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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기원 2-1권 브루스 커밍스 3장 일부(24.03.09).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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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로비, 매카시즘, 반격

p173 : 미국의 뒷마당에서 중국식 정치가 시행되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이런 숨겨진 갈등이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공화당 우익의 일상적 정치에 중국 국민당이 이상할 정도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중국이 일시적이지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한 까닭은 신중국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불투명하고 이(174)해하기 어려운 광대한 나라였던 중국이 신중국으로 변모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결집시킬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중국은 미국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기에 역설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그것은 우익과 팽창주의자가 어떤 글이라도 쓸 수 있는 빈 서판이었다.

중국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악취 나는 부패와 폐허 위에 군림하는 메스거운 독재로 변모한 실패한 민족주의 혁명은 허스트가 휘두르는 마법의 지팡이에 의해 기독교를 신봉하는 민주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다. (...) 뉴딜 이후 중국은 공화당 보수파와 우파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문제가 됐다.

 

p177 : 매카시는 국무부를 비롯해 여러 기관에 있는 자유주의자들을 향해 “4억 아시아인을 무신론의 노예제에 팔아버린 공산주의자와 동성애자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178) 매카시즘은 비렉이 우리의 옛 지배계급이라고 부른 부류, 동부 출신으로 학력이 높고 유복하며, 월가의 애치슨이나 디트로이트의 산업가로 동부화된 폴 호프먼처럼 국제협력주의자이며, 적어도 겉으로는 자유주의자인동부 기득권층을 겨냥한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이 계급은 정부의 행정권부와 사법부를 계속 효과적으로 장악해왔고 (...) 미국의 교육과 지적 생활을 대부분 지배했으며 (...) 어떤 것이 훌륭한 선택인지 결정하는 데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녔고 (...) 재단들을 지배하는 데 견줄 만한 상대가 전혀 없었다”. (180) 매카시즘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정치였으며, 늘 존재하면서 언제나 낯설고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위기 때마다 떠오르는 경향 1차 세계대전 뒤 적색공포, 2차 세계대전 뒤 매카시즘, 베트남전쟁 뒤 제리 폴웰과 제시 헬름스 의 일부였다. 그것은 공화당 보수파에 뿌리를 둔 주된 경향이엇지만 공화당과 민주당 중도파의 비판적 지지를 받았다.

 

p182 : 4월 초 메카시는 래티모어가 소련의 간첩임을 입증하는 서류가 있다고 그것을 언론에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래티모어는 한국이 작은 중국이며 이승만은 제2의 장제스라고 봤다. 그는 미국이 장제스를 지원해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중국이나 아시아 다른 곳에 산재한 작은 장제스들을 지원해 이길 수 있겠는가라고 판단했다. 그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반역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1945년 이후 장제스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세력이 공유한 주제였다. (184) 래티모어는 한국에 대해 앞을 미리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한국이 대단히 불쾌한 경찰국가가 되고 있다고 정확히 말했다.

주요 권력은 일본에 협력했던 인물에 집중돼 있습니다. (...) 현재의 남한 정권은 아시아에 있는 미래의 민주 세력의 희망을 좌절시키고 있습니다.

 

p185 : 래티모어를 겨냥한 매카시의 마녀사냥은 본질적으로 분명히 정치적이며 허위적이었지만, 몇 주 만에 자유주의적 언론기관들은 고전적 대응 방법을 사용해 매카시의 총구에서 벗어났다. 래티모어가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는 지지하지만 그 견해 자체는 무책임하며 극단적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자유주의 세력이 결집해 새로운 중도라는 안락한 거점으로 나아가는 이런 과정을 보면 미국 정치에 뿌리 내린 좌익이 없다는 결과를 목격할 수 있는데, 좌익 자유주의자를 정치적 포용이라는 신성한 영역 바깥으로 내던져 기반이 매우 위험하고 불안해지도록 방치한 것이다. 래티모어를 겨냥한 매카시의 공격을 허용할 수 있는 범위의 새로운 경계선을 정확히 설정했다.

 

p186 : “자유주의 세력이 미국의 좌익을 거부한 새로운 자유주의를 구축하고 적색공포라는 근본적 전제와 전술을 수용하는 데 예상외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라는 메리 매컬리프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다. 대외 정책에서 그 효과는 수용을 중시하는 국제협력주의자의 생각을 결박하고 마비시켜, 반격이라는 대안을 허용하도록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 이것은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몇 주 전의 일이었다.

조 매카시는 지배 세력이 바라는 길을 닦는 역할을 자임한 기회주의자이자 허무주의자이자 전형적인 극단주의자였기 때문이다.

-> 기회주의=극단주의가 될 수 있는 역설!!

 

지배층 내부의 핵심 쟁점은 매카시의 주요 지지자들이 반역적 행위를 했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1930년대 그의 후원자들은 미국 우선위원회와 독일계 미국인협회에 가입한 부류를 포함해 대부분 독일(나치)을 지지했다. 그들은 진주만 공습 이후 대단히 불안한 상황에 놓였다. 그들은 세계대전이 끝난뒤 그동안 한 행동을 조사받을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사실은 진주만 사건 조사위원회를 설치한 동기와 뉴딜주의자를 공통의 표적으로 삼은 까닭을 일부 설명해준다. (187) 그들은 1940년대 초 전시에도 여전히 나치와 거래하는 미국 기업을 가장 강력히 비판했고 그 세력의 약점도 모두 알고 있었다. 이들은 1950년대 매카시 일파의 표적이 되었다.

 

제임스 버넘 : 개인주의의 이론가

 

p187 : 미국은 중국 국민정부의 200개 사단에 무기를 공급해 만주를 되찾아야하며, 그럴 경우 소련의 관심을 유럽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그들이 극동에서 확보한 거대한 산업 거점 하나를빼앗는 이점이 있다고 제안했다.

 

(188) 그러나 좀더 중요한 것은 버넘의 생각이 고립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안보 국가의 관료주의적 노거를 제공함으로써, 쇠퇴하던 고립주의자와 남부의 선벨트 지대, 국방 예산을 갈구하던 반격론자를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버넘은 정치적 중재자이자 기인(奇人)이었던 인물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인물은 선천적으로 도덕관념이 없었고 국가 안보의 경영자로 현실 정치에 입각한 세계관을 상징한 리처드 닉슨이었다. (...) 제임스 버넘은 배외주의(=국수주의)적 반격과 냉정 시대의 봉쇄 사이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타협을 이룬 총명한 설계자로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 혼합물을 개입주의라고 부르겠다. (...) 1950년 상황은 버넘의 영향력은 커졌다.

 

(190) 1950년 초 루스의 큰 찬사를 받으며 출간된 <다가오는 공산주의의 폐배>에서 버넘은 반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봉쇄는 너무 방어적이어서 부분적이며 잠정적인 편법 이상은 될 수 없었다. 미국은 세계의 모든 전선에서 역동적인 적과 맞닥뜨렸다. 이것의 유일한 해답은 공세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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