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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H.스튜어트 휴즈 - 의식과 사회, 9장 유럽의 상상력과 제1차 세계대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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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유럽의 상상력과 제1차 세계대전

1. 1905년의 세대

1905, 러시아에서의 혁명과 피의 일요일’, 모로코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제국주의적 노선을 두고 충돌하던 1차 모로코 위기등 시대적으로, 외교적으로 떠들썩한 시기이자 이후 1차 세계대전의 분수령이라고 휴즈는 표현합니다. 국가와 세계정세의 불안 속에서 언제 임박할지 모르는 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시대였고, 많은 젊은이들은 군대에 복무하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1905년을 기점으로 우리가 앞서 읽어왔던 지성들은 이미 나이 들었고 종군과 거리가 먼 상황에서, ‘그들 아들들의 전쟁’(356)이라고 언급하며, 전쟁의 경험을 기점으로 지성의 연령 집단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1890년대 저술가들이 이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에는 자제심을 발휘한 반면, 1905년에 이르러서 젊은이들은 공공연하게 비합리주의자, 심지어 반합리주의자가 되었다.’(356)말하며 지성에서도 시대적인 전환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일에선 니체의 영향을 받은 게오르게와 새로운 자유독일청년의 청년 집단의 대두, 이탈리아에서 크로체의 영향으로 젊은 세대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역동주의 등의 청년들의 기질에서 격양되던 시대의 단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도 조금 늦게 지드, 알랭-푸르니에 등 니체주의자들이 등장하고, 베르그송주의자들이 등장하며 원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우익적이고 독단적 종교 사상을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대에서 아들들이 아버지들보다도 더욱 보수적이었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었다.’(359)고 평가하는데, 이런 평가는 지금도 유효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휴즈는 그 원인을 급진파에 의한 승리의 횡령에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른바 드레퓌스파는 자신들의 승리를 이데올로기적 복수 정치로 이용하면서 이에 반동적인 흐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반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 젊은이와 학생들 당사자에게는 정신적 혁신의 담당자’(361)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에 대한 태도도 냉소적인 태도에서 변하여, 무종교적이면서도 마지막에는 교회와 화해하게 되는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대 1905년 세대를 핵심적인 모호성을 보인다고 언급하며, 전쟁으로 가기 전의 당시 젊은이들을 지배한 정신은 권위에 대한 존경심과 자발적인 창조의 찬양을 결합하려는 정신’(362)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이렇게 전파시즘적 분위기’, ‘시작되자마자 순이 잘린 문화와 생활의 르네상스’, ‘살육의 시작’(362) 등의 표현에서 당시의 역설적인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을 바라던 이들에게 전쟁은 당연한 것의 도래였고, 그들보다 반성적이었던 이들 조차 전쟁을 해방처럼 여겼다는 사실에서 시대적인 일그러짐을 보게 됩니다.

 

2. 페기와 알랭 푸르니에


샤를 페기(1875-1914)

알랭 푸르니에(1886-1914)

샤를 페기는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다 이후 카톨릭과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는데, 소렐과 페기의 공감과 관계에 대한 언급(363)에서 초기의 사회주의자적 면모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페기는 전적으로 문학자.’(364)였으며 문학과 사회사상을 연결’(364)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동시에 중간적이고 민족주의적 예언자의 역할’(364)을 했다고 언급됩니다. 1908, 카톨릭으로 복귀하며 드레퓌스파의 승리의 횡령을 맹렬하게 비난’(367)하며 사회주의 및 소렐과 갈라서게 됩니다. 그가 발행한 간행물 <반월 수첩>의 경영 악화와 진영 사이에서의 애매한 태도 등 개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전쟁의 발발을 환영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1914년 마른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샤를 페기의 글에 대해서 지드의 평가를 빌려 지적 말더듬이’, ‘베르그송의 형이상학을 응용’, ‘단순한 문장상의 스타일을 경멸하는 가장 비프랑스적인 저술가’(369) 등 당시에 큰 인상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면적인 성실성’, ‘정치적사회적 이론에는 그나름의 확고한 통일성’(370), ‘전투적인 공화주의와 카톨릭을 결합’(371) 등은 그의 독특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양 진영에 충성하면서도 모순을 느끼지 않았는데, “모든 것은 신비적인 것으로 시작되어 정치적인 것으로 끝난다.”(371)는 말에서 역사와 사회에서의 도덕적 힘 일반’(371)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종교적 투쟁으로 갈라진 프랑스에서 그는 프랑스 국민의 통일의 상징’(372)으로 언급되고, ‘시인으로서는 이류이고 예언자로서는 일류’(372)로 여겨지며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신격화 되고 인용됩니다.

프랑스에서 페기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과는 다르게, 약간 밖으로 벗어난 시점에서 페기는 산문 대작은 없지만, ‘뭔가 매우 감동적인 면이 있고, ‘사물의 원래의 현실성과 신선함을 회복해주는 재주가 있다고 평가를 내립니다. 그리고 당시 드레퓌스파와 사회주의자들의 표리부동한 면’(374)에 격분하는 태도에 대해 프랑스 국민의 기질에 대한 올바른 평가에 도달해 있었다.’(374)고 휴즈는 평가합니다.

알랭 푸르니에는 페기의 친우이자, 다음 세대의 프랑스인, 1905년 세대에 깊은 호소력을 가지면서, ‘정신적 순수성’(374)으로 호소하며 페기와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도 전쟁은 해방이었으며, 자신의 절망으로부터 감동적 연대기 <대장 몬>이라는 위대한 소설을 썼고, 부르주아적 방식의 고정관념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으로서, ‘본래의 인식의 순수성이 완전히 회복된 감각과 정서의 신선함을 일깨워준다.’(375)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페기와 알랭 푸르니에는 이전 시대의, 기성에 대한 부정과 반동이라는 영역에서 자신들의 독특한 관점으로 문학적으로 활동하다 결국은 전쟁에 의해서 해방감을 맛보았지만 소멸되는 공통점을 보입니다. 휴즈는 이 둘에게서 당시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어볼 수 있기에 이 챕터를 서술한 것 같습니다.

 

3. 소설가와 부르주아의 세계: 지드와 만


앙드레 지드(1869-1951)

토마스 만(1876-1955)

<신프랑스 평론>과 갈리마르 출판사가 당시 문학적 인재를 독점하는 상황에서, 지드는 가장 재주 있으면서, 새로운 문학사 현상을 이끌어가는 인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중에게 소외된 반역자’(377)로서의 예술가적 고정 관념이 있던 시대에, 지드는 이와 다르게 새로운 가치를 선언하는 20세기적 소설가상을 창조했다’(378)고 평가 됩니다. 이는 프로테스탄트 출신으로서 가지게 되는 영향력을 갖는 소수자’(378)적 위치에서 예술가로서 마주하게 되는 분열감과 위화 의식 속에서 지드의 영향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수자신 또는 운명에 의해 특별한 목적과 특별한 시련을 위해 선택된의 일원이라는 의식에서 지드는 프랑스의 참된 프로테스탄트였고 끝까지 프로테스탄트였다.”(378)는 휴즈의 평가는 지드의 예술가적 위치에 대한 격찬으로 보입니다.

전면적인 성실성의 추구’(378), ‘이의적인 본성의 점진적인 표현’(379),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은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380) 등의 표현으로부터 지드가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문학 세계에서 고민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밀히 감추어져 있다가 세월이 지나 고백하게 된 인간의 양성성’(380)에 대해서, ‘금지된욕망의 인정이자, ‘관용과 포용이라는 20세기 윤리의 형성’(381)에 기여했고, ‘대중적인 문화의 차원에서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381)는 평가에서도 지드의 문학 세계에 대한 높은 평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상반되는 도덕적 명령이 다투고 있는 것을 느끼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상반되는 명령을 조화에 이르게 하고, 남으로부터도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존경받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광범한 문제’(381)라는 서술이 인상적이며, 지드는 이의성의 한 가운데에서 사는 길을 선택’(381)했다는 것에서 그는 사회적 부도덕과 개인의 도덕의 사이에서의 윤리적 역설을 견디는 인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드는 베버처럼 인간 행위의 모호성에 거의 몰두하듯 관심을 가졌음’(382)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런 관심도 삶의 모순성을 통합하는 고도의 긴장’(382)이자, 상대주의적인 문학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사상에서 상대주의를 철저히 경계하던 태도와 달리, 문학 세계에서는 상대주의가 흡수되어 “‘부도덕한 것을 생명력과 창조의 원천으로서 태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383)하고, “‘의식이나 구성개별적인 자아가 그 생존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개인적 세계라는 허구”(383)를 통해 세계관을 형성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재라는 개념에서 나타나는 심리적인 경이에 대한 감정, 역할의 모호성에 대한 감정’(383), ‘꿰뚫어보는 기술’(384) 등 당시 문학에 반영되는 개념과 방법들에 의해서 당시대 세계관이 형성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사상과 상상적 문학에 공통되는 이러한 점들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변화한 환경을 고찰할 때 비로소 가장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384)는 점이 이번 챕터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만의 작품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청년에 대한 동성애적 요소는 오히려 귀족주의적 윤리설을 따르는 이들에게 찬양 받기도 합니다. 예술가들은 의식적인 윤리에서 초연하게 자신들의 작품과 세계관을 만드는데 몰두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여러 가지 모순적인 것들을 조화하여 살아가는 방법, 이 주제 또한 당시대의 문학적 화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전쟁의 도덕적 유산: 슈펭글러와 원로들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

1890년대 지성인들이 1차 세계대전을 이해하는 방식은 방관자적인 입장에서 다양한 이해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베르그송과 뒤르켐은 애국적인 방식으로, 크로체와 파레소와 소렐은 자살적인 살육 행위로, 프로이트는 초연하지만 전쟁 경험이 문명의 허식을 벗겨내고 진리와 허위에 대한 인습적인 구별을 모호하게 만드는 방식에 깊은 인상’(387), 트뢸치마이네케베버는 지적 균형을 유지하려 하지만 애국적 복종의 방향으로 나타납니다. 휴즈는 세련된 사상의 차원에서도 지성인들의 태도가 일반 대중의 태도와 거의 흡사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388)고 언급할 정도로 전쟁이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전쟁 이후, 그동안 멈췄던 연구와 출판들로 인해 사상이 둑이 터진 것처럼 흘러나오고, 이탈리아의 지성 신인들(고베티, 그람시)의 등장, 프랑스 전위(아방가르드)와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스트)의 등장, 독일의 표현주의와 데카당스의 유행 등 전후의 유럽의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슈펭글러와 카이저링 등은 세계사의 과정에 대해 열렬하고 포괄적인 해석을 제시’(390)하며 이목을 끌게 됩니다.

전쟁 전 자유주의자들로서 인기를 끌던 이들은 이제 공화국원로들’(391)로 여겨지며, ‘극단주의나 무관심’(391)의 대중적 상황에서 중도노선을 표방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은 성급하고 명령적이고 반주지주의적이고 전쟁 경험을 통해 직접적 행동의 훈련을 받은’(391) 새로운 세대로서 원로들을 배제하고 비웃습니다. 슈펭글러는 독일 젊은 보수주의자로서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20세기 초의 사회이론에 함축된 전제들을 통해서 차츰 확립되어온 역사적 변화의 순환이론과 문화연구의 비교 접근법을 분명하게 공식화”(393)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슈펭글러는 역사에서의 순환 관념이 문명 생애주기와 비교 가능하다는 관념을 제시합니다.(394) 딜타이와 베버가 진리 확인의 불가능에도 자신의 가치체계의 확인과 부분적인 객관성을 확립하는 것을 주장했다면, 슈펭글러는 이것들이 모두 불가능하고 역사가는 자기 자신의 에토스를 옹호하는 것일 뿐이다고 주장합니다.(394) 이것에 대해 휴즈는 슈펭글러의 저술이 비교형태학적으로 내용을 다룬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 지적합니다. 문학 작품으로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역사로서는 의문을 품게 되고, 철학사회과학적 차원에서는 매우 조잡한 것이라고도 비판합니다.

그럼에도 슈펭글러가 당대 주목을 받았던 이유를, ‘서양 사회관의 공식화’(395), ‘문화저거 위기의 징후와 그 진단이 매우 분명하게 결합’(396)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 문화적 시대의 종말을 구획하는 일련의 소설 및 분류하기 힘든 저술’(396)이라고 평가합니다.

 

5. 전후 시대의 문학적 감각: 헤세, 프루스트, 피란델로

무명이었던 슈펭글러의 갑작스러운 인기가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역사적 환경에서 전쟁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 챕터에서 언급할 헤세, 프루스트, 피란델로는 1890년대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전쟁 시기에도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전쟁 이후에 성공적으로 평가 받았다 할 수 있습니다. 1919년 헤세의 <데미안>, 1919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921년 피란델로의 극작업이 열광적 반응을 얻은 것에는 이들 문학작품에서 전후 대중 독자들의 기질을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남겨져 있음을 휴즈는 조명하고 있습니다.(397)


헤르만 헤세(1877-1962)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루이지 피란델로(1867-1936)

이들 작품의 난해성’, ‘심리주의적 경향’, ‘내면적인 절망’, ‘상식적인 외면적 현실과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적 현실의 모순’(397)적 성격을 가졌으며, 프로이트의 궤도를 따르지 않았지만 그들의 작품 성격은 프로이트적인 계열에 속하는 것처럼 대중은 받아들였습니다.

헤세의 <데미안>은 전쟁을 겪은 젊은 층에게 윤리적 성실성, 개인의 본성과 조화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투쟁의 기록이자, ‘개인적인도주의적 가치를 강조’(400)하여 신앙의 원래 의미를 회복하려는 의미에서 호소력을 가지게 됩니다. 전쟁 이후 죽음에의 탐닉, 자살의 환상, 변등 사회적 신비주의 등’(401)이 나타나는 상태에서, 헤세는 양심의 철저한 음미를 통해서 마음속의 악마로부터 자기 자신을 해방’(402)시키려 했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해서 심리적 구조에서는, 동기를 자세하게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프랑스의 고전적 전통과 베르그송의 이름과 연관되는 무의식의 새로운 강조가 솜씨있게 결합되었다.’(403)는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의 독자들이 무의식의 작용 속에 인간 행동의 보다 깊은 진실이 있음을 인정’(403)하고 있으며, ‘시간 개념과 기억 개념이 근본적’(403)으로 변화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프루스트의 저작에서 베르그송은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프루스트는 도덕적 공허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행동의 혐오감을 일으키는 측면’(404)을 묘사하면서, ‘전쟁 직후 시대의 문학에서 거듭 반복되던 어떤 분위기를 표현’(405)하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온갖 실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적인 인간성을 갈망하고 있었다.’(405)는 설명을 통해서 그들의 작품 세계와 현실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피란델로는 <엔리코 4>, <나체에 입히다> 등의 희곡에서 말년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는 크로체와 대립되는 지점에서 유명세를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피란델로는 크로체와 달리 논리와 개념은 그의 예술의 최대의 적’(407)이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희곡의 인물들이 각각 사적인 세계와 내면적 논리를 가지며, 자기 자신의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407)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등장인물이 자신의 참모습을 보도록 강요’(408)하고, 이에 그의 희곡의 마지막 장면은 고뇌의 아침, 그들의 감정적인 성소를 잔인하게 침범한 데 대한 절망적인 항의의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408)고 평가합니다. 그의 희곡에서도 주인공들은 사회적 미덕을 갈망’(408)하는데, 이처럼 당시대 인간적 소통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좋은 인간성에 대한 절망적인 갈망’(409)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전체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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