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哲,테츠)알튀세르 - 검은 소 해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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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이론은 진리이기 때문에 전능하다. 공산주의자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 레닌

 

해제_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자, 인식론적 절단의 철학자, 이데올로기론과 호명의 이론가, 우발성의 유물론 내지 마주침의 유물론,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스피노자 철학에서의 영감, 그람시에 대한 성찰, 알튀세르와 라캉-레비스트로스-데리다-푸코-랑시에르-바디우와의 관계(16-17) 진태원이 긴 지면을 할애하며 알튀세의 철학적 영향력을 서술한 것에서 살펴보듯이, 알튀세르가 프랑스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철학적 영향력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검은 소가장 정치적인 저작’(18)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알튀세르가 프랑스 공산주의자라는 점에서 그다지 참신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이 설명에 대해 진태원은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습니다.

첫째, 정치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점. 우리가 앞서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아미엥에서의 주장의 안에 들어 있는 논문들은 마르크수주의 이론에 개입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평가하며, 특히 혁명성을 상실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개입이었다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주의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파적 비판에 대한 맞서기 작업이며 흐루쇼프 이후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입니다.(18)

게다가 청년 마르크스에 대하여에서 청년 맑스와 성숙기 맑스 사이에 인식론적 절단이 있음을 주장하며 마르크스 철학의 통일성 신념을 유지해온 마르크스주의자의 신념을 무너뜨리면서, 청년기 포이어바흐와 헤겔의 문제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독일 이데올로기이후 마르크스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분석은 맑스의 정통성을 의심하지 않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습니다.(20)

둘째, 인간적 사회주의라는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훨씬 더 인간적이라고 하는 마르크스’, ‘소외’, ‘인간 해방’, ‘사회 해방등으로 이해하는 직관적 표현에서 넓게 공감과 지지가 가능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적 통념에 지나지 않는다’(20)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주장을 무시해왔던 프랑스 공산당은 그를 정치적이론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1976년 프랑스 공산단 22차 당대회가 되어서 알튀세르가 정치 노선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주장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은 맑스주의 정치학 핵심 개념으로 알튀세르의 가장 포괄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21)고 평하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체계적 성찰의 대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반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정치의 전체 역사에서 결정적인 지점이다.”라 말하며 맑스주의의 중심적 개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면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포기하고 프랑스 특색의 사회주의’, ‘프랑스 민중 연합을 내세웁니다.

이는 프랑스 공산당이 1978년 총선을 대비해 추진한 전략이지만, 이미 프랑스 중도좌파 세력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은 사회당에 자리를 내어주면서 좌파 주도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1958년 드골 대통령 중심의 제5공화국 이후 세력을 내리 상실해오며 군소정당에 머물게 된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한계이자, 세계 정치적 상황에서 소련에 대한 비판과 프랑스 내부의 685월 운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프랑스 공산당의 무능과 도덕적정치적 위신의 상실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당과 정치적 연합을 통해 돌파를 모색하나 여기서 방해가 된 개념이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이었고, 이를 포기하는 것으로 선언했지만 사회당과의 연합마저도 물 건너가게 됩니다. 1964민주주의적이고 비사회주의적인 대안의 제시, 1968민주사회의 진전이 사회주의로 가는 통로등을 발표하며 민주사회주의로의 변화하려는 흐름에 부응하려 하고, 심지어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인 조르주 마르셰가 만일 인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사회주의를 더는 원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우리는 그 문제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유로코뮤니즘’(25)의 새로운 노선을 모색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좌파 운동의 주동력을 사회당에 내어주면서, 1972년 공산당, 사회당, 급진좌파운동 사이 공동정부강령이 채택되지만, 1981 사회당 미테랑이 2차 대전 이후 최초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됩니다.(26)

공산당의 이런 행보와는 다르게 알튀세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개념을 고수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27)를 대하는 세 가지의 방식(위기를 거론하지 않고 침묵하는 방식, 위기의 충격을 감수하며 헤쳐 가면서 민중운동의 힘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방식, 마지막으로 알튀세르가 택한 드디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반갑게 여기고, 이를 일종의 해방의 기회로, 마르크스주의의 쇄신과 부활의 기회로 간주하는 태도’(27))에 대하여 알튀세르는 위기를 해방으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결정적인 어떤 것이 해방될 수 있는 기회”(28)로 간주하였으며, 오히려 위기가 위기로서 드러나지 않도록 억압하고 그것을 가짜 해법으로 봉쇄해왔던 것이라 파악합니다.

이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서 폭군 또는 독재적 지도자의 개인적인 일탈과 전횡의 문제’(28)로 간주하면서 이를 위한 해결 방법으로 실용적인 타협, 또는 인간적인 사회주의로 자율성을 보장하고 시장의 효율성을 도입하는 해법우파적 비판도 아니라, 좌파적 비판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 알튀세르의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에 대해서 사람들은 독재적인 혁명과 권력쟁취로 여기며, 특히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그 개념을 스탈린주의적 독재와 동일시하면서 사회주의적 혁명에 대해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실망과 환멸을 마주하게 된 상황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평등과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30)를 표방하는 곳으로 대중의 관심이 흐르게 됩니다. 이 상황에서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서유럽의 공산당 진영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등장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전략을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노선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알튀세르의 지적이 매우 날카롭습니다.

“‘다른 길에 의한 사회주의가 현존하는 사회주의와 동일한 결과에 이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는가?”“(30)

알튀세르는 소련식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려는 서유럽 공산당의 전략이 충분히 질문하지 못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왜 스탈린주의가 형성되고 40여년 지속되었는지 질문해야 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자신의 관점에서 설명하는’(31) 것이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오류에 대한 정치적 필요’(31)에 따라 그런 오류적 관계를 유지해왔고 지속해야할 필요가 존재했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오류임에도 그것을 필요로 한다는 정치적 관계 속에서 근본적인 노선의 일그러짐을 무마시켜왔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날카로운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서유럽 공산당의 노선에 대한 비판에 적용 가능합니다.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의 문제를 오류로 말하고, 이에 대응하는 정치적 필요의 존재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립시키려는 전략임을, 평화롭고 민주적인 프랑스 특색의 사회주의”(31)라는 주장은 그저 오류를 회피하려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왜 그러한 오류가 정말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개념 때문인지 제대로 설명하거나 토론하려고 하지 않는’(31)것이며 오류를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의 고수라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 서유럽 공산당은 오히려 공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이는 스탈린의 소련이 사회주의 전인민의 국가로 이행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짧은 시기로 마치고 초월하는 것과, 서유럽 공산당의 pt 독재를 거부하는 양자의 방식이 동일한 이해방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pt의 독재를 사회주의 시기와 일치’(33)하는 것으로 봤다는 점에서 스탈린주의와의 차이점을 알튀세르는 설명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스탈린주의적 실천으로부터 분리하는 것”, 노동자 계급 승지를 위해 폭력과 강제를 행사하고 공산당에 복종하게 하는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레닌이 주장한 pt 독재의 차이를 밝히고 모순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닌에 따르면 pt 독재는 궁극의 민주주의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동의어’(33)라고 주장합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인민대중의 이익을 보장하고 평등과 자유를 실현하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선정을 베푸는 민주주의(복지국가처럼 들립니다.), 또는 민본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합니다. 자크 랑시에르의 설명에 따라, 아르케(arkhe)와의 단절, 즉 정상적인 위치로 고유하게 만드는 자질들이 존재하는 관념과 단절하는 것, 통치하는 자격이 있는 자와 통치되는 능력만 지니는 이들의 상호성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때로는 다스리고 때로는 다스림을 받는 것’(35), “레닌에 따르면 대중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의회체계를 통해 정치에 개입하는 대중일 뿐만 아니라 국가장치, 생산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개입하는 대중 자체이기도 합니다.”(35)

그렇다면 pt의 민주주의를 왜 독재로 불러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고안해낸 pt 독재의 개념이 부르주아 독재의 개념에 대한 계급투쟁이자, 진정한 정치적 의의를 담고 있음을 조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독창성은 권력 형태로서 독재를 한 사회계급 전체가 실행하는 권력’(36)이라는 것을 조명했다는 것입니다. 한 특정한 계급의 독제는 단지 제도적인 정치 영역에서만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서 행사되는 지배다.’(36)

 

“일종의 절대권력 ― 마르크스 이전에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면서 행사되었던 절대권력 ― 이며, 단일한 정치 내에서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 사회적 삶 전체, 즉 토대에서부터 상부구조까지, 착취에서부터 이데올로기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계급투쟁 내에서, 정치를 경유―단지 경유하기만―함으로써 행사되는 것입니다.”(36)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법적․정치적 영역에서 그나마 유지되던 민주주의의 질서마저 점점 침식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이들조차도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포스트 민주주의’라고 또는 ‘불평등 민주주의’라고 지칭하고 있다. 알튀세르가 이들과 다르다면, 그것은 그가 이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계급독재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37)

 

제도나 형식이 민주주의라 하더라고 최종 심급에서 결국 부르주의 계급의 독재를 위한 법적정치적 방식이 될 뿐이며, 따라서 pt 독재는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를 단절하고 더 넓은 범위의 자유와 권리, 평등을 허용하며, 더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정치의 새로운 실천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서 pt 독재는 지배계급으로의 투쟁과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해체가 1의 목표이자, 이후 국가 자체의 소멸을 추구합니다. 이는 앞서 민주주의처럼, “국가이면서 동시에 비국가이어야 하며, 자기 자신의 소멸을 목표로 하는 국가”(39)이고, pt는 지배계급으로서 자신의 해체를 추구할 수 있는 계급이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pt 독재는 스탈린이나 서유럽 공산당의 이해처럼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독재 체제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정 전체’(39)로서 권력을 소멸시키는 방식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알튀세르에게 공산주의는 우리의 눈앞에서 실현되는 현실의 운동”(40)으로, “정치적 장치, 정치 -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레닌이 말하듯이 민주주의조차도 더는 존재하지 않는”(40)사회로, ‘도덕적법적 이데올로기와 부르주아적종교적 이데오로기에 지배되는 가족이라는 것도 변형될 것이며, 개인은 자유롭게, 다시 말해 불평등하게 발전할 수 있는’(40) 것이다. 공산당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공산주의라는, 왠지 이전부터 읽어온 알튀세르의 생각이 그대로 옮겨진 것 같이 느껴집니다.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이라는 해제의 제목처럼, 알튀세르의 관점은 우리가 아포리아(aporia,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 하지만 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과 관점에서 새롭게 탐구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를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 계속 고민하고 사유해야 함을 주장한다 할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 독재와 pt 독재는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이고, 부르주아가 착취와 불평등, 부자유를 포함한다면, pt 독재는 피억압자의 자유를 위해 이들을 해방하고 투쟁하는 것에서 나아가 계급적 옹호 장치를 모두 파쇄하고 권력 장치를 남기지 않는 미래를 그리는 것에서, 그리고 그러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알튀세르의 철학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우리의 문제 설정과 사고의 방향도 아포리아적인 것을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불가능성을 통과함으로써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 그것을 통과할 경우에만 새로운 가능성들이 열리는 어떤 것이다.”(43) (이어 p.43의 인용)

국가는 민주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특정 계급의 지배 장치라는 것, 따라서 민주주의의 도래는 국가 밖에서 도래하며, 대중 자신에게서 도래해야 하며, 진태원의 주장처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협소하게 도구적으로 한정하며 앞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주장과 모순되는 부분도 보이지만,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도래할 수 있는 대중에 대한 신뢰에서 알튀세르가 생각하는 자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진태원은 알튀세르의 재생산에 대하여에서, 이데올로기가 물질적이고 영원한 것이며, 그런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구성되고 호명된 주체가 지배적인 관계 안에 있고, 이는 재생산에 기여하게 되는 예속적 주체에 대한 논의는 이전까지의 알튀세르의 기만과 신비화 또는 가상으로서의 이데로로기라는 관점’(45)과 단절하는 혁신성을 보인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아포리아를 확인하고, 알튀세르가 자신의 모순을 생산적으로 진화시키기 위하여, 앞서의 고착된 철학과 자신의 이론도 우회하고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알튀세르의 자세를 이어받은 인물로서 에티엔 발리바르를 조명하고 있는데, 발리바르는 이데올로기가 지배계급에 의해 조작되고 강제되는 것으로 보는 관점에서 단절하고,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지한 대중이 아닌, ‘이데올로기 바깥에서 이데올로기를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지배계급의 능력’(47)이라는 생각을 전제합니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개인들과 대중이 모두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상계 그 자체’(47)로서,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보편적인 것이자 피지배대중의 체험된경험”(47)이 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지배 이데올로기가 효과를 보이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피지배대중의 상상계에 뿌리를 두고 그들의 욕망과 원하는 것 속에서 상상계로 자리잡고 구성되며 보편적인 것이 됩니다. (예를 들자면 본인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착취 받고 있는 노동 계급이 아니라고 상상하게 만드는 플랫폼 노동과 사회적 분위기가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근대 사회의 피지배대중에게서 나타나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사상에 근간해 말해지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에 대한 선언,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어들이 우리의 정치적 근대성의 근본 원리가 되어, 우리들 스스로 지배를 느끼지 못한채로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마는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튀세르는 평등과 자유 또는 더 일반적으로는 인권일반을 지배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서 법률적 이데올로기’(49)라고 부르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아포리아라고 제목을 붙인 것처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의 지배와 예속에서 자유로운 대중’(49)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 현실에 그러한 대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맹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됩니다. 이를 스피노자의 생각을 통해 인간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존재했으면 하고 원하는 대로 인식”(49)한다는 날선 비판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정치적 대중만이 존재하고 성적 차이나 젠더의 차원, 인종과 국민의 차원에서 대중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튀세르의 약점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알튀세르가 사회 모순의 복합성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한 과잉결정의 개념에서 애매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을 제시했지만, 경제라는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이 유지되는 한에서만’(50) 과잉결정이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정치와 경제 이외의 다른 모순들(성적, 인종적 모순)과는 복합적 관계로 이해하고 사고하는 부분에서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모순을 감싸서라도 우리 앞의 삶을 보고 변화의 사고를 이끌어가는 알튀세르의 아포리아적 철학의 태도에 대해서 불가능성의 길을 스스로 통과해나가야 하는 것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대하는 우리 자신의 문제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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