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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성을 사유하기≫ 후기

≪성을 사유하기≫를 출간한 1984년과 지금(1992년)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성을 고민하며 글을 쓰고, 성을 법제화하고, 거리에서 현장 조사를 하고, 법정에서 성을 다루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액트업, 퀴어네이션, 포모호모스, 보이위드암스아킴보 같은 단체들과, “나쁜여자!”를 부르짖는 젊은 레즈비언들이 활약하고 있다. 게이와 게이 정체성 정치 연구, 포스트모던 성 정치, 스타일, 학술 연구도 크게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미국의 섹슈얼리티 정치는 우파의 확고부동한 결집력과 종교 근본주의의 압력 탓에 완전히 우편향됐다. 법무장관 산하의 포르노그래피 위원회, 소도미법을 유지하겠다는 대법원의 결정, 로큰롤 가사 내용을 비난하는 학부모 음악자료센터, 질병관리센터 에이즈 교육 문건의 ‘노골적 성행위’ 금지 조항 등등. 보수파의 연방정부 장악 여파는 지독하고 압도적이다.

파멸로 가는 길
지난 10년간 성 공황을 상징하는 주제들은 한데 얽히며 강화되어 왔다. 포르노그래피는 아동에 대한 위협으로 취급되고, 동성애는 에이즈와 혼동되며, 사도마조히즘은 에이즈나 동성애와 하나로 여겨지고, 로큰롤과 랩은 섹스·에이즈·사도마조히즘과 아동 포르노그래피로 묘사된다. 이는 대중적 히스테리, 법 개정, 규정 조정에 불을 붙였다.
1985년 레이건 정부의 법무장관 에드윈 미즈는 포르노그래피를 연구하고 연방 정책과 법률 제정을 위한 권고안을 만드는 위원회의 위원을 임명했다. 이 ‘미즈위원회’에는 포르노그래피를 유해한 사회악으로 보는 보수파들로 가득 찼다.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반포르노그래피에 관한 매우 엄격한 법제화, 정책, 기금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으며, 이 중 엄청난 수의 안건이 실제로 실행되었다. [미국 법무부는 외설부서를 만들고 외설 사건 기소에 복무하는 검사를 늘렸다. 정부는 외설로 유죄 선고를 받은 개인의 자산을 동결하기 위해 RICO(공갈매수및부패조직방지법)의 몰수 권한을 사용해 왔다. 연방대법원은 노골적 성적 언어가 포함된 전화 전송을 제한하는 법안을 확정했다.]
반포르노그래피 법제화 과정과 집행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서, 페미니스트들은 반포르노그래피 정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반포르노그래피 의제를 계속 밀어붙이는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우익 정치인과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매키넌, 드워킨, 라이트홀트). 이들의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포르노그래피’를 ‘외설’과는 구분되는, 민사소송의 근거가 되는 범주로 만드는 것. 둘째, 포르노그래피가 성차별적 실천이라는, 명목상으로는 ‘페미니즘적인’ 정의를 법으로 성문화하는 것. 미국 대법원이 ‘포르노그래피’라는 법적 범주를 위헌으로 선고함에 따라,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들은 새 법적 범주를 만드는 일은 포기했다. 그 대신 기존 범주인 외설과 아동 포르노그래피에 의존해 포르노그래피를 민사소송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상원 상정 예정인 법안 제1521번, 포르노그래피피해자보상법은 우익 보수주의자들과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의 지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이 법안은 외설물을 민사소송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법에 따르면 외설물이 그 범죄를 ‘야기’했다는 근거를 보여 줄 수 있는 경우, 성범죄 피해자는 외설물 생산자와 배급업자에 소송을 걸 수 있다. 즉 이 법안은 외설물에 대한 제3자의 책임을 묻고, 범죄 가해자가 아닌 제3자를 고소할 수 있게 한다. 이 제3자가 실제 가해자가 영감을 받았을지 모르는 서적이나 영상물의 생산과 배포에 연루되었을 뿐이라도 말이다.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법안이 시대에 뒤쳐진데다가 전혀 페미니즘적이지 않은, 불법 재현의 범주에 불과한 외설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이를 지지하고 있다.

상상하기 힘든 시대의 삶
성 정치가 그간 저지른 오류는 많고, 이와 관련해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하는 것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이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 초반 이후에 성 공황과 성 정치에 주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누구도 잇따른 사건들을 예측할 수 없었다.
1989년 극우파 제시 헬름스 상원의원의 통과시킨 ‘헬름스 수정조항’은 “성행위에 참여하는 개인, 아동 성 착취, 동성애, 사도마조히즘을 묘사를 포함하지만, 꼭 이것들에만 국한되지 않는 [모든] 외설물”에 국가예술기금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조항은 에이즈로 죽은 게이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회고전에 바로 적용되었다. 동성애 남성, 사도마조히즘 성애 행위, 다수의 아름다운 흑인 남성 누드, 부분적으로 옷을 걸치지 않은 어린아이들 사진 몇 점과 꽃 이미지가 포함된 그의 작품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우익 정치인들은 이를 근거로 예술을 위한 공적 기금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려 했다.
1991년 1월 데니즈 페리고는 ‘아이에게 수유하는 동안 흥분되는 게 흔한 일인지’ 커뮤니티센터에 전화 문의한 뒤 두 살 난 아이의 양육권을 잃었다. 어떤 형사고발도 없었음에도 사회복지국은 페리고를 성적 학대로 고소했다.
1990년 이후부터 동성애 서적과 성 관련 서적의 제작을 거부하는 인쇄소가 점점 늘어났다. 18개 인쇄소가 앨리슨 출판사의 ≪게이 섹스≫의 인쇄를 거부했고, 한 인쇄소는 레즈비언 성애 시집인 ≪여자를 원한다≫ 인쇄를 거부했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동성애 남성 포르노그래피 역사에 대한 학술연구도 노골적 성적 사진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다.
한편, 1991년 미국 정부는 10대의 성적 행동에 대한 5년간 조사 수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연구는 “청소년들을 임신의 위험이나 성 행위로 전염되는 질병, 특히 에이즈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 요인을 조사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제시 헬름스와 보수주의자들은 이 연구가 “동성애 라이프 스타일을 합법화”하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 결과 성 연구 기금은 10대들의 성적 금욕을 북돋는 프로그램으로 이전되었다. 이처럼 성에 대한 정보를 억제하는 것은 살인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정치인들이 동성애자, 성적으로 활발한 10대, 약물 중독자를 살해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 10년간 성 정치의 사건사고와 결과에서 우리는 몇 점의 그림을 얻었다. 그 그림은 어둡기 그지없다. 반포르노그래피와 반-성 정치의 위험을 경고했던 우리 중 누군가는 누누이 말해왔던 것이 입증되었다는 사실에 미미한 기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7장 ≪성을 사유하기≫ 추기

≪성을 사유하기≫ ‘후기’를 쓴 이후, 짧은 기간 동안 성을 둘러싼 중요한 변화와 사건들이 발생했기에 이 글을 덧붙인다. 반포르노그래피 주장의 법적 성문화, 사도마조히즘 재현과 실천을 범죄화하는 사례의 증가, 1992년 미국 선거에서 발생한 동성애자에 대한 맹공격이 그것이다.
1992년 2월 말 캐나다 대법원은 1970년대 후반 이후 반포르노그래피 메니스트들이 밀어붙였던 전선을 따라 외설의 정의를 정교화했다. 캐나다 법정은 매키넌-드워킨의 ‘시민권 반포르노그래피’ 조례의 정의와 유사한 언어를 채택했는데, 이에 따라 외설에 대한 법적 정의를 ‘인간 비하와 인간성 말살’로 보일 만한 성적 행위가 일부 묘사된 경우라고 기술하고 있다. 비록 캐나다와 미국의 법적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극우파인 미국 대법원이 이후 유사한 법적 용어의 선택을 고려한 것을 보면 캐나다의 결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상원법안 1521번의 논리는 캐나다 판례의 판결과 같은 가정에 근거한다. 지금 이 법안은 상원에 상정 중이다.
캐나다 판례의 판결은 그간 사소한 사건들의 법적 판례가 서서히 쌓이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의 반포르노그래피 활동가들과 검사들도 처음에는 외설법과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는 사건들에서 유사한 판례를 만들려고 했다. 따라서 검열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와 시민권 변호사들은 성희롱 사건에서 포르노그래피를 본질적으로 ‘해로운’ 것 혹은 ‘반여성’적인 것으로 칭하는 언어적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맥락에 상관없이 무조건 포르노그래피를 유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다).
캐나다의 동성애 활동가들은 외설의 새 정의가 게이와 레즈비언 매체를 반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캐나다의 새 외설 정의로 대담해진 경찰은 4월 30일 신체 결박과 삽입 묘사가 포함된 미국 레즈비언 섹스 잡지 ≪나쁜 태도≫의 판매를 외설법 위반으로 보아 ‘글래드데이북스’(게이 레즈비언 서점)를 급습, 서점 매니저를 기소했다. 5월 4일에는 서점 사장과 회사도 외설로 기소되었다.
S/M 성애물도 캐나다에서 불법이 되었다. ‘인간 비하와 인간성 말살’이라는 포르노그래피의 범주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성애 남성 S/M 성애물은 법원이 새 외설 기준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핵심 준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재판의 검사는 “폭력적이고 비하적인 게이 영화”를 재판부에 보여 준 덕분에 소송에서 이겼다고 언론에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학대당한 남성들이 여자처럼 다뤄졌다는 주장이 타당했음을 보여 줬다. 그리고 판사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지 않다면 남자들이 자신을 우리[여성들]의 처지에 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페미니스트 검사는 이성애 남성이 게이 영화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방어적 반응과 동성애 혐오를 이끌어 내기 위해 게이 남성의 섹스를 보여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반포르노그래피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증거 부족을 대체하기 위해 사도마조히즘에 대한 무지와 편협함을 이용해 왔다. 남성 동성애에 대한 무지와 편협함은 그들의 정치적 무책임과 기회주의를 보여 준다.
최근 영국의 법적 결정과 1992년 미국 선거도 같은 맥락을 담고 있다. 1990년 영국에서 16명의 남성이 서로 합의된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행위로 인해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다수가 징역형을 받았다. 참여자 중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음에도 경찰들은 그들의 행위를 집에서 기록한 섹스 비디오를 몰수하고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항소했지만, 2월 말 상소 법원은 “합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성인 남성 동성애자들의 합의에 의한 성행위에 징역형이 선고됐다는 사실은 불길하기 그지없다.
동성애 혐오는 올해 미국 선거의 주요 정치 전략이었다. 선거가 진행될수록 국가예술기금, 미국공영방송, 동성애 재현, 동성애 그 자체가 뜨거운 표적이 되었다. 패트릭 뷰패넌의 신나치주의적 폭언에서 댄 퀘일의 ‘가족의 가치’에 대한 완곡한 강조에 이르기까지, 동성애 대한 공공연하면서도 은밀한 공격은 1992년 선거 캠페인에서 두드러진 전략이었다.
한편 오리건의 우익 단체 오리건시민연대는 주 헌법을 개정하여 동성애, 사도마조히즘, 소아성애, 수간, 시체애호증에 관한 발의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이 발의안이 통과되면 그런 집단은 공공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고, 그 어떤 시민권 제정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하게 된다.
1992년 선거까지 4개월이 남았다. 표면상 진보적이고 선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계속해서 위험하고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온 퇴행적 정책을 반대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이제 그들 모두가 이 상황을 더 잘 알아야 한다.


9장 카타콤: 똥구멍 사원

샌프란시스코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같이 좀 더 큰 도시들만큼 가죽족들이 많진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성 관련 면허증의 전통, 사회적 관용, 도시 선거의 인구통계, 특정 동네의 경제적이고 물리적 특징을 포함하는) 지역적 요소들이 결합하면서 넓고 다양하며 가시적인 가죽 영토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 샌프란시스코 소마 지역의 가죽족 점유율은 밀집도나 확장 면에서 최고치에 다다랐다. 특히 1970년대에 새로운 종류의 가죽족 S/M 사회구조가 부상하면서 더 오래된 조직 형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성애 지향의 S/M과 가죽족 남녀들이 대중적으로 접근 가능한 단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뛰어난 파티들의 개화였다. 1970년대 게이 남성의 S/M과 가죽 파티는 조직, 정교화, 자본 투자 수준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대형 파티들은 충분한 이해와 숙련된 솜씨로 기획·실행되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카타콤은 1975년 문을 열었는데, 곧 주먹성교 파티 장소로 유명해졌다. 카타콤은 주먹치기(handballing)의 메카였다. 세계 도처에서 온 주먹성교자들은 카타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까지 순례를 왔다.
카타콤의 창립자인 스티브 매기천은 자기가 좋아했던 종류의 성적 강도에 스스로 편안하게 탐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길 원했다. 스티브는 예리한 눈과 장악력으로 카타콤을 운영했으며, 파티가 인기를 얻게 하기 위해 상당한 정보와 지식을 적용했다. 그의 파티 기술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다른 곳에서도 따라했다.
카타콤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파티에 초청받기 위해선 스티브의 초청 명단에 들어가야만 했다. 스티브가 아는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거나,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명단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외모가 아니었다. 강렬한 몸의 경험, 친밀한 정교, 남성 동료애, 즐기는 것이 중요했다. 스티브는 무례하거나, 약을 다룰 능력이 없거나, 즐기고 있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가차 없이 추방했다.
카타콤은 술을 전혀 팔지 않았는데도 응접실에는 바가 있었다. 후원자들은 맥주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바 뒤에 있는 얼음, 소다수, 커피머신 등을 알아서들 이용했다. 응접실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앉고, 친구들을 맞이하고, 약을 하고, 손톱을 다듬고, 일상 세계에서 ‘플레이 공간’으로 전환하는 공간이었다.
‘뒤쪽’ 응접실은 ‘앞쪽’과 구분되었다. 둘 이상이 연결되어 진지한 플레이를 할 준비가 되면 뒤쪽으로 향했다. 뒷방에는 담배, 음식, 술이 모두 금지되었다. 뒤쪽에는 ‘신부의 스위트룸’과 던전으로 구성된 두 개의 방이 있다. 신부의 스위트룸에는 거대한 물침대가 있는데, 많은 연애가 그 침대에서 성사되었다. 침대는 어마어마한 크기 덕택에 특별한 친밀감을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이상적 자리였다. 신부의 스위트룸 다른 쪽 벽면에는 붙박이 벤치가 줄지어 설치돼 있다. 3피트 정도 되는 너비에 푹신푹신한 패드로 덮여 있어 플레이하기에 편했다. 물침대를 지나면 스티브가 선호하는 장비 중 하나가 놓여 있다. 푹신한 매트리스로 덮여 있고 천장에서 늘어뜨려진 체인과 거대한 스프링이 매달려 있다. 가죽 발걸이에는 바텀의 다리를 올려놓을 수 있고, 전체를 위아래로 튕기며 앞뒤로 흔들 수 있다.
뒤쪽으로 더 가면 던전이 나온다. 던전에는 거대한 나무 기둥과 지주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목재 마루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 있고 코리스코 쇼트닝 기름이 얇게 발려 있다. 벽과 천장에는 거울이 있다. 방 중간에는 신체 결박을 위한 커다란 나무 십자가가 있는데, 그 십자가는 채찍질하기 좋은 곳이다. 독특하게 디자인된 푹신푹신한 결박 탁자가 오른쪽 벽을 따라 세워져 있다. 탁자의 발치 부분은 U자형으로 잘려 있어 탑이 바텀의 성기와 엉덩이 바로 앞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어 있다. 바텀의 다리를 공중에 떠 있게 만들 수 있도록 조금 위쪽에 가죽 발걸이가 달려 있다. 더 뒤쪽에는 두 개의 수술용 탁자가 있다. 이 탁자들은 의학용 장면이나 신중한 고문을 하기에 완벽했다.
던전 입구 옆에는 욕실이 있는데, 긴 수건걸이와 설치돼 있고 샤워기에는 관수용 호스가 부착되어 있다. 손님들은 집에서 관수 세척을 하고 와야 했지만, 호스는 애무하거나 응급 상황에도 이용 가능했다.

마찰 없는 섹스
주먹성교는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조이는 근육을 유혹하는 기술이다. 카타콤은 항문을 열고, 이완하고,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그 공간은 육체의 쾌락을 위한 탐험을 산만하게 만드는 모든 요소를 최소화하게끔 디자인돼 있었다. 환경은 최대한 깨끗하고, 안전하며, 따뜻하게 유지되었다. 장비들은 튼튼하고 견고했으며, 표면은 부드러웠다. 마루는 전혀 걸리는 부분이 없었다.
플레이 장소는 신체에 대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허벅지에 쥐가 나거나 요추에 압박이 가해지거나 하는 일 없이 항문, 성기, 젖꼭지 혹은 파트너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 많은 장비가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슬링, 물침대, 환자 이송용 침대, 서스펜션 승강 장치 모두 유동적이고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운동성 때문에 많은 힘을 쓰지 않고도 매달려 흔들거나, 꿈틀꿈틀 움직이거나, 튕기거나, 바닥에 내칠 수 있었다. 팔에 손상이 가거나 근육이 찢기는 사고를 상당수 막을 수 있었다.
크리스코 기름은 카타콤에서 빠질 수 없는 경험 중 하나다. 모든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매번 새로운 크리스코 깡통을 따서 부었고, 플레이 장소에는 어디서도 손이 쉽게 닿을 수 있게 크리스코 깡통을 배치해 두었다. 단골 하나가 말했듯이 카타콤에서의 섹스는 “딱 맞아 떨어지고, 편안하고, 리듬과 기름”이 충만한 것이었다. 카타콤에서의 섹스는 다른 시간대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좋은 주먹성교와 S/M은 엄청난 집중, 친밀감, 신뢰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가벼운 만남도 깊은 애정과 오랜 우정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카타콤 섹스는 자주 강렬하고 진지하지만, 또 장난기 많은 아이와 같은 성질을 띠기도 했다. 크리스코 싸움부터 포터 흡입하기 콘테스트, 그 외 짓궂은 장난들까지, 파티는 유머로 넘쳐났다. 화려한 표면의 방탕함은 낙하를 막거나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디자인된 수많은 체계에 의해 지탱되었다. 카타콤의 환경은 성인들이 거의 아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경이를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카타콤은 서구 근대사회에서는 거의 사용해 볼 수 없는 육체의 오감 능력을 탐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섹스하기 좋은 음악
훌륭한 사운드 시스템 덕분에 카타콤의 구석구석에서 음악을 들 수 있었다. 스티브는 뛰어난 디제이였다. 초반 시간대에는 느긋하면서도 들뜨게 하는 노래를, 파티가 시작되면 고조된 기운과 성적 암시를 풍기는 디스코를 선별해 틀었다. 늦은 저녁에는 보통 천천히 깊은 성교를 하고 강도 높은 고통의 여행을 하는데, 이때 좀 더 분위기 있는, 어두우면서도 위협적 느낌이 드는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바꾸었다. 이 음악 대다수는 사실 다른 맥락을 담고 있지만, 카타콤 파티 중에 그런 노래가 나오면 모두가 게이 남성 섹스 클럽을 위해 쓰인 곡처럼 느꼈다.
카타콤을 강타한 노래 중에는 베트 미들러의 <검은 가죽을 입은 기사>나 스캣 브라더스의 <밤에 걸어요> 같은 게이 가죽족 찬가가 있다. 또 생일이나 새해 같은 특별한 파티를 위해 만든 창작 노래가 불리기도 했는데, 올드 랭 사인의 곡에 “네 뒤로 들어간 주먹, 나의 사랑, 네 뒤로 들어간 주먹”이라는 가사를 붙인 세레나데를 새해 종소리에 맞추어 다 같이 부르기도 했다.

변태들의 오아시스
토요일 밤마다 정기적으로 열린 파티에서 주먹성교와 S/M은 서로 어긋나 있었다. 이는 전체 남성 가죽 공동체의 분열을 반영했다. 주먹성교자와 사도마조히스트는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있었지만, 1970년을 지나며 서로 다른 사회적 패턴을 지닌 집단으로 분화됐다.
다수의 진지한 사도마조히스트들은 크리스코 기름이 가죽을 망가트린다고 생각했고, 몇몇 주먹성교자들은 사도마조히즘에 예의와 격식이 부족하다고 분개했다. 다수의 주먹성교자들에게 S/M은 최악의 경우에는 야만성의 형식이고, 좋게 봐준다고 해도 평화로운 명상적 분위기를 시끄럽게 방해하는 행위였다.
카타콤 고객 대부분이 일차적으로 주먹성교에 관심이 있었지만, 곧 스티브의 연인 신시아 슬레이터를 필두로 카타콤이 여성에게 개방되고 성별이 섞이면서 S/M이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신시아가 데려온 패트 칼리피아는 금요일 밤에 카타콤에서 여성들의 S/M 파티 아디이어를 제안, 개최했다. 막 조직을 갖춰 가던 레즈비언 사도마조히스트들은 카타콤에서 파티 여는 법을 배워 갔고, 카타콤은 곧 신생 샌프란시스코 레즈비언 S/M 공동체에게 집이자 클럽하우스가 되었다. 1980년대에는 여러 성별과 성적 취향이 섞인 S/M 파티가 개최되었다. 게이 남성, 레즈비언, 양성애, 이성애자가 참여한 파티들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혼성 파티는 이후에도 계속 열리게 된다.

끝의 시작
1981년 8월 28일 이른 아침, 카타콤의 황금시대는 갑자기 끝난다. 스티브가 신부의 스위트룸에 있는 물침대에서 행복하게 뛰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카타콤은 실리적 이유로 문을 닫게 된다. 스티브가 남긴 장비를 산 남자가 동업자 몇 명과 함께 1981년 10월 30일 카타콤-II를 열지만, 인기를 얻지 못해 석 달 만에 문을 닫는다.
1982년 2월 13일, 스티브의 연인이던 프레드가 쇼트웰에서 카타콤을 재개장한다. 프레드는 카타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고 꼼꼼하게 복구했다.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쇄신을 꽤했다. 바닥에 나사로 부착된 오토바이, 새로운 예술품, 새로운 음악 목록 등을 만들었다. 카타콤에서의 사회구성도 변했다. 서로 다른 성별과 성적인 구성원이 더 잘 섞였다. 그러나 토요일 파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었다. 한편 마크 조플린과 칼라는 한 달에 한 번 ‘다운 앤 더티’라는 금요일 혼성 파티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이는 지역 S/M 공동체에서 소중한 유산으로 여겨졌다.

디쓴 결말
카타콤을 궁극적으로 파괴한 것은 에이즈였다. 에이즈의 영향은 복잡하고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타콤이 1982년 재개장할 때에도 에이즈는 여전히 저 멀리 있는 자욱한 안개 같은 것이었다. 에이즈에 대한 정보가 드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혼란 그 자체였다. 전염병 학자들은 에이즈의 원인이 미생물이며, 성적으로 옮겨진다고 이론화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미생물이 무엇인지, 혹은 전염 수단이 무엇인지 몰랐다.
1983년 안전한 섹스를 위한 지침이 등장했다. 이 권고는 경험에서 우러나온 어림짐작에 근거했다. 카타콤 사람들은 여기서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데, 모든 지침이 주먹성교를 안전하지 않은 섹스 목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건강 전문가들은 에이즈와의 관계와 상관없이 단순히 주먹성교가 본질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가정했다. 이 추정은 에이즈 교육 관련 자료에서 주먹성교를 안전하지 않은 행위 범주에 넣게 만들었고, 주먹성교를 하면서도 에이즈의 위험을 줄여나갈 지침서의 개발을 저해했다.
에이즈의 첫 연구 대상 집단에 주먹성교자가 많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또 주먹성교와 에이즈가 통계적으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에이즈와 주먹성교 간 상관관계는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인과적으로 설명되지 못한다. 한 가지 공통된 설명은, 주먹성교가 직장이 미세하게 찢기는 상처를 유발해 에이즈에 감염된 정액이 항문성교를 통해 혈관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미생물의 전염은 주먹성교 그 자체보다 항문성교가 더 원인이 될 수 있다. 좀 더 많은 데이터가 축적된 후에도 주먹성교는 안전하지 않은 성 실천 목록에 계속 포함되었다. 이후 항문성교가 에이즈의 주요 위험 요인으로 알려지고 안전하지 않은 성행위 목록에 올라가게 되지만, 콘돔을 사용한 항문성교는 그래도 안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 그 새 건강 지침이 주먹성교에 대해 팔꿈치까지 오는 길이의 고무장갑을 위험 감소 방법으로 제안하지 않았는지 수수께끼다.
1983년과 1984년에 카타콤은 빠르고 책임감 있게 반응했다. 프레드는 질병관리센터 대표단의 방문을 환영했다. 프레드에 따르면, 그들은 여태까지 본 섹스 클럽 중에서 카타콤이 가장 청결하다고 했다고 한다. 청결 규정은 점점 더 면밀해졌다. 매 파티 후에 강한 공업용 소독약으로 카타콤을 씻어냈고, 수건은 살균약에 넣어 세탁했다. “모든 성교 후에는 손을 씻으세요”라는 알림판도 붙였다. 질병관리센터가 콘돔 사용을 권장하자 프레드도 즉각 콘돔을 공급했다.
1984년 봄, 목욕탕과 섹스 클럽을 폐쇄시키려는 캠페인이 몰아쳤다. 대대적인 페점은 섹스할 기회와 함께 성교육의 기회도 제거해 버렸다. 폐점은 남성들이 거리, 골목, 공원으로 나가게 만들었으며, 그런 곳은 확실히 그들이 잃어버린 클럽보다 덜 안정하고 덜 청결했다.

잊히지 않기
카타콤은 사라졌지만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성공적 섹스 파티를 위한 레시피’ 외에도 카타콤의 태도는 많은 공동체에 깊게 뿌리 내렸다. 카타콤은 육체적 몸에 대한 매우 깊은 사랑을 표현했다. 항문 쾌락을 가능하게 했던 장소였던 만큼 어떤 신체 부위도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었다. 대부분 우리 사회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추구를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것과 유사하게 본다. 카타콤은 신체, 그리고 감각적 경험에 대한 신체의 능력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찬양하며 사랑한다. 잘 설계된 데다 솜씨 좋게 관리된 성적 환경의 조성은 흔히 ‘존중받는’ 시설의 건물만큼이나 많은 성취를 이뤄냈다. 마인섀프트, 인페르노, 카타콤은 자신들의 지역 공동체를 훨씬 넘어 영향력을 미쳤다. 이곳들은 다른 시간대와 다른 장소에 계속 영감을 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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