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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반격과 민족주의

 

트루먼-맥아더 논쟁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수많은 이견과 관련된다. 유럽과 아시아 중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 한국에서의 승리, 중국 핵심 지역 처리 방안, 핵 시대의 제한전의 의미와 관련돼 있었다. 공식 기록에서 트루먼이 옳았고 맥아더가 틀렸다고 평가됐다(135).

외교 정책을 둘러싼 트루먼-맥아더의 충돌과 매카시즘은 개인·관료·이해관계자·정당을 놓고 서로 대립했으며 대안적 개념을 만들어내면서 다퉜다. 절정은 30~50년의 20년간이었다. 근본적으로 자본가와 관료 조직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상반된 세계관과 정치적 연합을 만들어냈다. 이런 적대 관계는 국제협력주의와 반격이라는 노선의 투쟁으로 표출됐다. 두 노선은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을 거치면서 미국 정치의 범주를 따라 좌우로 이동해 합의를 이룬 중간점을 형성했다. 이런 변증법은 전후 시기부터 현재까지 내려오면서 외교정책을 선택하는 변수를 만들었다. 트루먼과 애치슨은 봉쇄의 전형이었고, 맥아더는 반격의 전형이었다. 47년의 성과는 트루먼독트린으로 구현된 타협이었다. 49년 반격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 나타났으며 50년 초 뚜렷이 부상했다(136). 합의를 이루는 중간점은 오른쪽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미국인이 자신들의 정치에 대해 표현하는 것과 상징 내용이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 존재한다. 첫째, 미국인은 유럽 이외 지역의 정치에서 유럽의 정치 용어를 사용했다(137). 세계적 관점에서 우파좌파든 미국 정치의 핵심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유주의자였으며, 철저하게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했다. 둘째, 미국 정치에 존재한 것은 모두 모습을 달리한 반공주의다. 미국에는 오래 뿌린 내린 좌파가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공산주의를 근절시켜야 한다는 노선으로 갈아탄 자유주의자의 모습은 반공주의가 전후 외교정책의 합의된 큰 방향이기에 반대진영은 실현 불가능하거나 비현실적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 현실적 행동이었다(138). 복잡한 좀더 깊은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한 폭넓은 합의 안에 정치·경제적 측면의 심각한 차이가 있었고, 그것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 안에서 시작돼 국가, 시장, 세계에서 미국의 적절한 역할과 관련된 서로 다른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두 노선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본질이다. 30년대 국제협력주의적인 뉴딜에 의해 밀려난 앞 시대의 기득권들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공격해 정책적 판단들을 뒤집으려고 했는데 그 세력이 선호하는 외교정책은 정치·경제적 동전의 양면인 반격 또는 우익의 고립주의였다(139).

 

미국 민족주의의 재검토: 고립주의/반격의 정치·경제

반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특히 아시아를 탐냈다. 그들은 순진하고 고지식한토착 미국인으로 보편주의를 신봉하는 소시민계급이었다. 이들은 모든 사회의 부르주아화’-안락·편리·안전·여가, 의식주의 평균적 충족-라는 미국의 이상을 믿었다(140). 이들 소규모 자본가들이 선호한 외교정책은 정교하거나 잘 조율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실 그들은 외교정책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 독립 자본가 출신으로 국내시장을 육성했으며 외국과 경쟁하거나 전쟁을 벌일 때만 외부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큰 걸림돌은 영국이었다. 반격론자들은 영국을 증오했다. 그들의 이상은 자족적 미국이었고 경제 이론은 중상주의였다. 미국 중서부의 옥수수 지대, 대평원 지역, 로키산맥과 그 주변 산간지대 같은 국내시장의 일부 지역 경제에서 활동했다(141).

한 가지 사례는 크로더의 자족적 미국이다. 크로더는 국제협력주의와 뉴딜 정책을 그릇된 방식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국가와 동일하게 봤다. 미국에는 뉴딜이 아닌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다. 고립주의자가 유럽의 파시즘에 관심을 갖게 만든 것도 이런 생각이었다(142). 크로더는 독일의 중상주의를 선호했다. 미국이 바라는 것을 실행하고 행동의 독립을 유지하는 것을 자유라고 정의했다. 건국 초기 미국인은 수입을 파괴적인 것으로 보고 수출을 건설적인 것으로 보는 보수적 생각을 지녔다. 크로더는 영국을 천적으로 생각했으며 국내시장에서 영국에 해당되는 지역을 뉴잉글랜드라고 봤다. 19세기 미국의 공황과 불황이 모두 영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143).

고립주의자와 반격론자는 크로더보다 논리의 일관성이 크게 떨어졌다.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신의 동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자성적이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고립주의/반격의 흐름과 미국 민족주의의 근본적 개념을 구성한 것은 일방적 외교정책에 입각한 자족적 정치·경제다. 고립주의자는 하나의 외교정책을 추구했는데 자신들의 이익에 개방된지역에서 팽창주의를 펼치는 것이었다.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는 미국 제국주의가 해외 영토 획득에 집착하지 않은 것은 국내에서전례없이 영토 획득을 추구했기 때문이며 그것은 영토 획득과 점유의 거대한 과정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제국주의의 두 유형이 있었다. 뉴잉글랜드는 해외 또는 특정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유럽을 중시하며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영국적 제국주의가 발원한 곳이었다. 그곳은 문호 개방의 원천이었다. 팽창주의자의 주목을 끈 것은 국경 서쪽의 연장선상에 있는 아시아였다. 태평양 끝을 새로운 국경과 연결했다. 차이는 팽창주의자가 태평양에서 미국의 일방적 패권을 행사하길 바란 반면, 국제협력주의자는 영국과의 협력을 선호했다는 점이다(147).

중서부의 농가와 중소사업가는 고립주의, 매카시즘과 반격론의 토대가 되었다. 동부의 오만한 국제협력주의와 융자를 거부한 은행가에 대한 증오, 해외 경쟁에 대한 공포, 매코믹과 허스트 계열 언론사가 계속 내보내는 상투적인 기사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반면 남부는 국제협력주의적이었다. 남부는 자유무역을 시행하는 제국에 면화를 팔았다. 고립주의자는 국내시장이나 중남미를 대상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산업과, 노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산업 주위로 모였다. 국제협력주의자는 국제적 석유산업과 금융업, 통신, 항공기 제조업, 항공사, 자동차 산업처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자본집약적 첨단 기술산업 주변에 형성됐다. 이 둘은 뉴딜 연합을 구성했고 국가가 해외 사업을 강력히 후원하도록 권장했으며 1932년부터 민주당이 수 십년 동안 지배하게 했다. 실제 이 연합이 외부 세계로 진출한 것은 40년대였다. 처음에는 전쟁으로 인한 생산 증대와 영국의 몰락에 힘입어, 다음에는 패권적 국정 운영과 경제적 수단을 이용해서였다(150).

산업노선을 옹호한 부류는 자유무역론자였다. 농업 중심적 관점은 제국주의를 거부하는 국수주의와 반제국주의였다. 이들은 국제적 이해관계보다 국내의 이해관계를 대표했으나 해외로 뻗는 경향도 있어 인접 지역을 합병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때 팽창을 대행한 것은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었다. 각 경향은 서로 다른 사고 체계를 형성했으며 이해관계의 체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이것이 이 장에서 전개할 논의의 방식이다(151).

신고립주의는 모든 것의 배후에 철저하게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세금과 노동조합을 증오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의 신흥 부유층은 석유와 가스 같은 자연자원을 무자비하게 개발했고 자기 지역을 벗어난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지했다. 그들은 철저한 소시민 계급으로 반귀족적인 동부의 지배층에 반대했다(152).

미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유럽은 인구와 국가가 너무 많고 나약했다. 유럽 시장을 포화 상태이나 중미와 동아시아는 열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시아는 방대한 자원과 기회가 있는 지역이며 백인이 이끄는 대로 잘 따르는 순종적이고 굽신대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었다. 외부의 규제가 거의 없이 활짝 열려 있는 지역으로 여겼다. 동아시아는 문호를 닫았고, 40년대 혁명적 민족주의로 충만했지만반격론자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들이 동아시아를 오해했다는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드러나지 않았으며 이런 추정은 팽창주의자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었다. 고립주의자의 물질적 기반인 자족적 세계관은 의회 정치와 공화당과 이념적 영역에서 사라지지 않고 유지됐으며, 국제협력주의에 대항하려는 우익의 시도를 뒷받침했다(154). 그들은 의미가 분명치 않은 이념 논쟁에 참여하고(린뱌오 반대운동과 공자 반대운동) 상부 구조(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특정 정치·경제 이념을 보존하려는 헛된 시도를 난폭하게 전개했고 물질적 영역에서 잃은 것을 이념적·정치적 영역에서 되찾으려 했다(155).

국제협력주의자는 미국 외교정책의 주인으로 자처하면서 외교관은 아이비리그 출신, 국무장관과 재무장관은 월가 출신에서 뽑는 전통을 만들었다(157). 기득권층이 외교정책을 지배하면서도 끊임없이 부인하는 교묘한 상황의 조합은 고립주의자와 반격론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득권층의 특징은 좋은 교육, 귀족적 몸가짐, 세련된 생각, 지적인 오만함. 친영적 태도, 법률과 국제협력주의에 입각한 규칙을 만들어 세계에 적용하려는 노력, 수많은 월가 중진과의 관계, 좌익에 잠시 관심을 보인 것 등이다. 기득권층은 영국과 북유럽을 자신의 모범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잠재적 시장이거나 종속국이었으며 외교정책의 관심에서 유럽보다 낮은 위치였다.

고립주의자와 반격 세력에게 동아시아는 인디언의 땅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지역이었다. 대부분 공상이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라면 공상은 현실이 된다(158). 그러나 정도만 달랐을 뿐 그들과 국제협력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 북유럽 국가들보다 중상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독일·이탈리아·스페인을 더 좋아했다. 아시아에서 팽창주의자를 사로잡은 나라는 중국이었다. 국제협력주의자는 일본에 관심을 보였다. 명예를 중시하는 유럽형 국가에 가까웠고 수준 높은 문화를 보유했으며 산업의 토대와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가 생각하기에 고립주의자는 트루먼과 애치슨이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애치슨은 포괄적인 세계관을 지녔고 아시아를 유럽에 이어 두 번째나 세 번째에 두었다. 달랐던 점은 미국 팽창주의의 방향이었다. 맥아더는 아시아를 새로운 국경으로 봤다(159). 맥아더는 미국이 후견 역할을 하고 특히 자신은 그 보호자가 되는 것을 상정했다. 19세기 해석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공화당 지도부는 유럽과 아시아 문제를 두고 뚜렷이 나뉘었다. 팽창주의자는 온건한 공화당원들이 유럽 우선주의자라는 점을 일종의 신념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는 대체로 옳았다(160).

 

팽창주의와 광물

영토 확장이 일방적 지배의 방식으로 이뤄지고 기업가는 아무 간섭없이 투자 활동을 전개하기를 바라고 자본주의는 제로섬게임으로 간주된다면, 광산이나 채굴권은 매우 적절한 상징이다. 주요 광물 매장 지역과 팽창주의의 관련성은 수없이 등장한다. 미국의 팽장주의자는 은에 대단히 탐닉했다(160).

1945년 이전 한국이 직접 경험한 미국 제국주의의 한 형태는 팽창주의의 변종이었다. 1890년대 고종이 호러스 앨런에게 준 금광 채굴권은 1910년 허버트 후버에게 대부분 넘어갔다가 1939년까지 여러 미국인에게 양도됐다. 북한의 풍부한 금광들은 39년 일본인에게 매각됐다. 보수파이자 허버트 후버와 긴밀히 협력한 공화당의 몇몇 저명한 가문이 20세기 초반 한국의 금광 소유권을 장악했다.

광산업자의 이익 개념은 두 가지 의미에서 자국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해외 수입에 방해받지 않고 미국 시장을 개발하고자 했지만, 해외 광물에 대한 미국의 이권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방어하려고 했다(163).

반격론자와 공군력

반격의 흐름은 우익의 고립주의처럼 자족적인 정치·경제로 되돌아가, 외국과의 경쟁을 두려워하는 산업·기업과 연합한 단독주의적 가설에 기반을 두었다. 동시에 공군력이 합세했다. 기술적 물신숭배는 소련을 제거하는 데 만능의 효과를 가진 처방을 제공했다. 그들은 국제협력주의자보다 논리적 일관성이 훨씬 떨어졌다. 부분만 고려하면서 전형적인 특정 이익을 추구했다. 미국이 세계에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지니고 있다는 환상을 품었다. 탁월한 기술력은 어떤 환상이든 품을 수 있게 해줬다. 해군이 국제협력주의(164)를 상징하고 육군이 봉쇄를 상징했다면, 냉전의 경계를 뛰어넘어 밀어붙일 수 있는 군사력인 공군은 반격의 상징이 되었다.

반격론자는 작은 국가를 오랫동안 선호해왔지만, 공군력과 방위산업에 정부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국가의 개입, 곧 막대한 국방 예산이라는 한 가지 측면과 관련된 자신들의 태도를 바꿨다. 50년 이후 우익은 시장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침묵을 지키면서 더 일관되고 정직한 재정적 보수파의 견해와 단호히 결별했다. 미국 정부는 팬아메리칸 항공사 같은 기업이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보조금을 지원했다. 항공우주산업에 국가가 자금을 댄 초기 형태로 그 자금의 대부분은 선벨트의 반격론 지지자들에게 갔다(165).

 

맥아더와 윌러비: 지방의 반격 사령부

 공화당 우익의 진정한 영웅은 맥아더였다. 그와 그의 정보 책임자 윌러비 장군은 동아시아를 방문한 반격론자를 유인한 끈끈이였다. 윌러비는 시대착오적인 파시스트였다. 맥아더의 생각은 더 복잡했고, 미국의 반격(166) 정책 지지자들과의 관계도 단순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18세기적 생각을 현대의 민족적·애국적 견해로 표현한 시대와 맞지 않는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승리하는 백마 탄 정복자였다. 사려깊은 방안을 제시하는 애국자였고 성배의 수호자였으며 내면을 철저히 억제해 근대적인간, 나아가 자신으로부터 도피한 인물이었다. 서부 국경에 오래 있었기 때문인지, 다이이치생명 건물의 개인 집무실에서 오랜 기간 고립해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자신을 지움으로써 가면과 신비로움이 자연스럽게 씌워졌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조건에 맞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장막을 쳤지만, 다시 거두어져 약한 인간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는 1906, ’아시아 우선주의자가 돼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맥아더가 제안한 정책은 국무부의 정책 입안자들의(167) 방침보다 온건한 경우가 많았다. 일본의 산업과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호의적이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극동에서 반격 구상을 추진하는 데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48년 초 중국 국민정부를 본격적으로 원조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아시아를 전략적 우위에 두어 역사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정체를 감춘 파시스트 및 반유대주의자 집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지지자는 대부분 반격적 성향을 띤 우파 고립주의자였다. 가까운 친구인 모즐리 장군은(168) 의견이 다른 부류나 인종적 오염은 국가에서 추방하고 잘라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의 세계관, 특히 미국에 있는 그의 지지층의 지닌 특징이었다.

연합국 최고사령부 정보 책임자 찰스 A. 윌러비 장군은 맥아더보다 핵심적 반격론자와 더 친밀했다. 융커 가계 출신이고 바이덴바흐 남작의 아들로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미국으로 와 윌러비로 이름을 바꿨다. 14년 게티즈버그대학을 졸업하고 17~18년 멕시코 혁명 기간 중 미국 원정군으로 판초 비야를 추적했다. 태평양전쟁부터 51년 한국 사령부를 떠날 때까지 그는 내내 맥아더의 정보 책임자였다. 극우 단체와 긴밀하고 공개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프로이센 장교처럼 행동했다. 태평양전쟁 동안 그는 허영심이 강하고공식 발표는 매우 정확하지 않다는 평판을 받았다(169). 뿌리깊은 인종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로 소련 진영을 “’황인종-범슬라브주의의 역사적 연속이라고 봤.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세계관을 지닌 대단히 혐오스런 인물이었다. 그의 편집증은 기밀문서를 파괴해 고든 W. 프랭 같은 악인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프랭은 한국전쟁 관련 기밀문서와도 중요한 관계를 가진 진주만 사건을 연구한 위대한 역사가였다. 윌러비는 한국전쟁 자료에도 손을 댔다. 윌러비가 숭배한 영웅은 프랑코 장군이었다(170). 그는 프랑코가 공산주의자의 제5열을 완전히 소탕한 것을 칭송하고, 스페인 내전은 15년에 걸친 반공 전쟁의 서장이며 그 마지막 장이 한국전쟁이라고 봤다. 그는 한국전쟁을 스페인 내전에 자주 빗대었다. 일본 점령 기간에 그와 맥아더는 도쿄 주재 스페인 및 포르투갈 대사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윌러비는 세균전을 자행한 전범인 이시이 시로 장군을 비롯해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비밀리에 계속 접촉했다. 전직 나치 장교들과 가까운 관계였다. 맥아더가 해임된 뒤 윌러비는 국제위원회라는 우익 국제 조직을 만들어 텍사스의 헌트 형제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독일 우익 세력 및 빌리 제임스 해지스 크루세이드 등과 연결시켰다. 헌트 오일의 대리인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 모잠비크 연안의 석유 채굴권을 획득하고자 했다. 파시스트와 편집증 환자로 보인 참모장을 거치지 않고 맥아더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고급 장교였다. 윌러비는 맥아더와 매우 가까운인물로 평가됐으며 맥아더를 헌신적으로 따랐다(171).

윌러비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타고난 반동인 윌러비는 미국 자유주의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섬과 같았으며, 자신과 같은 사람을 다시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상관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172).

 

한국전쟁의 기원2-1 1부3장 일부(브루스커밍스24.3.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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