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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57과 64

알 수 없는 사용자 2017. 4. 20. 11:50

월 만 얼마를 지불하면 개봉관에서 상영된 지 석달쯤 지난 영화를 무한정 볼 수 있다. 이 고마운 영화 상품 덕분에 작년 2월 퇴임 후 수백편의 영화를 보았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본 경우도 많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한참 보다보면 이미 본 영화였던 것이다. 어제는 '인 디 에어'라는 영화를 보았다. 1년 322일 여행하며 고용주를 대신해서 직원을 해고하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영화도 작년에 보고 어제 또 본 것이다.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망각이 진행되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급작한 해고 통보를 받은 한 남자가 이렇게 격분하며 항변한다. "내 나이가 57살인데 어디 가서 다시 직장을 구한단 말이요?" 붉고 늙스레한 얼굴에 머리가 하얗게 센 그는 나에게  아버지뻘쯤 되는 사람으로 보였다. 잠시후 내 머리 속으로 64라는 숫자가 스쳐 지나갔다. 내 나이다. 그는 나보다 7살이나 연하였던 것이다. 나는 좀 놀랐다. 나는 잠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십 년 뒤의 내 나이를 말이다.      

 

이런 별로 즐겁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조금 미안해서다. 봄이 오니 너무 좋다. 연두빛 봄 말이다. 불과 몇 주전만 해도 이 세상에 없던 빛깔이다. 오늘만 봄빛이 아니고 내일도 모레도 봄이 난무할 것이다. 올해만 봄이 아니고 내년에도 내내년에도 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십 년 뒤의 그 다음해도 봄이 올 것이고 그 다음날도 봄일 터이다. 지금은 눈부신 사월이고 아직 계절의 여왕인 오월은 오지도 않았다.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가 지나도 사월은 남아 있다. 봄이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다. 십 년 뒤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연두와 분홍과 연애한다고 너무 욕하지 마시라.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십 년 뒤의 내 나이를 감안해주시라. 지금 행복해야할 나이라고 부디 이해해주시라.  어제와 오늘 봄 산책길에서 만난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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