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3. 역사적 여건들- 군사적 기획 사회와 종교적 기획 사회

 

. 정복하는 사회: 이슬람교

1. 이슬람교에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

이슬람교의 신적인 초월성 안에는 완충지대가 없다. 무함마드는 신의 결정적 계시를 명예롭게 받은 그저 한 인간일 뿐이다. 무함마드는 부처나 그리스도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명확하고 대체 불가능한 의미를 가진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132).

신은 억압하는 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코란의 내용은 신의 관념과 부당한 억압이 서로 모순된다. 이슬람의 주권이 일반적으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상당부분 갖고 있다. 자유란 반항에 근거하며 불복종과 같은데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는 복종을 의미하고 스스로 복종하는 이가 바로 이슬람교도인 것이다. 신의 대리자들이 요구하는 율법에 복종한다. 데르멩겜이 무함마드에게 위대한 성전이 이교도에 맞선 이슬람교도의 전쟁이 아니라 이슬람교도가 끊임없이 치러야 했던 자(134)기 자신에 대한 금욕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메디나로 천도한 초창기부터 무함마드의 계승자들은 약탈로 연명했다(135).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는 정복을 위한 전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경전은 무용한 폭력과 수탈을 배제한다. 피정복자에게 가해지는 규제는 인간적이어야 했고, 그들에게는 오직 세금만이 부과되었다.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인 이만은 이슬람 지대와 직접적으로 이웃해 있는 전쟁 지대의 이교도들에 맞서서 지하드를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성전은 이슬람 국경 지대에서 항상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일이었다. 이교도와 진정한 평화란 없었다. 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전(136)을 피하기 위해서는 힐라라는 법적인 방책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슬람 국가가 쇠약한 상태거나 국익에 필요한 것이라면 최대 10년 동안 이교도와 휴전협정을 맺을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슬람 지도자들은 마음대로 협약 자체를 파기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는 정복이라는 방법적 노력에 전념했던 규율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수된 기획은 텅 빈 틀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외적 결과는 더 특징적이고 덜 불안정하며 더 형식적인 것이다(137).

 

2. 헤지라 이전 아랍인들의 소진/소모 사회

이슬람교는 흩어져 있던 아랍의 요소들을 하나로 모아 제국을 이뤘다. 공동체들은 자신들 부족의 엄격한 규칙을 지키며 시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는 격렬한 개인주의를 유지했다. 개인 또는 부족 사이의 경쟁관계, 용맹함, 정중한 태도, 헤픈 낭비성, 웅변술, 시적인 문제를 겨루는 일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증여와 과시적 낭비가 만연했고, 이슬람 사회에 포틀래치 의식의 형식이 있었다(138). 다신교를 믿고 잇던 많은 부족들이 피를 바치는 희생제의의 형식을 갖고 있었다. 이슬람 이전의 아랍인들은 아즈텍인들에 비(139)할 때 군사적 기획 사회의 단계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들의 생활방식은 소진/소모 사회의 원리에 상응한다. 같은 단계의 민족들 사이에서 아즈텍인들은 군사적 헤게모니를 행사했던 반면 사산왕조 이란과 비잔틴제국을 이웃으로 뒀던 아랍인들은 발전이 느릴 수 밖에 없었다(140).

 

3. 탄생하는 이슬람 또는 군사적 기획으로 환원되는 사회

무함마드는 반이슬람 부족들이 개인적이고 영광스러운 남성성의 이상으로 생각했던 무루와라는 가치에 대해 복종의 교리와 믿음을 뜻하는 딘을 대립시켰다. 이슬람 공동체 안에서는 피의 복수를 금지시켰지만, 이교도에 대한 복수는 허용했다. 유아 살해, 음주, 경쟁적 증여를 단죄했다. 순수한 영광의 증여를 사회적으로 유용한 적선으로 대체했다(141). 관대함은 미덕이었지만 돌연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개인의 자만심 역시 저주를 받았다. 야성적 이미지를 갖고 부족들의 시 속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아랍의 전사는 신심 깊은 군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공동의 기도 관습도 그러한 변화를 밖으로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시적 전통이 겨우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한 이슬람 군대가 정복의 물결에 휩쓸린 이후였다. 이슬람 제국의 지배력이 공고화한 이후 관대한 낭비는 더 이상 불편함 없이 행해질 수 있었다(142).

애초부터 이슬람은 아랍 세계에 폭력적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운을 지녔는데 무함마드의 가르침이 아랍 부족의 전통을 모독하여 그들과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추방되어 부족과의 연결 관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고 전혀 다른 성격의 연결 관계를 수립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교 시대의(144) 기원이 되는 헤지라의 의미다. 혈연관계와의 단절은 동시에 종교적 형식을 받아들인 선택된 신자들의 형제애에 근거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수립을 의미했다. 어떤 혈연이나 장소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성격의 국가, 새로운 성격의 공동체라는 세계의 도래를 기원 삼아 시작되었던 것이다. 종교지도자는 법제정자인 동시에 판관이었으며 군사의 통솔자였다. 의지는 사회적 연결 관계의 기원에 있는 유일한 것이었으며 깊은 도덕적 통합을 보장하는 강점을 제공했고 무한한 확장을 벌여나갈 수 있는 힘을 열어졎혔다(145). 하디스가 방법적으로 확장의 수단으로 삼았던 정복은 새로운 자원들을 닫힌 힘의 체계 안으로 투자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힘의 체계는 점점 방대해졌고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성장은 축적되었다. 이슬람은 종교적 삶을 군사적 필요성에 완전히 종속시켜 신실한 이슬람교도는 부족 사회의 낭비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이교적 적에 대항하기 위한 외적 폭력 외 모든 힘의 소비를 일반적으로 거부한다. 희생제의를 통해 절정에 달하는 내적 폭력은 단지 이차적인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슬람 사회는 소진/소모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처럼 사용 가능한 힘을 축적하는 사회였다. 군사적 주권자는 희생을 끝내고 싶어 폭력을 바깥으로 돌려서 내적 소진/소모로부터 공동체의 생생한 힘을 보존하려고 했다(146).

 

4. 후기 이슬람 또는 안정성으로의 회귀

설립과 정복 안에서 주어졌던 이슬람의 의미는 이슬람 제국의 건설로 상실된다. 생생한 힘들은 완전히 성장에 바쳤던 일을 멈추게 되자마자 이슬람은 그저 텅 비어 있는 완고한 틀로만 남게 되었다. 정복이 안정화되자 무루와와 같은 것이 계속 아랍 세계 안에 살아남아서 폭력과 낭비, 사랑과 시를 한데 묶을 수 있는 기사도적 전통과 가치를 유지하며 되살아날 수 있었다. 기사도적 표현 자체가 새로운 시적인 의미를 얻게 된 것도, 그것이 열정이라는 가치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십자군 전쟁 때의 일이다. 12세기 서양에서 무장이라는 의식의 통상적 해석은 이슬람적인 것이었다(149).

 

. 비무장 사회: 라마교

1. 평화로운 사회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도들의 신심 만으로 설명하기에 티베트는 침략 앞에서 너무도 나약했던 그들의 대응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다른 종교들 역시 전쟁을 단죄하고 있지만, 그러한 종교를 표방하는 민족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살생을 하고 있음이다(152).

 

2. 근대 티베트와 그 티베트를 분석했던 한 영국인

찰스 알프레드 벨의 책은 정돈되지 않은 연대기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증언이다. 달라이 라마와 우정에 기초한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갔던 최초의 백인이다(154).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영국은 돕는 정책을 취했다. 영국령 인도와 중국 사이의 일종의 완충국으로써 자율적인 강국이 되는 것을 열망했고 중국인들과 이웃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간접적으로 중국과 적대적 관계를 감해야 한다면 굳이 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3. 달라이 라마의 순수하게 종교적인 권력

달라이 라마의 영적 권위는 그 세속적 권위로 인해 더욱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주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에 라마에게 부여되었던 역할에 더 이상 안주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였다. 아무런 군사력도 받쳐주지 못하는 달라이 라마의 권위는 세력 다툼을 통제하기에는 너무도 약했기에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실제적 제재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158)로잡음과 동시에 자금력에 의해서든 국민 정서에 의해서든 군대를 지배하지 않고서는 주권이 허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신정 국가 티베트는 중국과의 주종관계 아래에서 복속국이라는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17세기부터 티베트에 개입하게 되는데 중국이 달라이 라마의 선출을 계속 통제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때쯤이었다. 주둔군을 이끄는 암반이 티베트의 실질적인 세속 권력을 갖게 되었다. 주둔군의 세력을 크지 않았고 행정권은 순수하게 티베트에 속했다(159). 달라이 라마의 주권은 신성했지만, 그렇게 신성한 만큼 무력했다(160).

 

4. 13대 달라이 라마의 무력함과 저항

달라이 라마의 실질적 권력은 중국의 주의가 느슨해질 때 가능해졌지만 그 권력은 불안정한 것이었다. 멀리 고립되어 있었고 명상에 전념하는 승려이자 종교적 우상이 되는 교육을 받았음에도 이러한 정세를 재빠르게 간파했다(162). 영국이 라싸로 진격하여 티베트의 국경지방인 시킴을 영국의 보호령으로 승인할 것만 강요한 채 물러났는데 외국 세력이 티베트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영향권은 확정되었지만 티베트의 주권도 암묵적으로나마 인정되었는데 이는 중국과의 주종관계를 폐지하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몽골을 거쳐 중국 산시성으로 간 후 다시 베이징에 머물며 살아있는 부처(163)와 천자의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다시 라싸로 돌아가자 중국군대가 쫓아와 남쪽으로 망명길에 나섰다. 영국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실질적 통치 능력은 없지만 그 없이는 권위도 없었기에 망명자를 기꺼이 받아들였다(164). 그러나 더 이상의 지원은 거부했다. 청이 몰락하자 티베트인들은 라싸에서 중국 주둔군을 몰아냈고 달라이 라마는 7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복귀했고 정권을 능란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들을 통해 13대 달라이 라마는 특별해졌고 살아남아 권력에 대한 경험을 획득했다.

티베트 라마교 승원에서 추구되는 수행은 최고의 박학다식함을 요구하였기에 승려들은 특히 난해한 논쟁에 탁월하다. 그러나 정치적 필요성의 감각은(165) 잠재우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망명 시기에 정부 운영에 유용한 지식을 습득했다. 군사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166).

그런데 그 시대에 티베트 국민들은 승려들을 선택했고 왕들은 무시했다. 모든 위엄은 라마들에게로 돌아갔고 군사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라마가 왕의 위엄과 맞먹는 위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왕으로부터 외부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권력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기도의 세계는(167) 무기의 세계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갖고 있었지만, 힘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파괴하고만 말았다. 티베트는 내부적으로 저항하던 힘을 이미 파괴했기에 외부의 힘에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행될 수 없는 한 권력, 곧 본질상 외부에 열려 있으며 그 외부로부터 오직 죽음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었던 이러한 권력의 책무를 그는 충실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168).

 

5. 군사 조직화의 시도에 대항하는 승려들의 저항

직접적인 군사 원조는 여전히 거부되었고 심지어 단순한 무기의 제공조차도 고려되지 않았지만, 벨은 군사 조직화를 위한 달라이 라마의 노력을 지원했다. 20년 안에 육천명에서 만 칠천명에 이르는 군대를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사원의 재산세로 이러한 군의 운영비를 충당할 계획이었다.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유력자들에게 양보를 강제했지만, 급작스럽게 한 사회로부터 그 기존의 본질을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체 승려들뿐만 아니라 국민들 역시 당혹해(169) 했다. 군대의 증강은, 승려들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일이었다. 티베트는 티베트인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사제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는 나라였다. 나머지는 그에 비해 주변적인 것이었다. 어떤 새로운 요소가 증대되는 일은 승려들의 목소리르 외에 다른 목소리로 정당화될 수 없었다. 군대를 지지하는 소수의 사람들조차 군대가 종교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임을 강조해야 했다(170). 달라이 라마의 군사 정책은 신중했는데, 기본적 상식이 그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반대할 수는 결코 없었다. 승려들의 대의명분은 티베트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사원제도 자체에 대한 배반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승려들의 대의명분은 내적으로 강력한 정부의 확고함과 충돌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길을 잃었다(171). 놀라운 것은 그러한 대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최초의 군중 운동이 그럼에도 대의를 그토록 열력하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6. 라마들에 의한 과잉 전체의 소진/소모

승려들의 적의에 찬 이러한 운동을 더욱 중대하게 한 것은 승려들의 이해관계였다(172). 1917년 라싸 정부의 총수입은 72만 파운드였는데 그 중 군대 예산은 15만 파운드였고 행정 예산은 40만 파운드였다. 그 나머지는 달라이 라마에 의해 정부의 종교 관련 비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승려 집단이 소비하는 비용은 100만 파운드를 크게 웃돌았다. 원칙적으로 종교의 전체 예산이 국가 행정 예산의 두 배 이상에 달했고 군대 예산의 8배 이상에 달했던 것이다. 한 민족이 자신의 활력을 거의 아낌없이 사원 조직에 쏟아부으면서 동시에 군대를 가질 수는 없다(173). 군대는 티베트이들 삶의 본질을 위협하는 것이며 그만큼 불편함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도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었다(174).

 

7. 라마교에 대한 경제적 설명

한 사회를 결정짓는 것은 그 사회가 행하는 과잉의 사용인데 잉여야말로 동요의 원인이자 구조적 변화의 원인이며 모든 역사의 원인이다. 잉여는 하나 이상의 돌파구를 갖고 있는데 그중 공통적인 것은 성장이다. 성장 자체도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한계에 부딪힌 인구의 성장은 군사적인 것으로 전환되면서 정복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군사적 한계 역시 불안정한 것이어서 잉여는 다시금 종교라는 사치스러운 낭비의 형식을 그 돌파구로 삼고 파생된 유희나 공연의 형식 혹은 개인적 사치마저도 그러한 돌파구로 삼게 된다(174).

티베트의 도시 문명은 다른 방향으로 잉여에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빈곤한 고원지대의 민족들은 풍요로운 지역들로 주기적으로 강하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성장은 멈추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쟁 활동을 포기하고서 에너지의 넘침을 새롭게 사용할 방안을 찾아내야만 한다. 티베트의 사원제도는 이러한 과잉을 소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177). 중앙아시아에서 극단적 해결책이란 이러한 과잉의 전체를 사원에 부여하는 것이었다. 에너지 체제를 어떤 방식으로도 발전시킬 수 없거나 그 총량을 증대시킬 수 없는 민족은 그 자신이 필히 생산할 수밖에 없는 잉여의 전체를 순수한 소멸로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마교의 역설이었다(178).

사원들의 수입은 생산력 없는 소비자 집단의 삶을 유지시키는 부의 소비를 보장했다. 티베트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인도나 중국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상회했다. 티베트인들은 낙천적인 기질을 지녔고 신앙심 없는 티베(179)트 체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라마교의 깨달음이 계산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개방, 증여, 상실이라는 소진/소모의 본질을 도덕적으로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티베트의 체제는 16세기 말 몽골로 전파되었다. 몽골인들은 침략이라는 세속적 돌파구가 막혀 있던 중앙아시아에서 이러한 극적 전환의 조치는 라마교가 지닌 의미를 정확히 말해준다. 라마교는 그러한 과잉 전체를 사변/명상적인 삶에, 곧 세계 속에서 지각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유희에 투여했던 것이다(180).

티베트의 제의에서 군사적 형식, 왕정 시대에 대한 환기 등은 춤이라는 찬란한 형태로 체현되기는 하지만 지나가버린 형식에 대한 제의인데 제의적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이 그러한(군사, 왕정) 쇠퇴이기 때문이다. 라마들은 폭력을 외부로 거칠게 분출하는 세계에 대해 얻은 승리를 이러한 방식으로 기렸다. 그들의 승리는 폭력을 내부로 분출시켰다. 티베트에서 군사적 직업이 멸시를 받는다. 사원제도는 순수한 소비이자 동시에 소비에 대한 단념인데, 이는 해결책으로부터 완벽하게 등을 돌리는 조건에서 얻을 수 있는 완벽한 해결책인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바로 그 활동의 한계들 앞에 서게 하고 군사적이거나 생산적(181)인 활동을 넘어서 그 어떤 필요성에도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182).

 

저주받은 몫 3부(조르주 바타유 24.3.26).hwp
0.22MB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