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니오베의 교만>

 

 

 

 

폭력비판을 위하여(1921)

 

 

폭력비판이라는 과제는 그 폭력이 법과 정의와 맺는 관계들을 서술하는 작업으로 돌려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원인이 어떻게 작용하든 간명한 의미에서의 폭력이 되는 것은 그 원인이 윤리적 상황에 개입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들의 영역은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지칭된다. 둘 가운데서 우선 법을 두고 보자면 모든 법질서의 가장 원초적인 기본 관계는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점은 분명하다.(80)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파업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이 바로 그 경우이다. 조직된 노동자 계급은 오늘날 국가 이외에 폭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법적 주체이다.(86)

 

파업이 결국 보여주는 것은 행동의 중지, 비행동인데 그것은 전혀 폭력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이의가 제기된다. 그러한 생각은 아마 국가권력이 파업권을 허용하는 일을 더는 회피할 수 없었을 때 그것을 허용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국가의 견지에서 볼 때 노동자들의 파업권에는 폭력에 대한 권리보다는 그러한 폭력을 벗어날 권리가 허용되어 있는 것처럼, 그러한 점에 상응하는 파업, 단지 사용자들에게 등 돌리기소외를 표명하기만 하는 파업의 경우가 새여날 수 있다.(88)

 

국가의 관점과 대립해 있는 노동자들의 관점에 따라 보면, 파업권은 일정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이룬다. 두 견해에서의 대립은 혁명적인 총파업이 대두했을 때 날카롭게 드러난다. 총파업에서 노동자들은 매번 자신들의 파업권을 주장할 것이지만, 국가는 파업권이 그런뜻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이러한 주장을 남용이라고 부르면서 비상조치법을 반포할 것이다.

 

왜냐하면 입법자들에 의해 전제된 파업의 특수한 계기가 모든 기업체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닌데도 모든 기업체에서 파업을 동시적으로 벌이는 것은 불법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국가의 재량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 속에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 표현되는데, 그 법적 상황에 따르면 국가는 그것의 목적을 이따금 자연적 목적들로 무관심하게 대하다가(혁명적 총파업 같은) 심각한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대하는 어떤 폭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태도는 그것이 능동적일 때 폭력으로 불릴 수 있다. 그것도 어떤 태도는 그것이 능동적일 때 폭력으로 불릴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그 권리를 부여한 법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행사할 때가 그런 경우다. 그러나 그 태도가 수동적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폭력으로 불릴 수 있는데, 바로 위에서 전개한 성찰의 의미에서 그것이 협박일 경우에 그러하다.

 

그렇게 때문에 법이 파업하는 사람들을 폭력적인 사람들로 보고 일정한 조건에서 폭력을 써서 대처한다면 그것은 법적 상황에서의 객관적인 모순을 증명해줄 뿐이며, 법에서의 논리적 모순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파업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두려워하는 폭력의 기능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본 연구가 폭력비판의 유일하게 확실한 토대로서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8)

 

전쟁권의 가능성은 파업권의 가능성과 꼭 마찬가지로 법적 상황에서의 객관적 모순에 바탕을 둔다. 즉 법적 주체들이 폭력을 승인하는데, 승인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폭력의 목적이 자연적 목적으로 남아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법적 주체 자신의 법적 목적이나 자연적 목적과는 심각한 경우 갈등관계를 빚을 수 있는 모순이 그것이다.(89)

 

국가는 이러한 폭력을 전적으로 법정립적인 것으로서 두려워하는데, 이는 외부의 힘들이 국가에게 전쟁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계급들이 자신들에게 파업권을 인정하도록 강요할 때 국가가 그러한 폭력을 법정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안ㄹ을 수 없는 데서 엿볼 수 있다.(90)

 

폭력의 기능이 갖는 이중성은 국민개병제도를 통해서 비로소 형성될 수 있었던 군국주의에서 특징적이다. 군국주의는 폭력을 국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끔 나드는 강박이다.

 

앞서 고찰한 폭력의 기능이 법정릭적 기능이라면 두 번째 기능은 법보전적 기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군역의 의무는 법보존적 폭력의 적용 사례로서 그 어떤 것으로도 원칙적으로 변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효과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은 평화주의자들과 행동주의자들의 선언이 기도한 것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91)

 

오히려 그 비판은 모든 법적 폭력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해 법적 또는 행적적 폭력에 대한 비판과 합치하며 그보다 적은 프로그램을 가지고서는 전혀 수행할 수 없다.(92)

 

사형제도에 대한 반론은 형량이러든지 법률이 아니라 법 자체의 원천을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폭력이, 운명적으로 등극한 폭력이 법의 원천이라면, 폭력 중에 최고의 단계라고 할 수 있는 폭력에서, 즉 그 폭력이 법질서에 등장하는 곳에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폭력에서, 그 폭력의 원천들이 현존하는 것 속으로 전형적으로 튀어나오게 되며 그 현존하는 것 속에서 끔찍한 형태로 발현한다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사형의 의미는 범법 행위를 처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법은 그 어떤 다른법 집행보다 생사여탈의 폭력을 행사하는 데에서 스스로를 확인하기 때문이다.(94)

 

이 두가지 폭력이 사형제도에서보다 훨씬 더 비틀린 결합 속에서, 마치 유령 같은 혼합 속에서 현대 국가의 제도 속에 나타나는 또 다른 곳이 바로 경찰이다. 경찰은 물론 법적 목적을 위한 강제력(처분권)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강제력을 광범위한 영역에서 스스로 설정하는 권한(명령권)을 갖고 있다.(95)

 

즉 경찰의 정신은 경찰이 절대군주의 모습으로 입법적 전권과 행정적 전권이 통합되어 있는 지배자의 강제력을 과시할 때가 그래도 덜 끔찍했다는 사실이다. 경찰의 정신은 그 존재가 그와 같은 절대군주적 관계로 보호받지도 않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가장 심하게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든 폭력은 수단으로서 법정립적이거나 법보존적이다. 폭력이 이 두 술어 중에 어느 것에 대해서도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그로써 그것은 스스로 모든 타당성을 포기한 셈이다.(96)

 

특징적이게도 의회의 퇴락 때문에 정치적 갈등에 대한 비폭력적 중재라는 이상으로부터, 어떠면 전쟁 때문에 이 이상을 받아들인 경우만큼이나 많은 정신들이 등을 돌린 것 같다. 평화주의자들에게는 볼셰비키주의자들과 생디칼리스트들이 대립해 있다.(98)

 

아마 거짓말을 원초적으로 처벌하는 입법은 지구 상에 없었던 것 같다. 이 사실에서 바로 폭력이 전혀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비폭력적인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이 웅변되고 있는데, 본래의 의사소통의 영역, 즉 언어의 영역이 그것이다. 나중에야, 그리고 독특한 퇴락의 과정 속에서 법적 폭력이 그럼에도 그 영역에 침투해 들어왔다.(99)

 

법이 파업권을 용인하는 이유는 법이 스스로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폭력적 행동들을 제지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동자들은 곧장 태업에 돌입했으며 공장에 불을 지리곤 했다.(101)

 

두 가지 본질적으로 상이한 종류의 파업이 있는데 이것의 가능성은 이미 고찰하였고 여기서 더 상세하게 특징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 두 종류의 파업을-순수하게 이론적인 성찰보다는 정치적인 성찰을 토대로-처음으로 구별한 것은 조르주 소렐의 공적이다. 소렐의 파업을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으로 대립시킨다.

 

이와 같은 정치적 총파업에 비해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국가권력의 타도라는 유일한 과제를 떠맡는다.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모든 가능한 사회정책이 가져올 모든 이데올로기적 결과들을 배제한다. 그 파업의 지지자들은 가장 대중적인 개혁들까지도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총파업은 스스로 국가를 지양하고자 한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써 정복을 통해 얻을 물질적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첫 번째 형식의 작업 중단은 그것이 노동조건의 외면적 수정만을 유발하기 때문에 폭력이라면, 두 번째 형식의 작업 중단은 순수한 형식으로서 비폭력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면적인 양보와 모종의 노동조건상의 수정에 따라 다시 작업을 재개할 태세를 갖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적으로 변화된 노동, 국가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노동만을 재개하려는 결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전복인데, 이와 같은 종류의 파업은 이러한 전복을 유발하기보다 오히려 수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파업들 중 첫 번째 파업은 법정립적인 파업인 반면, 두 번째 파업은 무정부주의적 파업이다. 마르크스가 간간이 했던 언급들에 부응하는 가운데 소렐은 혁명적 운동을 위한 모든 종류의 프로그램, 유토피아, 요컨대 모든 종류의 법규범의 정립을 배격한다.

 

총파업과 함께 이 모든 좋은 것들은 사라진다. 혁명은 명확하고 단순한 봉기로 나타나며, 사회학자들을 위해서나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아마추어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해 사유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지식인들에게도 아무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103)

 

정치적 총파업보다 더 비윤리적이고 조야한 성격을 보여주는 뛰어난 사례로서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볼 수 있던, 봉쇄와 유사한 형태를 보여준 의사들의 파업이 있다.

 

이 파업에서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무자비한 폭력 행사의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시도를 하지 않은 채 죽음에게 자신의 먹잇감을 확보해주다가 처음 기회가 생기자 생명을 마음대로 방치해버리는 직업군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104)

 

자연법이나 실정법 모두가 예상하는 폭력의 전 영역에서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서 벗어나 있을 폭력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계사적인 존재 상황의 세력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념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과제들에 대해 어떻게든 생각 할 수 있는 해결에 관한 그 어떤 관념도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전적으로, 원칙적으로 배제한 가운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채로 머물기 떄문에 모든 법 이론이 포착하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그 두 이론에 공통된 근본적 도그마, 즉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에 사용될 수 있다는 도그마의 진리에 대한 물음도 제기된다.(105)

 

신화적 폭력은 그것이 갖는 원초적 이미지의 형태를 두고 볼 때 신들의 단순한 발현이다. 그것은 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신들의 의지의 발현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선 신들의 존재의 발현이다. 니오베의 신화는 그러한 폭력에 대한 탁월한 예를 담고 있다.

 

니오베의 교만은 자신 위에 내릴 숙명을 불러내는데, 그것은 그가 법을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게 싸움을 걸어 도발하기 때문이며 이 싸움에서 운명이 승리할 수밖에 없고 법을 일단 승리 속에서 드러낼 뿐이다.(107)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 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면서 동시에 속죄를 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111)

 

신화적 폭력은 그 폭력 자체를 위해 단순한 삶에 가해지는 피의 폭력이고, 신적 폭력은 살아 있는 자를 위해 모든 생명 위에 가해지는 순수한 폭력이다. 전자는 희생을 요구하고 후자는 그 희생을 받아들인다.

 

이 신적 폭력은 종교적 전승을 통해서만 입증되지 않고 적어도 성화된 발현 속에서 오늘날의 삶에서도 발견된다. 완성된 형태의 교육적 폭력으로서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이 그러한 신적 폭력의 현상 형식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신적 현상형식들은 신 자신이 폭력을 기적 속에서 행하는 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피를 흘리고 않고 내리치며 면죄해주는 수행의 요인들을 통해 정의된다. 마지막에는 모든 법정립의 부재를 통해 정의된다. 그 점에서 이러한 폭력을 파괴적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 폭력은 단지 상대적으로, 즉 재화, , 생명과 같은 것과 관련해서 파괴적인 것이지, 결코 살아 있는 자의 영혼과 관련해서 절대적으로 파괴적인 건 아니다. 물론 그처럼 순수하거나 신적인 폭력을 확장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에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112)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만 정향할 뿐인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인 것과 법보존적인 것으로서의 폭력의 형상들에서 변증법적 부침 정도를 감지해낼 수 있을 뿐이다.(115)

 

신화적 법 형식들의 마력 속에 머무는 이러한 순환 고리를 돌파해내는 데에서, 법과 더불어 그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국가폭력)을 탈 정립하는 데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116)

 

모든 신화적 폭력, 개입하여 통제하는 폭력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정립적 폭력은 배척해야 마땅하다. 그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된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보존적 폭력 역시 배척해야 마땅하다. 성스로운 집행의 옥새와 인장이지 결코 그것의 수단이 아닌 신적 폭력은 베풀어 다스리는 폭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117)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