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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379-4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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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p379-410 /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이하 부분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의 생산 관계, 다시 말해 피착취자와 착취자 그리고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는 특히, 지배 계급 이데올로기의 대대적인 주입 속에 포장된 몇몇 정해진 전문 지식으로 결국 귀결되는 내용을 통해서 재생산된다.”(377)

 

이데올로기에 대하여(379)

이데올로기(Ideology)한 인간, 한 사회 집단의 정신을 지배하는 관념들이나 표상들의 체계’(379)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살펴보는 것은 자신의 최초 직관’(379)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정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판단 혹은 행동을 하는 것의 시작점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이 논문에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자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380)

알튀세르는 특정 이데올로기들 일반의 이론은 있을 수 없다’(380)고 말합니다. 이는 종교도덕법률정치 등의 계급적 상태와 관점에 따른 이데올로기로서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데올로기들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그것들 바깥에 분명하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381)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데올로기 이론을 살펴보면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특정한 이데올로기면서도 관련되어 바깥에도 존재하는 외관상 모순적’(381)인 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알튀세르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없다”(381)는 표현을 빌리며, ‘이데올로기는 상상적인 임기응변적 물건과 같은 것(bricolage, 브리콜라주)’(381)이라서 실증주의적 맥락에서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발견됩니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살펴본바 이데올로기 자체에 역사란 없으며, 이데올로기는 꿈과 같고 현실적 역사의 전도된 반영’(382)으로서 실증주의적-역사주의적 맥락에서 부정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에게서 이데올로기에 역사가 없다는 표현은 다르게 설명됩니다. 그는 특정 이데올로기들이 그것들만의 하나의 역사가 있다’(382)고 주장할 수 있다 말하고, 이데올로기의 역사가 없음을 긍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의 비역사성은 전역사성으로, ‘역사 전체에서 한결같은 불변의 형태로 존재’(383)하는 것으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주장과 유기적 연관성을 가진다 표현하며, ‘무의식처럼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383)고 표현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가 편재해 있고 불변하기에, ‘사회적 계급들을 포함하는 사회 구성체들의 역사’(383)로서 전()역사로 불변하고 편재해 있기 때문에, 계급 투쟁과 계급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p.s. 우리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역사 안에서 생산과 노동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다.(384)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두 주장을 전개합니다. 먼저 부정으로서 제1주장으로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이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를 표상한다.”(384)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세계에 대한 이해들’(384)로서 말해집니다. 이런 이해들은 받아들여지기는 하지만 상상이자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됩니다. 표상적 위치로 현실을 암시하거나 해석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합니다. 이런 해석학적 전통은 기독교 교회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들은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을 상상적 형태로 표상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385)

존재 조건을 표상하기 위해 상상적 치환이 왜 필요한 걸까요? 이에 대한 두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종교계와 정치적 입장의 동맹 관계에 따라 복종을 꾸며내고 백성들을 예속시키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포이어바흐의 대답으로 더욱 심층적인 허위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는 인간들 자신의 존재 조건들을 지배하는 물질적 소외’(386)에 대한 표상을 갖는 것으로, 존재 조건 자체에서 소외가 야기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에는 인간들의 존재 조건으로서 세계에 대한 상상적 표상 속에 반영’(386)되며 우리들로 현실적 세계를 이해하게 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런 표상도 현실적 존재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자신들의 관계’(386)를 표상하는 것으로서 결국 관계에 의해서 표상되어 있다는 상상적 변질’(386)로서 관계의 상상적 성격’(386)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개인들이 생산 관계와 이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관계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387)로서 이데올로기임을 알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합니다. ‘개인들이 품는 표상은 왜 필연적으로 상상적인가? 그리고 이 상상적인 것의 본성은 무엇인가?’(387) 왜 우리는 현실 조건에서의 표상이 아닌, 관계를 통한 표상을 반영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2주장은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가 있다”(387)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순수 관념적인 표상이 아닌, 물질적 존재입니다. 앞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AIE)들에 대해 다루면서, 특정하고 상이한 이데올로기면서 국가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되고 있음을 밝힌바 있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국가 장치와 장치의 실천활동 속에 존재하며 물질적인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일면 자기 믿음의 관념에 따라 행동하는 이념적 장치로 보이지만, 특정 행동과 태도를 가지게 실천활동’(389)을 통해 참여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종속적 특징에서 물질성이 드러납니다. 이는 교회의 미사 참석, 무릎 꿇고 기도하는 방식 등 삶의 양식을 특정한 의식에 부합하기 위해서 결정하는 행동들에서, ‘자신의 관념에 따라 행동’(390)하는 것에서 관념이 자신의 물질적 신체와 행위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물질성으로 드러납니다. 관념과 행위를 연결하는 실천의식 속에서, 그 실천의 관례성에 따라서 조정되는 상황을 통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관념들의 존재는 물질적이다’(391)

주체는 다음과 같은 체계가 행동하게 만드는 범위 내에서 행동한다. 즉 그것은 물질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 속에 존재하고 물질적인 관례에 의해 조정되는 실천을 처방하는 이데올로기이다.”(392) 그렇기에 이데올로기에 있어 주체의 개념은 중요하게 언급됩니다.

1)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 아래서만 실천이 존재하고

2) 이데올로기는 주체에 의해서만, 그리고 주체들을 위해서만 존재(393)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성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393)

이데올로기가 구체적 주체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주체라는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394)고 말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이중적 구성 작용으로 존재하는데, “모든 이데올로기가 구체적인 주체들을 구성해 주는기능을 수행하는 한에서만 주체라는 범주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구성한다는 것이다.”(394) 인간은 이데올로기적 동물이면서, 자연스레 이데올로기 안에서 살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동어반복적인 설명의 아리송한 부분을 로고스의 관계(395), ‘명백하게 강제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에서 맞음처럼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395)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는 인정(reconnaissance)과 몰인식(méconnaissance)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문 밖의 라는 존재로서 혹은 그녀를 인정하는 물질적 관행에 따라 설명되고 있습니다.(396)



[그림1] 알튀세르(, 위키피디아), 호명(, 사진출처: 인문학공동체 에피쿠로스, by 이우)

(링크: http://www.epicurus.kr/Humanitas/114507)

우리는 항시적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언제나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나라는 주체로 인식되고 이를 실천하는 관례에서 혼동할 수 없으며 당연히 대체 불가능한 그런 구체적 주체’(396)로서 이데올로기적 관례의 안에서 명백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관례적인 실천의 기능적인 작동이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정의 의식’(396) 매커니즘에서 주체는 범주이자, 그 범주를 통해서 표상되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서 알튀세르는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체라는 범주의 작동을 통해서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로 호명한다.”(397)고 주장합니다. 이데올로기의 호명(interpellation) 작동을 통해서 각 개인들을 주체로 모집하고, 개인들을 주체로 변모시키며 작동하고 기능을 수행합니다. 호명되는 순간 그 주체는 되돌아보게’(398) 되는데, 이는 자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며, 호명의 자신을 인정하는 방식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적 현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것과 이데올로기의 존재는 단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398)

이처럼 이데올로기가 밖에서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안에서 일어나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주체화 양상들은, 이데올로기의 전역사성을 확인하는 것이자, 주체로서 확인되는 인정의 기능이 있지만, 이는 무의식처럼 몰인식의 기능 속에서 존재합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언제나-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해 왔다.…… 즉 개인들은 언제나-이미 주체이다.”(399)

바로 이와 같은 다소간 병리적인냉혹한 구조 속에서 기정 사실이 된 미래의 주체는 자신의위치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구조 속에서 그는 자신이 이미 성적 주체이며, 이 주체가 되어야한다.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제약고 사전 결정, 그리고 가족에서의 양육-길들이기에 이은 교육의 그 모든 의례들은 프로이트가 …… 무의식이라고 탐지해 냈던 것을 고려하여 연구했던 내용과 어떤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게 이해된다.”(400)

 

하나의 사례: 기독교의 종교 이데올로기(401)

그것으로 하여금 말하게’(401) 할 것이라는 표현처럼, 기독교와 종교 이데올로기는 AIE의 대표적 사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에 의한 창조와 사랑, 구원의 관계에 대한 평범한 담론은 신의 부름에 따라 기독교적 주체로 개인을 변모시키는 관계에서 매우 놀라운 담론’(402)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정을 통해서 주체로 호명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 다른 대문자 주체의 이름으로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모든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403)

신이 부르는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주체, 신에 속한 주체, 신에 예속된 주체, 대문자 주체에 의한 주체, 대문자 주체에 예속된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증거를 보면 그는 신에게 복종하고, 자신들의 백성들로 하여금 신의 명령에 복종하게 만든다.

따라서 신은 주체이고 모세와 신의 백성이 수많은 주체들은 신의 대화 상대자 호명된 자들, 즉 신의 거울들이고 반영물들이다.”(403)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구조, 유일하고 절대적인 대문자 주체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그 구조가 거울적이다. …… 모든 이데올로기는 중심에 고정되어 있고, 절대적인 대문자 주체는 중심의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여, 거울 같은 이중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무한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405)

알튀세르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거울적 구조가 주체들을 호명 - 주체의 대문자 주체에의 예속 - 주체와 대문자 주체 사이의 인정과 주체 자신의 주체 인정 - 예속이 지켜질 때의 보장이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설명한다.(405) 그리고 이런 관계에서 제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저절로 움직인다는 사실에서 AIE의 구조와 실제를 더욱 명백하게 알 수 있음을 설명한다.(406)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신비에는, 주체가 자주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과, 또한 예속을 통해서만 존재하기에 어떤 자유도 있을 수 없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상태가 드러난다.(406) 주체는 자연스럽게 되내이고 있지만, 이는 절대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며, 이데올로기의 개입이 있다는 것, 특히 생산 관계와 재생산의 구조 속에서 개인이 주체로 호명되고 계급적으로 특정지어지고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마는 그 구조적인 매커니즘을 통찰하는 것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날서있는 비판을 고찰해야 할 것입니다.

 

19691~4P. S. 407)

여기서는 알튀세르의 논문에서 보류된 질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생산 관계의 재생산을 실현하는 전체적 과정의 문제

- AIE가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그 관계는 추상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을 양성하고 생산 관계를 규정하는 계급적 매커니즘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재생산을 실현하는 전체적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미흡한 부분이 있으며, 생산 관계의 재생산의 문제는 계급 투쟁의 관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2) 하나의 사회 구성체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들의 계급적 성격의 문제

- 이데올로기 매커니즘의 물질성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 보았지만, 이는 현실적 이데올로기 형성물에 비해 추상적인 부분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데올로기가 AIE들을 통해 구현되고 계급 투쟁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하였지만, 이를 계급 투쟁적 요소로만 살펴볼 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배 계급의 이데얼로기가 지배적이 되는 것은 하늘의 은총 때문도 아니고, 국가 권력의 단순한 장악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AIE들을 확립했기 때문이며, AIE들 속에서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가 구현되고 스스로를 구현하며, 지배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확립은 저절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매우 힘든 중단 없는 계급 투쟁의 목표물이다.”(409) 이런 설명은 헤게모니적 경쟁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한 AIE 내의 계급 투쟁 또한 추상적인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계급의 관점에서 사회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 AIE를 설명할 수 있다고 정리하며 글을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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