 꼽을 수 있다”(199)는 것을 강조합니다.

  반면 그렇기에 소렐은 다방면에서 이용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의 에피소드처럼, 또한 무솔리니가 소렐을 비롯 니체와 제임스 등 수많은 이들의 글을 인용되어진 것을 저자도 조명하고 있습니다. 소렐은 체계적 사회이론을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산만’(200)한 사상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받는 관심은, 그가 기성의 통념을 교란시키는 위대한 사람들’(201)의 일부로서 인상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소렐의 비판적사상가로서의 자세는 유능했다 할 수 있지만 그의 비판에서 나타나는 이율배반의 두 가지를 언급하며 소렐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추상적 사회이론과 정치적 관여 사이를 분리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사회학자로서의 객관성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비판적 지성을 통해서 적절한 개념적 도식이나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기계론적 용어를 물려받고, 이를 통해 표현하는 내용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의 조각들을 함께 모으지 못한’(202)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6장 신관념론의 역사관 - 1. 독일의 관념론적 전통

  독일은 프랑스, 이탈리아와 다르게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철저한 관념론적 전통의 영향력에서 실증주의의 영향이 약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경험론과 독일의 관념론의 지형적인 구분을 두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독일에서 마주하게 된 질문은, 독일이 천박한철학에 비해 보다 심원한이해를 가지면서도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205) 당시의 독일은 철학적 의미에서는 이미 시대에 뒤진 것이자, 니체, 딜타이 등에 의해 부활하는 듯하였지만, 1930-40년대에 이르러 더욱 나쁜 상태에 이르렀는데, 이를 지적 창조력과 파괴력이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206)라는 저자의 서술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당시 독일 관념론에는 낭만주의적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역사가 랑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직관과 관조를 통한 실재를 다루는 독일의 관념론 철학은 사회사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현상세계와 정신세계, 자연과학의 세계와 인간적 활동의 세계 사이에는 근본적인 분열이 있다.”(207)고 가정하며 이를 자연과학과 문화과학(또는 정신과학)의 틀으로 명확하게 구별하였습니다. 정신과학은 자연과학과 다르고, 법칙을 추구할 수 없는 것으로, 독일 관념론적 전통에서는 가설을 가장 신중하게 검증하는 차원에서의 연구는 전적으로 생략되는 경향”(207) 이었으며, 형이상학적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또는 역사적 제도의 정신은 분명히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207), 이는 분리된 개별적 경험 자료를 포함하는 통일개념”(207)으로서 특수하고 독특한 정신(Geist)’ 곧 특수한 문화적 전체성”(208)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관념론에서의 정신은 고유하고 독특한 것으로서 슈펭글러는 다른 문명 간의 정신은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말하기도 합니다. 관념론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해의 문제는 실증주의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보다 유연한 절차’(208)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내면적 이해Verstehen'로서 다루어지게 됩니다.

  독일에서의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의 유연한 절차에 확실한 공식을 부여한 이로서 딜타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중간 과정에서 크로체의 방법을 살피고, 이후 베버에 이르러서 사회연구의 형식이 더욱 철저하게 확립되게 된 것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1880년대부터 1차대전 시기까지 독일에서 관념론의 영향으로 실증주의의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실증주의적 심성’(209)에서 강력한 진전이 있었다 말합니다. 이는 당시 독일에서 역사가 랑케와 그 제자들을 비롯하여 관념론적 전통이 살아 있지만, 연구 방법론적 차원에서 실증주의에의 대처를 문제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낭만주의적 형이상학에 의거하지 않고서, 실증주의자와 싸울 것’(210)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실증주의에 대한 대처는 20세기 초에 빈델반트, 리케르트, 그리고 짐멜 등의 신칸트학파를 중심으로, 칸트의 범주의 개념을 중심으로 정신과학이란 “‘일반법칙을 형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을 이해하려는 것”(211)으로, 실증주의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리케르트의 설명에서는 정신과학이란, ‘선택의 주관적 결정으로 사회의 한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며, ‘연구자 자신의 가치체계가 기초로서 접근하는 선택과 가치의 이론’(211)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향후 베버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리케르트의 이론은, 가치와 주관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연구자로서 타당성의 문제에 취약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를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를 피할 수 없습니다.

  리케르트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형이상학적 해결을 제시하는데, “인간의 규범의식(normal consciousness)'을 전제로 역사가의 가치의 타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가치를 독립적이자 초월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방법으로서 형이상학적 귀결은, 기존의 낭만주의자들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는 한계가 있으며, 만족스러운 해결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6장 신관념론의 역사관 - 2. 딜타이와 정신과학의 정의

  독일 관념론적 전통과 신칸트학파의 실증주의에 대한 대처에 이어 살펴볼 딜타이의 지적 관심은 칸트가 남겨놓은 것, 엄격한 역사학적 훈련, 계몽주의적 정신세계에 대한 향수, 실증주의적 연구 목적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아직도 배후에서 떠돌고 있기는 했지만 낭만주의적 신학의 모호한 범신론 등의 기묘하고 불안정한 결합”(213)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딜타이의 의의는 처음으로 역사와 실증주의 및 자연과학을 철저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대결시킨 점”(214)에 있습니다. 다시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는 관념론의 입장과는 다르게 역사 서술의 과학적 가치의 문제”(214)의 과학적 탐구에 대해 다룹니다.

  딜타이의 관점에서 실증주의도 관념론 철학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이라 비판(215)하고, ‘자연세계와 인간 활동세계의 혼동을 배제하는 것’(215)을 목적으로 문화와 사회, 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주장합니다.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차이는 1)연구영역, 2)경험의 형식, 3)연구자의 태도에서 차이점이 있으며, 연구자의 내면적인 과정(생생한 경험과 이해)(215)을 통해서 정신과학 분야의 지식이 획득된다 주장합니다. “역사가 자신이 놓여 있는 시대와 문화의 상황, 그리고 역사가가 그의 개인적 세계에서 내리는 능동적인 결정에 따라 변화”(215)를 발견하게 됩니다.

  딜타이는 정신연구의 명제를 세 가지로 구별하여 정신과학의 입지를 다잡습니다. 그 명제는 1)현실 자체(역사), 2)현실에서 추상개념으로 이루어진 것(사회과학), 3)가치판단과 규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회과학은 역사 세계 이해에 불가결한 것으로, 역사가는 예술가의 환상과 비슷한 것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딜타이의 정신과학과적 관심은 경제학과 심리학에 있어, 그의 <정신과학 입문>에 이어서 기술적분석적 심리학의 확립(216)에 관심을 두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실증주의에 항복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딜타이가 형식주의적 심리학에서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딜타이의 심리학적 이론에서는 추상 개념으로서 의식의 직접적 소여의 개념이(217) 중요한 듯합니다.(소여의 사전적 의미는 주어진 바로서 가공되지 않은 직접적인 의식의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체계에 따른 작용이 아닌, 의식 자체의 작동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딜타이의 심리학 연구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인식론적 문제에 전념하게 되는데 이는 공감적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어떤 내면적 이해를 다루는 것이 정신과학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217)에 따라, ‘경험’, ‘표현’, ‘이해의 각 기능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일에 몰두하였습니다. 또한 역사인식의 문제에서도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기에 이후 크로체나 베버의 방식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딜타이는 크로체의 선구적인 측면(정신 연구에서 주관-객관, 연구자-자료의 관계는 인간 역사의 동일한 세계에 속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크로체보다 더 멀리 바라보는 관점에서, 역사와 사회과학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는 보편적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회의론이나 상대주의적 태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결론 짓습니다. 딜타이는 심리학적 방식으로 행위자의 동기를 이해를 시도하였지만, 윤리적 기준이 부재하고 상반되는 가치를 판단할 규범이 없다고 그의 한계를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역사학과 정신과학의 연구에서의 딜타이어의 업적에 대해서, 딜타이가 처음으로 확립한 철학적 사회연구의 기준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서 중요한 지성인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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