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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알튀세르 - 아미엥에서의 주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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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알튀세르가 언급하고 있는 <몽테스키외>, <맑스를 위하여> 등의 논문들, 그리고 18세기 철학에 관한 서술 계획은 맑스주의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철학은 독립된 위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대립적인 그 차별성을 통해서만 존재’(132)하기에 끊임없이 투쟁하는 공간으로 이론적 역관계이자 변증법적 형식 안에서 존재하면서 철학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주장에 따라 만일 철학이 최종심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면, 이 투쟁은 철학에 고유한 것으로서의 구별우회, 그 차별성에 대한 이론적 작업이라는 형태를 취한다.”(132)하고,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작업으로서 스피노자를 경유하고 헤겔을 경유해서 맑스의 철학에 이르게 되었는지 설명하겠다 밝힙니다.

마키아벨리, 칸트 헤겔 등의 철학과 정치에서 투쟁을 살펴보는 것은 철학자들의 정치, 다시 말해 그들을 철학자로 만드는 정치’(133)로서, 어떤 정치 투쟁이나 정치정당과는 달리 전혀 다른 문제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라는 문제’(133)의 방식으로 투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철학의 새로운 실천”(134)의 필요성을 발견하고 실천하며 맑스의 철학에 다가가 왔음을 설명합니다.

18세기 이론을 소홀히 다뤄왔던 것처럼 보였다면 이는 맑스주의 이론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에 대해 말하도록 강제된 상태에서 테제를 연마하고 정정해왔으며, 그런 상황을 거쳐 철학적 에세이들과 성찰을 철학적 투쟁을 위해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앞서의 논문들은 한정된 상황 속으로의 공공연한 개입들이며, 지배적인 맑스주의 철학 속으로의 정치적인 개입들이며 정치 속으로의 철학적인 개입들이다.”(135)고 밝히고 있습니다. 알튀세르의 철학적-정치적 개입의 작업으로서 정치적 조건과 제약과 관계를 사유하는 것이자 자신의 실천이라고 밝히는 이니셔티브(발의), 그리고 알튀세르의 테제에 대해서 제기된 몇 논쟁과 도발들에 대하여 방어하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먼저 이론이 하나의 실천”(136)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모든 실용주의에 대항’(136)하는 것이자 이론에 대한 관념론에 대항’(136)하여 이론에 실천의 유물론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론적 실천의 유효성의 기준은 그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다’(136)는 테제에서 기존의 레닌적인 테제의 해석(“맑스의 이론은 전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옳기 때문이다.”)에서 벗어나서, 이론의 논증과 증명은 한정되고 특수한 물질적이론적 장치와 과정의 결과물’(136)으로서 실용주의와 경험주의에 대항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맑스의 반인간주의 이론’(137)의 테제를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에 반대하는 신성동맹이 야기될 정도로 급진적인 이론임을 주장합니다.

알튀세르는 사고들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우리는 최초의 힘을 무화시키는 반발력을 통해, 구부러진 사고들 위에 그것들을 정정하기 위한 반대로 구부리기를 행함으로써, 사고들을 구부린 채로 지탱하고 있는 힘을 인식해야만 한다.”(138)고 주장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론의 투쟁이며, ‘역관계의 존재이고 인식이고 예상’(138)이며, 자신의 테제가 극단적인 사고 방식을 통해 역관계의 이론적 인식과 유물론적 인식을 입증하고자 함이라 주장합니다.

이 이론의 구부러짐의 관계에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너무 많이 구부리거나 적게 구부릴 위험성, 단번에 결정되지 않는 심급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성급하게 개입하며 정확한 구부림의 지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과실을 저지를 위험이 있습니다. 알튀세르도 본인 스스로 부분적으로 해당됨을 인정하며 구조주의적 용어법과 유희를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자신의 글의 효과와 이어진 작업들 그리고 자기비판의 경험이 논문들에서 밝혀질 것임을 설명합니다.

알튀세르는 자신의 이론의 반인간주의반경험주의반경제주의 좌익적 입장에서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독창성을 표현하였으며, 맑스의 혁명적 사유를 스스로 사유하고 인식하면서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한 혁신으로서 이론적 실천이라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맑스주의 철학의 문제는 지극히 당연하게 내 성찰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 것’(142)이며 철학적 우회와 투쟁이 필요함을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최종 심급……

맑스와 엥겔스의 최종 심급에서 경제에 의한 결정’(143)이라는 테제,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은 건물의 비유’(143)를 통해 표현되어 왔습니다. 토대이자 하부구조로서 경제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것이고, 그 위에 상부구조로서 법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 층들이 세워진다 주장합니다. 비유를 통한 설명처럼 하부구조는 토대로서 상부구조를 결정하며 이에 최종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생산자에게 지불되지 않는 초과노동의 수탈구조에서 경제형태와 생산자체의 지배관계가, 그리고 생산에 결정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른 최종심에서의 결정의 문제는 삶의 생산과 재생산의 문제임을 사유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경제적 요인이 유일하게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왜곡(144)시키지 않아야 하고 경제적 토대의 최종심의 결정 외에도 법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심급들이 존재하며 갖은 결정 속에서 상이한 심급들이 작용하고 등장하게 됩니다. ‘경제에 의한 최종심’(145)에서의 결정을 인정하는 것은 곧 유물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고, 기계적인 결정론이 아닌 변증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맑스는 변증법을 실제적인 작용 조건에 종속시켰고, 그것을 사변적인 광기로부터 보호했으며, 변증법이 유물론적으로 되도록, 따라서 그것의 고유한 형태가 그 조건들의 물질성에 의해 규정됨을 인식하도록 하였다.”(145)

여기서 알튀세르는 헤겔과 맑스를 분리시키는 과정에 대해서 주장합니다. 맑스는 끊임없이 헤겔을 우회하였지만, 헤겔이 부르주아 고전 철학의 이론에 대해 취했던 비판적 입장에서 헤겔과 가까웠음을 설명합니다. 헤겔이 스피노자로부터 물려받은 것에서, 맑스가 헤겔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지는 유물론적인 전제의 구성 과정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맑스와 헤겔 사이의 변증법은 유물론의 우위와 변증법의 종속, 유물론이 변증법이 되기 위한 조건에서 제기되고 있으며, 변증법은 헤겔 철학 속에서 유일한 사유수단으로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겔이 고전 철학과 구별되기 위한 방법에서의 변증법은 고전 범주와 전혀 다른 새로운 범주를 만들고 유통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헤겔이 자신의 이론을 위해 변증법을 신비화 했다면, 맑스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과 다르며 정확히 그 반대”(148)로 주장했습니다. 유물론적 전제와 그 전제에서 기초하여 나타나는 것들은 전혀 새로운 범주들을 사고하는 것입니다.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이 이중의 신비화(‘자신의 고유한 물질적 내용을 생산한다는 관념론적 시도’(148) & ‘자기 구현이라는 기적을 실현시키는 부정의 부정 혹은 지양의 형태’(148))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에서는 기원주체를 역으로 만들어내는 텔로스목적에 기원을 투사하고 있습니다. 목적에 참여하는 자체가 자신의 기원이 되며, 주체가 존재하지 않지만 부정의 부정의 완성된 과정으로서 실체의 주체화가 과정 자체의 주체’”(149)로서 나타나는 것처럼 관념론적 환상과 자기-생산의 변증법으로 나타납니다.

맑스는 이런 변증법을 전복시켜야 한다 주장합니다. 만약 변증법을 변형시키지 않는다면 생산관계에서 상품생산과 자본주의라는 결과는 재생산되게 될 것입니다. 맑스는 사회를 하나의 지배 속에 구조화된 복합적인 전체’(150)로 생각했다면, 헤겔은 하나의 총체로서 사회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적합니다. 알튀세르는 헤겔의 본질로서 총체성을 간주하려는 것과 맑스의 전체라는 범주의 이해 차이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총체성이 역사를 원들 속의 원들이며 공간들 속의 공간’(150)으로, ‘단순한 원리의 대상화-소외’(150)의 양식으로, ‘각각의 차이 속에 이미 미래적인 대자의 즉자가 현존하고 있는’(150) 구조를 진리로 보고, 이러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서 역사적 총체성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모든 것은 총제성 안의 진리를 기준으로 그에 대한 차이를 기준으로 부정되거나 초월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총체성이라는 범주하’(151)에서 사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맑스는 차이가 실재적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공간실천대상효과의 차이들을 조명합니다. 헤겔의 닫힌 원과 총체성이라는 관념이 아닌,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토대와 그에 출동하는 여러 가지로 구별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구별은 실제적이며 환원될 수 없는 것’(151)으로 토대와 상부구조는 서로 균등하지 않고 불균등하게 전체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맑스주의의 견해와 사회구성체에 대한 견해는 전체에 관해 말하면서 복합적이고 불균등한 상태입니다. 이런 불균등한 상태이기에 정치적 계급투쟁을 통해 권력 획득을 위한 투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네가 차지한 자리가 있으며 바로 여기에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네가 움직여 도달해야 할 지점이 있다. …… 맑스주의적 범론은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워야 할 장소를 알려준다. 그러나 이 장소는 더 이상 점이 아니며 고정되어 있지도 않다. 그것은 최종심에서의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위치들의 분절화된 체계이다.”(152)

맑스의 변증법은 모순과 불균등성에서 필연적으로 과잉결정이나 과소결정이라는 형태 속에 반영된다는 사실’(153)에서 모순을 인식하는 차원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단순한 모순이 +-, Anot A의 차원이었다면, 이런 동등한 차원의 대립 이상으로 모순이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맑스주의는 주목합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분할과 모순은 단순한 관계가 아닙니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음의 부호적인 존재가 아니며 자본가도 양의 부호가 있는 노동자 계급이 아닙니다. 서로 동일하지 않은 역사와 세계, 동일한 수단도 계급투쟁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모순적인 존재입니다. 이들은 헤겔적 변증법에서 대립이 종합하는 총체적인 모습이 아닌, ‘대립의 조건들을 재생산’(154)합니다.

이렇게 밝혀진 맑스주의적 모순의 불균등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순들을 불균등하게 만드는 조건들, 즉 내가 지배내의 복합적인 전체라고 불렀던 것을 규정하는 물질적이고 구조적인 조건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154) 합니다. ‘최종 심급, 지배내에 구조화된 전체, 과잉결정, 모순의 불균등성 등에 관한 이 테제’(155)에 따라 모순에 따른 발전과 변화의 양상들에서 맑스주의적인 노동운동의 방향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 두 가지 시도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알튀세르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메시아적 혹은 비판적 관념론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는 경제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던 진화주의’(155)에 대해서입니다. 이 두 경우에 유물론이 회피되거나 생산력을 기계주의적인 물질성으로 환원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혁명은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는 영국이나 독일이 아닌, 러시아나 중국 등지에서 발견되면서 모순의 불균등성, 과잉-과소 결정에 의한 혁명의 이동에 대해 어떻게 사고해야 할지 성찰하고자 합니다. 그 하나로서 과소결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과소결정에 의해 혁명이 유산되고 혁명적 운동이 지체되거나 사라지며, 제국주의가 부패 속에서 발전하게 되는, 결정의 문턱이라는 사고를 하지 못하기 때문’(156)이며, 혁명의 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우려하는 듯합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변증법에는 무언가 문제가 있으며, 그것이 헤겔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어떤 사고 속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156)고 주장하며 맑스의 유물론을 더욱 고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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