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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한국

8장 유격대 투쟁

 

194710월 여순반란이 일어났다. 그 이전 남한에는 유격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48년 여름 정보기관은 유격대가 조직화하고 있다는 여러(399)보고를 받았다. 대부분의 활동은 산간 은신처에 생활용품, 특히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활동의 중심은 전남이었는데 네 구역으로 나눠 한 구역마다 4~5개 부대를 배치했다. 4개 병단마다 100명의 무장 인원이 있었고 1000명 정도의 비무장 인원이 그들을 지원했다. 무기가 부족해 대부분 몽둥이나 창을 가지고 다녔다. 충청도의 유격대는 영동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백산맥은 그들의 북방 한계선이었으며 남쪽으로는 지리산까지 뻗어 있었는데 나중에 가장 유명한 유격대의 보루가 됐다. 또 다른 훈련 거점은 충남 서산군의 산악 지대였다. 영동과 서산에는 가장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박헌영과 이승엽은 유격대의 활동이 시작된 시점을 1946년 가을 봉기 직후로 본다. 북한의 자료는 무장 유격대의 투쟁은 제주 4·3 봉기에서 시작돼 여순반란을 거치면서 본토로 확대됐다고 봤다. 유격대의 핵심 목표는 인민위원회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알려졌다(400). 유격대 투쟁은 여순반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CIA 정보는 제주도·지리산·오대산에 대규모 부대들이, 영동에는 소규모 부대가 있다고 판단했다. 1945~46년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있던 군들과 일치한다(401).

한국 지형

유격대 활동이 늦여름에 가장 왕성했고 11월에 점차 줄어드는 유형을 보인다. 유격대가(404) 겨울을 준비하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의 유격대

이승만 정권으로 이행한 것은 전라도의 정치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미국의 조사는 늘 전남이 남한에서 가장 좌익적인 도라고 판단했다. 야당은 도시와 군청 소재지에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북은 우익이 지배했다.

전라도의 조직적 유격대 활동은 지리산에 집중됐다. 핵심 지도자는 유일성으로 윤채욱이 본명이다. 경성제국대에서 공부한 공산주의 지식인이며 해방 뒤 서울대에서 좌익학생을 이끌었고 영등포 지역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여순반란 이후 입산해 49년 전사했다. 경남 출신 김세택을 미국은 총대장으로 생각했다. 노동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현상은 서울 출신으로 45세 정도였으며 지리산 유격대 제6연대장이었다. 구례군 출신의 박천해는 제7연대를 이끌었다. 유격대는 전남의 거의 모든 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유격대 영향을 받지 않은 군은 고창과 순창이었다. 화순탄광지역은 우익에게 늘 골칫거리였다(406). 많은 여성이 남부 유격대에서 전투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8월 말 경찰과 한국군은 화원면에서 유격대와 교전했고 사로잡힌 유격대 7명은 지역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됐다. 7~8월 전남의 대부분 군에서 작은 규모의 유혈 사건이 많이 일어났으며 나주는 특히 피해가 컸다. 1950년 초 대규모 토벌 작전과 겨울을 겪으면서 유격대 활동은 줄어들었고 무질서 상태로 돌아갔다(407).

 

경상도의 유격대

경북 유격대는 인민위원회로부터 성장했다(407). 주력부대는 그들이 은신한 산의 이름을 따서 일월산이라고 불렸다. 남부 출신 김달삼이 이들을 이끌었다. 유격대를 여섯 부대로 나눠 봉화·안동·문경·경주·울진·영덕에 하나씩 배치했다. 각 부대는 200여 명이었고 35~80정 소총을 보유했는데 모두 일제나 미제였다(408).

경찰은 모든 청년에게 우익 청년 단체에 가입하도록 요구해 그들을 유격대에서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다. 10월에 도 전역에서 유격대의 공격이 전개됐다. 10월 초 400여명의 유격대가 안동의 경찰과 군의 거점, 감옥을 공격했고 미국 문화공보원 사무실을 불태웠다(409). 미국 시설을 공격한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이 시기 G-2 자료에서는 경상도 유격대의 일부가 영덕 연안에 정박한 배에서 충원됐다는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배는 북한에서 온 것으로 생각됐다. 미국 중순양함 세인트폴호와 구축함 두 척은 그 직후 부산에 입항했다. 유격대는 군이 들어오면 사라졌다가 군이 나가면 다시 돌아왔다. 정보를 제공한 사람을 처벌했다. 대부분의 공격은 한밤과 새벽 사이에 일어났다.

1949~1950년 겨울이 닥치면서 경상도의 유격대는 겨울 생활물자를 준비하기 위해 약탈을 시작했다. 마을에서는 비축한 곡식을 빼앗기거나 지주가 공격받았다(410). 산이 많고 나무가 울창한 이 지역의 지형은 유격대가 은신하기 쉬웠다. 19504월 전남 유격대 활동은 다시 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유격대는 대단히 약화된 채 도주하고 있었다. 전라 경상 이외 지역으로 동해안 북부의 강원도와 충청 영동군에서만 활동했다. 그곳은 인민위원회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충청도 유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논산군인데(411) 주요 쌀 생산지로 소작률이 높았다. 우익 정당들이 미곡 징수와 경찰을 돕는 일을 했고 그들은 지역 농민들이 가장 혐오하는 두 가지 일을 도왔던 것이다. 미군정이 논산군을 다스린 결과는 인구의 2~3% 정도 되는 부류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치를 후원하고 방어했으며 나머지는 방치한 것이었다. 지역 주민의 는 유엔 한국위원회가 한국의 선거를 감독하고 있다거나 선거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예외적인 곳은 영동군이었다. 전라 경상 정치와 비슷했다. 철저히 급진적이었으며 유격대는 48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산간 지역과 마을을 활보했다(412).

유격대는 경기도에서는 활발하지 않았고 강원도의 좌익은 강력한 해안 지역에서조차 보잘 것 없었다. 강원도는 북한이 침투할 유력한 후보지였고 거기서 유격대 활동은 38도선을 넘나드는 지역 빨치산 부대와 융합됐다. 그들은 대부분 전라도와 경상도 출신으로 평양 정치학원에서 훈련받았다. 이 부대들은 강릉 서쪽 오대산에 있는 기지에서 내려와 지역 주민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공격은 강릉과 삼척군에서 일어났는데 삼척에는 좌익 탄광 노동자가 많았다. 그러나 남동부와 서남부의 사건들에 비할 규모는 아니었다(413).

 

유격대가 사용한 방법

유격대 활동은 대부분 한반도의 지형을 따라 전개됐는데 1930년대 유격대와 적색농민조합이 황무지와 산악 지대 또는 고립 지역에서만 살아남은 것과 비슷했다. 그들은 밤에 마을로 들어가 주민을 불러내 연설하고 식량과 그 밖의 물품을 확보했다. 상황이 악화될수록 마을 전체를 공격하고 물품을 찾느라 그 일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가장 일반적인 행동은 경찰서 공격이었는데 경찰에 대한 폭넓은 증오와 경찰서에 있는 좌익 가족들의 기록 때문이었다(414).

북한 자료는 유격대 활동을 농민반란과 비슷하게 묘사했다(415). 계급 투쟁의 수준은 높지만 조직화의 수준은 낮은 유형을 보여준다. 유격대의 폭력에는 정치와는 무관하며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농민의 보복적 정의라는 고전적 특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미국인은 유격대가 구례의 파출소를 공격한 후 부서장은 사로잡혀 고문받은 뒤 한 팔은 나무에 묶이고 다른 팔은 달리는 트럭에 묶여 죽였다고 서술했다. 이런 현상은 모두 1946년 가을 봉기와 거의 다르지 않았으며 1920년대 중국의 상황과 비슷해 보였다. 당시 후난성에서는 활동가가 농민을 선동해 지주에게 제한 없는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장하고 강력한 민중운동의 뒤를 따르기만 했지, 그 활력을 이용하는 데는 실패하고 보복에서 빈농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마오는 비판했다. 1946년 좌익활동의 골칫거리였던 분열된 구조는 유격대에도 영향을 줬다. 유격대는 서로 떨어져 단독으로 활동했으며 진압군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협동작전을 거의 수행하지 않았다(416).

 

외부의 개입과 진압활동

소련은 남한 빨치산에 관여하지 않았고 북한은 주로 강원도에 침투하려는 시도와 그곳의 유격대 활동에 연관된 반면 미국은 남한의 유격대 토벌군을 편성하고 무기를 제공했으며 가장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전투 계획을 세운 데다가 때로는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소련의 무기는 38도선을 따라 침투한 소수의 인원에게서 노획한 것을 빼고는 남한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침투한 유격대는 소련인 고문에게서 훈련받지 않았다. 그들은 빨치산과 공작원을 양성하는 북한의 강동학원에서 훈련받았다(417). 미국 정보기관은 2000명 정도의 신병이 강동학원에서 훈련받았으며 1800명 정도가 남한으로 침투하려고 했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유격대는 일본과 미국제 무기를 지녔다. 미국 정보기관이 가진 의문은 북한이 왜 그 이상 하지 않는가였다. 북한은 남한 유격대에게 자신들의 방식을 강조하지 않았다. 실제로 노동당은 남한에 격려는 했지만 그 밖의 것은 없다고 암시했다. 북한은 스스로를 재건하라고 남로당에 지시했다(418).

남한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다시 통일하려는 전략에서 합의를 이뤘다면 남한 내부에서는 무장투쟁을 오래 끄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었다. 그것은 미군을 불러올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다. 남한 유격대를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그 실패를 박헌영의 책임으로 돌려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 지도부는 박헌영·이승엽 같은 국내파공산주의자에게 남한 빨치산 운명의 책임을 지웠다. 그들이 성공했다면 한국을 통일하는데는 좋았겠지만 공산주의 지도부 통일에는 나빴을 것이다. 실패한다면 김일성에게는 유리했을 터였다(419).

외부에서 유격대 전쟁에 개입한 주요 세력은 미국이었다. 미국인들은 한국을 떠난 적이 없었다. 미국인 고문들은 남한의 전투 지역 전역에 있었으며, 한국인들에게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라고 독려했다. 제임스 하우스만이 대표적인데 여순반란 진압 작전을 계획한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정보활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미국과 한국의 군부와 정보 기관 사이의 연락을 담당했다(419).

1949년 가을 대대적인 진압 작전이 시작됐고 1950년 유격대는 더 이상 대규모 작전을 전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420) 진압 작전을 칭송했다. 진압 방법은 미국의 방법과 일본이 만주에서 개발한 기법, 일본에서 복무한 한국인 장교들이 시행한 방식이 융합됐다. 날씨와 지형을 이용하며 단호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유격대를 농민 지지자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 유격대의 거점 지역을 고립시키고 식량과 무기의 재공급을 차단하는 것이다. 협력자로 의심되는 농민을 학살하고 대규모 주민을 보호받는 향촌으로 이주시키고, 사로잡은 유격대를 처형하거나 전향시키는 것 등이었다(421). 유격대는 사로잡히는 총살되거나 철저한 사상 개조를 거쳐 전향되었다. 그런 뒤 반공 단체나 내선일체를 추진한 협화회의 지도자나 구성원이 됐다. 이 진압 기술은 결과적으로 효과가 있었다. 마오주의의 동원 기술은 중국 북부의 광대한 변방지역에서는 제대로 작동했지만 만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남한에서 동일한 진압기술이 유용하게 쓰였다. 날씨와 산악 지형, 유격대 재충원의 어려움. 비교적 쉬운 해안 봉쇄때문이었다.

진압군 최고 지휘관은 김백일, 정일권, 백선엽으로 전직 일본 관동군 장교로 5년 동안 만주의 유격대 소탕 작전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김백일은 함북 명천출신으로 정일권과 봉천군관학교 동기였으며 46년 초 백선엽과 함께 북한을 떠났다. 여순반란을 진압하는 데 수훈을 세웠다(422). 정일권은 함북 경원 출신으로 1940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만주군에 들어가 45년까지 복무했다. 45년 남한으로 도피했다. 47년 국방경비대 총참모장이 됐고 미국인은 그를 좋아했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 등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다(423).

려음이 끝날 무렵 유격대는 남한의 광범한 지역에서 활동했고 만만찮은 세력으로 보였다. 그 결과 미국은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대규모 동계 진압 작전을 개시했다. 1949년 늦가을에 시작된 그 작전은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까지 이어졌다(425).

 

결론

동계 진압 작전이 실패했는지 여부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19506월에 일어난 통상적인 정면 공격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다(426).

 

한국전쟁의 기원2-1 2부8장(브루스커밍스24.4.1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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