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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근대인들의 오이코노미아

법칙과 기적

1.1. 파스칼의 증언에 따르면 신학자들(제수이트들, 몰리나주의자들, 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들, 얀센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저히 어찌할 도리 없이 갈라놓은 것은 다름 아니라 충분한(충족)’ 은총과 유효한(효력)’ 은총에 관한 질문과 관해서였다(p. 529-530).

 

섭리에 의한 통치 도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은총(충족 은총이든 효력 은총이든) 어떻게 규정할 지를 둘러싼 큰 혼란이 군림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용어를 둘러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배후에는 하느님의 세계 통치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숨어 있었다(p. 531).

 

섭리에 의거한 세계 통치는 통치하는 자의 행동(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은총)과 통치 받는 개인들의 자유의사 사이의 이루기 힘든 균형의 결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p. 532).

 

1.2. 말브랑슈의 자연과 은총에 대한 논고

하느님의 통치를 어떻게 절대화하는가이 절대화는 제2원인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키게 되었다(p. 532).

 

섭리에 의거한 행위의 주체는 하느님의 의지이다.

 

나는 하느님은 당신이 정해놓은 일반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 일반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개별 의지가 일반 법칙과 독립적으로 효과를 창출할 때 하느님은 개별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하느님이 나의 내부나 외부에서 어떤 원인도 내 몸에 작용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에 찔린 듯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면 그리고 만약 다른 물체가 충돌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개별 의지, 즉 기적의 결과일지도 모른다(p. 534).

 

말브랑슈의 전략은 섭리에서 개별 의지를 거의 완전하게 배제하고, 하느님에 의한 세계 통치 문제를 일반 의지와 그가 기회 원인이라 규정하는 원인들 사이의 관계로 환원시키는 데 있었다.

 

말브랑슈에 따르면 다수의 개별 의지보다는 단순하고 일반적인 방법에 따라 행위 하는 것이 하느님의 현명함에 더 잘 어울린다(p. 535).

 

섭리에 의거한 통치 패러다임은 기적이 아니라 법칙이다. 개별 의지가 아니라 일반 의지이다(p. 536).

 

이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섭리로 가정하는 것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악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대지의 과실에 무익하거나 유해한 비도 하느님이 세계에서 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정해놓은 운동 전달의 일반적 법칙의 필연적 결과이다.”

 

어떤 일을 실행하기 위해 기회원인을 선택하고 일반 법칙을 정한다는 것은 매순간 의지를 변경하거나 개별 의지에 의해 행동하는 것보다 무한대로 더 포괄적인 지식을 갖고 있음을 가리킨다. 즉 하느님은 일반 의지에 따라 당신의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얼마나 유효한 지는 기회 원인에 의해 규정된다(p. 537).”

 

자연이란 신이 대단히 단순한 방법으로, 항상 여일하고 지속적인 행위로 당신의 일을 구축하거나 보존하기 위해 정해놓은 일반 법칙에 다름 아니다(p. 538).

 

1.3. 섭리에 의한 통치와 관련해 말브랑슈가 그리스도론에 배당하는 기능은 모든 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칭송받을 만한 원인으로 행동한 희생 이후 아버지인 신에 의해 은총의 기회원인으로 구성되며, 이로 인해 하느님이 일반 법칙을 통해 정해놓은 은총을 개개인들 속에서 유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증여를 기회원인으로 적용, 분배한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큰 사랑을 받은 아들처럼 하느님의 집에서 모든 것을 배치한다(p. 539).”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최고의 입법자로 하는 통치의 총무로 일한다(p. 540).

 

하느님은 기도나 바람을 통해 하느님의 의지가 유효함을 인간으로서 규정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심부름꾼을 통해서만 베풀 수 있지만 아무튼 참된 내적 은총을 베푸는 것은 역시 하느님, 단지 하느님뿐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1.4.

말브랑슈의 논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가능한 최고 통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이다(p. 542).

 

최고의 통치는 의지와 지혜 사이에서 또는 말브랑슈의 말을 빌리자면 질서 및 항상성을 목표로 하는 지혜와 풍부함 사이에서 가장 오이코노미아[경제]적인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 통치가 될 것이다.

 

말브랑슈의 명제들은 그것들이 참된 영역, 세계 통치라는 영역에 놓일 때만 비로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묻는 것은 하느님은 전능한가, 무능한가라는 추상적 문제가 아니라 세계 통치는 가능한가, 즉 일반 법칙과 개별적인 기회원인 사이의 질서 있는 관계는 가능한가 이다(p. 545).

 

하느님은 주권자로서 군림해야지 통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일반 법칙, 즉 일반 의지를 정하고 기회원인이나 개별 의지의 우연적이 놀이가 가장 오이코노미아[경제]적으로 실행되도록 맡겨야만 한다.

 

말브랑슈와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도 하느님은 항상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방법을 선택한다고 단언한다(p. 547).

 

악의 기원 및 필연성 문제와 관련해 라이프니츠가 자신의 학설에서 어떤 결론을 끌어내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의 지혜는 가능한 모든 세계를 포함하며, 그것을 비교하고 음미해 무엇이 완성도가 높고 낮은지를 알아챈다는 것이다(p. 548).

 

이 모든 비교와 성찰의 결과는 모든 가능한 설 중 선을 충만하게 만족시키기 위해 지혜를 통해 이루어지는 최선의 선택이며, 이것이 현재 우주의 구도이다(변신론).”

 

하지만 가능한 세계 중 최고의 것을 선택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그러한 최고의 세계 속에도 일정한 양의 악, 고통, 고뇌가 필연적인 부가적 결과로 포함되는 것이 그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경우 패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p. 549).

1) 법적도덕적 차원의 것으로 변신론이라는 제목 자체에 표현되어 있는 의도, 즉 신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관련되어 있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통해 하느님을 정당화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상상 가능한 최악의 곡해이다.

2) 정치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세계 통치의 도구로서 (일반 의자라는) 법칙의 필요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다소 궤도를 벗어난 이 생각에 따르면 만약 일반 의지가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을 필연적 결과로 요구한다면 기형적인 것들도 규칙 안에 있는 것이 되며, 이 때문에 규칙은 기형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1.5. 루소의 정치 이론과 말브랑슈

루소가 말하는 일반 의지는 말브랑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에 상응하는 범주의 세속화로 아무런 의문의 여지도 없이 규정될 수 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 아르노부터 파스칼에 이르는, 말브랑슈부터 페늘롱에 이르는 프랑스 신학 사상이 루소의 모든 저작에 중대한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입증한다(p. 550-551).

 

말브랑슈에게서 일반 의지라는 관념은 하느님이 가진 무한성이라는 속성과 동의어로, 일반성이 유한할 수 밖에 없는 루소의 국가라는 세속적 영역으로 이 무한성을 이동시키는 것을 모순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논의를 국한시키고 있다.

 

우리는 일반 의지’, ‘개별 의지라는 관념과 함께 섭리에 의한 통치 기계 전체가 신학적 영역으로부터 정치적 영역으로 이동하며, 그리하여 루소의 공적 오이코노미아의 몇몇 사항을 위태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주권과 통치의 관계, 법과 집행 권력[행정력]의 관계라는 기본적 구조를 부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볼 것이다.

 

1.6. 안전영토인구에서 푸코는 불과 몇 줄 안 되는 극히 밀도 높은 문장 속에서 루소의 정치적 기획의 기본 구조를 규정하고 있다(p. 552). 푸코는 여기서 주권 문제는 통치술이 유럽 정치에서 최전면에 등장했을 때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루소의 주권 이론은 분명히 통치 이론(또는 루소가 종종 규정하는 대로 공적 오이코노미아”)으로 기능한다(p. 553).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루소의 정치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주권과 통치의 구별과 분절화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이 구분은 한편으로는 일반 의지와 입법권 그리고 다른 한편의 통치와 집행권 사이의 분절화로 다시 한 번 주장된다. 이 구분이 루소에게서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음은 그가 그것은 분할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인하며 오히려 하나의 불가분한 최고 권력의 내적 분절화라고 주장하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p. 554).

 

주권은 양도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분할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학자들은 주권을 원리적으로 분할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대상에 따라 분할하고 있다. 이런 오류가 생긴 것은 주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지 못한 데서 연유하며, 주권의 단순한 파생물에 불과한 것을 주권의 일부로 잘못 생각한 데서 기인한다(p. 554-555).”

 

말브랑슈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회원인은 하느님의 일반 의지의 개별적 현실화[실현]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루소에게서 통치 또는 집행 권력[행정력]은 법의 주권과 일치한다고 주장된다.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와 섭리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분할되지 않는 것은 주권 권력/통치, 일반 의지/개별 의지, 입법권/집행권이라는 구분에 따라 분절화된다. 이 구별은 자체 내에서 루소가 공을 들여 최소화하려고 했던 일련의 분단들을 표시한다.

 

1.7. 이 구분들을 통해 오이코노미아적섭리적 장치 전체가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유산으로 근대 정치로 전달된다(p. 557).

 

정치적 정당화로 변장한 이러한 신학적 장치의 가장 불길한 귀결은 그것이 민주주의 전통으로 하여금 통치와 통치의 오이코노미아를 사유할 수 없도록 만들어놓는데 있다(p. 557).

 

통치 문제를 일반 의지와 법의 단순한 집행으로 제시함으로써 해결하는 듯이 보이는 모호함은 근대 민주주의 이론뿐만 아니라 근대 민주주의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무겁게 짓눌러왔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통치와 오이코노미아[경제]가 모두 의미를 빼앗긴 인민 주권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목도한다면 그것은 아마 서양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루소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신학적 유산을 받아들인 데 따른 정치적 대가를 지불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잇다(p. 558).

 

통치를 집행권력으로 파악하는 데서 유래하는 모호함은 서양의 정치 사상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몇 가지 결과를 가져온 오류 중의 하니이다. 그것은 근대의 정치적 사유가 법, 일반 의지, 인민 주권 같은 추상적 개념들과 공허한 신화소 속으로 사라져, 어떤 의미에서 보든 결과적으로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미결 상태로 내버려두고 마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우리의 연구는 정치의 진정한 문제, 정치의 중심적 비밀은 주권이 아니라 통치, 하느님이 아니라 천사, 왕이 아니라 심부름꾼, 법이 아니라 내정즉 이것들이 형성하고 유지하는 통치 기계임을 보여준다.

 

א 왕정적 주권과 인민민주주의 주권이라는 두 주권은 완전히 다른 두 계보를 가리킨다. 신적 권리를 가진 왕정적 주권은 정치 신학적 패러다임에서 유래한다. 이에 비해 인민민주주의적 주권은 신학적오이코노미아적섭리적 패러다임에서 유래한다(p. 558-559).

 

2. 보이지 않는 손

2.1.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는 중세가 진행됨에 따라 서구의 신학적 언어로부터 모습을 감췄다(p. 560).

 

오이코노미아에 관한 계보학적 연구는 우리가 본질적 특징들을 그려내려고 한 신학적 패러다임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데 유용할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p. 561).

 

2.2.

자연의 오이코노미아는 단순히 창조자가 피조물에게 각인해놓은 섭리에 의거한 현명한 배치, 하느님은 이러한 배치를 통해 피조물을 당신의 목적에 따라 통치하며 이끈다(p. 563).

 

자연의 내정에 관한 아카데미아적 논고에서 자연의 오이코노미아자연의 내정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지만 이때쯤 확고하게 굳어지는 내정학의 용어법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인간 사회의 질서, 내적 구성에 관한 인식과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3.

동시대인들에게서 오이코노미아주의자[경제학자]라는 종파라고 불린 사람들즉 중농주의자들에겐 자연의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은 이러한 전제들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이었다(p. 564).

 

만물에는 자연적 질서가 각인되어 있다는본질적으로는 신학적인이러한 이념은 오이코노미아주의자[경제학자]’의 사상에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치적 오이코노미아[정치 경제학]’라고 부르는 이 학문은 질서의 학문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였다(p. 567).

 

중농주의자들의 오이코노미아[경제]의 학은 자연의 질서를 사회들에 대한 통치적용하고옮겨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자연은 신에 의한 세계 통치라는 패러다임에서, 즉 일반 법칙과 개별 사례, 1원인과 제2원인, 목적과 수단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P. 569).

 

세계 통치의 토대를 놓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로, 그것은 동시에 피조물들을 서로 연결 지어 통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내재적 관계들의 촘촘한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정치적 오이코노미아[정치 경제학]는 섭리적 오이코노미아의 사회적 합리화로 구성되어 있다.

 

2.4. 마루비는 스미스에게서 자연의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입증한 바 있다(p. 570).

 

스미스는 자연이라는 저자가 최종 원인과 제2원인, 목적과 수단 사이에 확립해놓은 연관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파악 방식과 섭리 패러다임 사이의 친화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우리가 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정육점 주인, 술집 주인, 빵집 주인의 선의가 아니라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으로부터이다(국부론)”라는 유명한 구절은 페로에 의하면 니콜과 파스칼에게서 유래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비유법의 계보에 대해 질문할 때는 이러한 관점에 따라야 한다(p. 571).

 

아가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느님은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숨어있는 손짓으로 세계를 통치하고 운영한다(p. 572).

 

자유주의는 내재적 질서-통치-라는 극의 우월이 초월적 하느님-왕국-라는 극을 거의 제거하기에 이르기까지 극단으로 밀고나가는 경향을 표상한다.

 

2.5.

하느님에 의한 세계 통치는 너무나 절대적이며 피조물 안에 너무나 깊게 침투해 있어 하느님의 이지는 인간들의 자유 속에서(또한 인간들의 자유는 하느님의 의지 속에서) 소실된다(p. 576).

 

이 지점에서 신학은 무신론으로, 섭리주의는 민주주의로 해소될 수 있다. 하느님은 마치 세계가 하느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세계를 만들고 세계가 마치 스스로 통치되고 있는 것처럼 세계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근대는 세계로부터 신을 제거하면서 신학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저 섭리적 오이코노미아라는 기획을 완성시켰을 뿐이다(p.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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