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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전반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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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 pp 75~102

앞서 개벼크가 했던 내용을 보완하며 발제를 진행하겠습니다.

 

생산조건들의 재생산에 대하여(75)

생산의 최종적인 조건은 생산조건들의 재생산이다.”(75)라는 명확한 표현처럼, 이 명제를 깊게 사유했으면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 수준에서 생산활동이라는 말의 의미는 자명성을 띄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왜 재생산의 관점에 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표현했을까요? 존재와 실존의 문제로서 생산은 사회구성체의 근본적인 활동입니다. 하지만 이런 생산조건들이 재생산되지 않는다면 생산과정을 멈추게 되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생산 자체를 너무도 당연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산관계 안에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하는 생산력을 이용’(76)하여서 재생산할 수 있는 조건들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1)생산력, 그리고 2)현존하는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산수단들의 재생산(76)

생산수단들의 재생산이 보증되지 않는 한 생산은 불가능하다는 사실’(76)에서, 지속적으로 잉여를 생산하려는 자본가들의 메커니즘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한 기업적 차원에서 생산을 수준과 생산 필요성에 대한 조건이 아닙니다. 한 자본가의 생산을 위해서는 그 생산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다른 자본가들의 생산이 전제됩니다. 재생산의 조건에서 생산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것에 조건으로서 다른 생산조건이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이런 재생산의 조건으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 속에서 생산이 유지되고 지배적인 메커니즘으로 자리합니다. “끝없는 실”(77)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 연쇄의 메커니즘을 위한 이해를 위해 자본유통관계, 잉여가치 실현을 연구하면 이를 더욱 명확헤가 파악 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노동력의 재생산(77)

생산조건, 생산수단의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게, 생산력의 재생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침묵으로 지나쳤다’(77)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동력에 재생산의 물질적 수단을 부여’(78)하는데, 이는 임금으로 보장되고 있다 말합니다. 임금은 노동자본입니다. 우리는 임금을 노동력 지출에 따른 대가로 생각하지만 이는 단지 가치적인 표현일 뿐이며, 실제 임금은 노동자가 노동력을 회복하여 생산활동을 하도록 하는 재생산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수단입니다. 임금이 노동자의 생활,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필수적인 것이 되면서 모두 임금을 얻기 위해 생산조건의 재생산 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러닉하게도 임금은 역사적인 최소한의 필요분’(78)에 따라 결정되어 있습니다. 노동과 임금의 조건은 최소한으로 노동을 강요하게 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계급투쟁이, 노동시간과 임금하락에 대항하는 투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노동력의 재생산에서는 모두 동등한 노동이 아닌, 노동력에 자격을 부여하여 다른 직우와 직무들로 구분되고, 각 자격요건을 갖추는 방식으로 재생산 됩니다. 노동력에 전문성이나 자격요건이 갖춰지면서 재생산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위치를 보장 받고, 이런 요건을 보장할 수 있는 학교 교육 등의 심금 기관들에 의해서 보장되는 경향을 가집니다. (이 경향적인 법칙이 문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학적, 과학적 교양은 각 자격 요건에 맞추어, 노동자, 기술자, 엔지니어, 고급간부 등의 요건에 따르고 노하우를 구축하며, 이런 노하우가 통용되는 계급지배에 의해 세워진 질서의 규칙들을 습득하게 되면서 이에 따르고 복종하는 법을 기반으로 지배력을 행사합니다.

노동력의 재생산의 자격의 재상산이자, 그 자격에 맞추어 세워진 질서의 규칙들에 대한 복종의 재생산을, 즉 노동자들에게 있어서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복종의 재생산을, 한편 착취와 억압의 대리자들에게 있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잘 다루는 능력의 재생산을 요구합니다.(80) 이렇게 노동력의 재생산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종속하고 지배할 수 있는 질서와 조건을 가르치면서 계급적인 모습을 보이는 한편, 노동력의 자격,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속,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80)하도록 요구합니다.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인식되면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바라보고 있지만,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의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제시합니다.

 

하부구조와 상부구조(81)

맑스는 사회구조를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통일된 경제적 토대이자 심급으로서 하부구조, 그리고 법률-정치(법과 국가)와 이데올로기(종교, 윤리, 법적, 정치적)의 두 가지 수준의 심급으로서 상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상부구조는 하나의 경제적 토대로서 하부구조가 없이는 존속이 불가능함을 설명하며 건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토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따라서 최종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부구조는 토대의 요건과 효과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규정되어 왔지만, 그런 규정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하여 1)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이 존재하고, 2)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의 반작용’(82)이 존재합니다. 토대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지만, 부차적으로 상부구조가 가진 유형과 효과들이 토대의 존속이 이루어지도록 사고를 강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발위하고 있습니다. 이를 알튀세르는 상부구조의 존재의 본질과 본성을 특정짓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 것은, 재생산의 관점에 입각해서’(83) 상부구조가 결정하고 효과를 발휘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상부구조는 토대에 의해서 유지되고 지속될 수 있지만, 상부구조는 재생산을 위해서 법과 국가,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두 구조를 통해 하부구조에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한 수단과 장치로서 국가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84)

맑스주의에서는 국가는 지배계급들로 하여금, 노동자 계급을 잉여가치의 수탈과정에 종속시키기 위해 그들을 지배하도록 보장해주는 억압 기구(machine)’”(84)라고 명화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국가는 기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장치이고, 그 장치의 움직임을 위한 법적인 체계들, 그리고 그 법의 지배에 따른 장치들로 경찰, 재판소, 감옥 등의 보조체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군대는 국가의 더욱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지배를 가능하게 합니다. 따라서 지배계급에 봉사하는’(84) 힘을 강제하는 억압적인 장치가 국가이고, 국가의 본질적인 기능입니다.

 

기술적인 이론으로부터 이론 그 자체로(84)

알튀세르는 국가의 본성에 대한 표현이 모호하게 기술적인(형용사, 85) 것으로 남아있다고 주장하며, 이론으로서 국가를 살펴보기 위해 몇 가지 설명을 추가합니다. 국가는 일종의 기술적 이론의 상태로, 1)기술적 이론은 이론의 시작점이자, 2)그 것이 표현되고 있는 기술적 형태의 모순을 극복하고 기술을 넘어 이론으로 발전을 요구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억압적인 국가장치로서 폭력적인 양상을 보여왔던 국가에 대한 정의가 서로 일치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 지배장치로서 국가에 대해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억압적인 사실이 확인되고 그것을 통해 국가를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려는 사실들이 누적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정의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피상적으로 국가의 본질적 정의를 통하여 국가의 메커니즘과 기능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맑스주의 국가 이론의 본질(87)

맑스주의에서는 정치적 계급투쟁의 목표’(87)로서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를 구분할 것을 강제합니다.(87) 국가권력은 변화하더라고 국가장치는 그 자리에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혁명 이후에도 국가장치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주장하며, 국가권력과 국가장치는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맑스주의 국가 이론은 1)국가는 억압적 국가장치이며, 2)국가권력과 국가장치를 구분하고, 3)계급투쟁의 목표는 국가권력 보유에 있고, 보유한 뒤에는 계급적 목적에 따라 국가장치의 활용이 관계되고, 4) PT는 부르주아 국가장치를 파괴하기 위해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전혀 다른 PT의 국가장치를 대체해야 하기에, 이전의 국가권력과 국가장치의 종언이라는 근본적인 과정을 실행해야 한다 주장합니다.

맑스주의 이론에서 살펴본 국가에 대한 설명과 기술적인 이론들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부분적으로 기술적인 상태로 남은 이론이며, 이를 보완하고 덧붙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고 알튀세르는 주장합니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88)

덧붙일 내용이란 국가장치에 대한 내용, 특히 억압적 국가장치 외의 다른 현상으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 ISA)의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억압적 장치와 혼동되지 않는 명백한 현실이라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ISA는 경찰, 감옥, 군대 등의 폭력에 의해 기능한다는 것’(89)으로서 억압적 국가장치를 포함합니다. 하지만 더욱 특수한 성격으로서 폭력이 아닌 형태로 기능하는 것들, 즉 종교(교회), 교육(학교), 가족, 법률, 정치(정당 정치), 조합, 커뮤니케이션(미디어), 문화(문화예술스포츠) 들이 차이성을 가진 국가장치로 발견됩니다.

폭력이라는 단일한 결과로 나타나는 억압적 장치에 비해, ISA는 다수로 존재하며 통일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억압적 국가장치가 공적인 영역이라면, ISA는 사적인 영역에서 우리들에 깊게 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요한 질문은 아니라 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이런 ISA들을 왜 국가장치로 간주할 수 있느냐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90) ISA들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관계없이, 이것은 국가장치로서 완벽하게 기능’(90)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더욱 본질적인 문제로서 폭력으로 기능하는 억압적 국가장치에 비해서, ISA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기능하고 있다는 본질적 차이를 가집니다.

특히 억압적 국가장치는 폭력의 물리적 억압에 의한 순응과 공포를 조성하면서 이데올로기적인 특성으로 기능하기도 하며 ISA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주장은 우리가 앞서 단순하게 이해해왔던 억압적 지배장치로서의 국가를 넘어서, 폭력으로 혹은 폭력 아닌 다른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일상적인 양상들 안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를 교육하고 가르치면서 훈련장치로서 기능하는 국가장치의 특성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이는 억압과 이데올로기의 이중적 장치 특성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국가에 대한 인식과 경계 수준을 드높이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계급투쟁은 억압장치로서의 국가 외의 이에올로기적 장치의 국가도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ISA는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하에서 단일화되고 기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92) 지배계급은 어느 장치적 특성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억압과 이데올로기의 지배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곤고하게 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합니다.

어떠한 계급도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위에 그리고 동시에 그 속에 그들의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으로 국가권력을 보유할 수 없다.”(92) 따라서 지속성을 위해서 재생산의 메커니즘이 필요하고, 헤게모니를 위해서 국가적 장치들이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ISA가 계급투쟁의 목표이자, 실제 계급투쟁의 장소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ISA 속에 쉽게 법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그리고 헤게모니의 투쟁과 저항이라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지배계급의 지위와 지배에 대한 피착취계급의 저항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위의 설명들을 통해서 맑스주의 국가 이론에서 알튀세르가 보완하고자 했던 지점을,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특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에 저항 가능한 계급투쟁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하여 개념의 이론적 작업을 해나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산관계들의 재생산에 관하여(94)

알튀세르의 ISA에 대한 질문은 더욱 깊은 차원으로 나아갑니다. ISA의 역할과 범위, 그 기능의 작용과 기능이 상응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재생산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성찰합니다.

생산관계와 재생산은 하부구조-상부구조에서는 상부구조의 법-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보장되고, 억압적 국가장치 차원에서는 국가권력 행사에 의해서 생산관계의 재생산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이 특성을 알튀세르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모든 국가장치들은 억압에 의해 그리고 동시에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한다.(94)

2. 억압적 국가장치는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의 정치적 통일 아래에서 집중되고 조직화된 반면, ISA는 다수이고 상이하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자본가와 PT의 각각의 투쟁과 효과들을 표현하는 모순들에서 객관적인 장으로 제공된다.(95)

3. 억압적 국가장치는 단일화되고 조직화되어 보장되지만, ISA는 서로 이질적 혹은 모순적 형태에서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보장된다.

이런 이해에서 생산관계와 재생산의 과정은 그 착취과정을 보장하는 1)국가권력과 정치적 조건들, 2)지배 이데올로기의 목적과 기능의 역할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보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교회를 중심으로 행사되어 왔던 종교의 지배적 위치의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이, 현대에 이르러는 더욱 다양한 국가장치들에 귀속되고 기능하고 있으며, 공적 사적인 영역을 가리지 않고 기능하고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지배 이데올로기 기능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교회의 국가장치로서의 기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능이 쇠퇴하고 박탈되면서 학교를 통하여 부르주아 헤게모니를 수립하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차원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 세워져 왔습니다. 이에 알튀세르는 교육으로서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대항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격렬한 계급투쟁의 결과 성숙한 자본주의적 사회구서어체들 속에서 지배적인 지위에 놓인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교육 이데올로기저 장치이다.”(98)

교육장치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고 기능하는 것은 1)자본주의적 착취관계들의 재생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결과에 기여(99)하고, 2)정치적 장치이자 간접-직접적인 민주주의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면서 커뮤니케이션과 윤리, 문화장치, 종교장치 등과 함께 기여할 수 있도록 하고, 3)이런 합주’(99)는 현재 지배계급의 지배 이데올로기라는 단일한 악보아래에서 연주되고 있고, 4)그 합주 중에서도 교육(학교)가 명백하게 지배적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생산관계와 재생산의 착취과정을 지속하기 위한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주입과 노하우의 습득의 메커니즘은, ‘보편적으로 군림하는 학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폐되고 숨겨진다’(101)는 차원에서 교육 이데올로기의 특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강조할 점은 지배적 ISA들은 역사와 사회에서 각 역할에 따라 지배계급의 의향에 맞게 대체되고 지배 메커니즘을 지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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