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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료 기구에 침투한 반격

한국 전쟁의 기원 5장(2404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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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8 : 중국의 주변 지역과 관련해 일본을 제외한 기본적 선택지는 셋이었다. 첫째는 철수(군부는 한국에서는 철수를 바랐지만 타이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둘째는 봉쇄(애치슨은 한국에 대해서는 봉쇄를 선호했지만 장제스가 장악한 타이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보호하겠다는 견고한 보장(이승만과 장제스 및 그들의 지지자들이 바랐다)이다. 그런데 1949년 여름에 새로운 선택지가 추가됐다.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영역을 축소시키는 것, 곧 반격이었다.

 

p251 : 반격에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 집중하는 자유주의적 반격과 타이완에 집중하는 보수적 반격이다. 존슨은 후자를 지지했으며 국방부와 그 밖의 부서의 일부 관료는 전자를 중시했다. 그러나 믿을만한 기록에 따르면, 애치슨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봉쇄를 고수했다. 존슨에게는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였다. 문제는 중국(국민당)과 일본 가운데 어느쪽이 결승선을 넘느냐였다. 존슨은 국민당 편이 돼 그들의 쿼터백으로 뛰었고, 애치슨은 전체를 관리하면서도 일본 쪽을 돌봤다. 존슨은 팽창주의자였고 애치슨은 국제협력주의자였다.

 

p262 : 한국 봉쇄는 일본의 안보와 연결돼 있으며, 안보 문제는 거대한 초승달 지대의 핵심인 일본의 경제적 부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앞서 말했다. 이제 쇠퇴하고 몰락한 국제협력주의자들에게도 일본 경제의 필요성은 일본과 연결된 반격 전략을 암시했다.

(263) 한국 경제의 운명을 일본과 다시 결합시키려는 욕구는 참전의 이유가 됐다고 여겨진다.

국제협력주의자는 재건된 일본을 위해 원자재, 노동력, 시장을 공급할 배후지나 주변을 확보한다는 좀 더 광범한 문제에 치중했으며, 거기서 한국은 그저 이차적이거나 보완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264) 이것은 한국이 일본의 심장을 찌르는 비수라는 히데요시와 메이지 지도부의 오래된 전략 논리였다. (265)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만주와 중국 북부를 공산 세력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일단 그 지역이 확보되면 미국은 자본을 투입할 수 있다(앞서 일본이 그 지역에서 산업을 계속 경영했기때문에 비용은 그리 많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뒤에는 토지,세제,신용거래의 철저한 개혁을 실시한다. 이것이 자유주의적 반격이고 제한적반격이며 일본과 연계된 반격이었다. “중국 북부, 만주와 한국, 일본의 전략적, 경제적 관계는 대단히 명백하다.” (268) “서구 서계의 경제활동은 확장과 맞물려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후진 지역의 발전은 그 지역 자체의 후생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선진국에는 시장과 잉여 생산 시설을 유용하게 활용할 기회를 제공했다.”

 

p270 : 국가안보회의 문서48에 감춰진 수많은 가설을 충분히 이해(271)하면 한국과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을 미국, 일본, 서유럽이라는 주요 공업국의 주변부를 획득하려는 투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의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이후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시장에 침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시아의 배후지라는 논리는 한국전쟁 내내 존속했다. (273) 일본 로비의 전체적 목표는 미국이 일본을 점령한 초기에 집중하던 민주화와 무장해제를 끝내고, 일본의 산업 경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일본 군국주의와 관련된 전시의 재계 지도자들의 처벌과 주요 재벌 기업 해체를 반대했다.

 

p281 : 월터 베델 스미스는 미국이 어떤 종류의 군사적 주도권을 확립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우드러프의 질문은 너무 이르며, 미국은 우선 소련과 전쟁을 치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우드러프는 목소리를 높여 좀더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그것을 유도할까요, 아니면 그들이 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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