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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여건들- 소진/소모의 사회

 

.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와 전쟁

1. 소진/소모의 사회와 기획의 사회

필요에 비해 더 많은 자원의 과잉이 있다고 해도 이러한 과잉이 항상 순수한 소멸로 소진/소모되는 것은 아니다. 과잉은 성장에 할당된다. 성장은 다산적인 작업에 규칙성을 부여하면서 무질서한 끓어오름을 조절하고 그 숨통을 틔운다. 하지만 인식의 발전이 결부되어 있는 성장은 그 본성상 그저 잠정적인 상태일 뿐이다. 이러한 성장은 무한히 지속될 수 없다(70).

 

2. 아즈텍인들의 세계관 안에서의 소진/소모

아즈텍인들의 세계관은, 현재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계관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방식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아즈텍인들의 사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소진/소모이다. 우리가 노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그들은 희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태양 자체가 희생제의의 표현이었다. 태양은 일종의 신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희생제의라는 화로의 불길 속으로 내던져지면서 태양이 되었다(72).

아즈텍인들의 신화는, 인간이 창조된 이유가, 그리고 인간뿐만 아니라 전쟁이 창조된 이유 또한, “태양이 먹을 수 있는 심장과 피를 지닌 이들을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믿음에 연결되어 있음이(76) 분명하다. 이러한 믿음은 신화만큼이나 소진/소모가 지닌 극단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해마다 태양을 기리기 위해 신화 속 두 신들이 지켰던 단식의 고행을 따라 나흘 동안 단식을 지켰고, 피부병이 있었던 부스럼 신을 기리기 위해 나병환자들을 제물로 바쳤다. 그들에게 사유란 행위의 표출/전시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77).

 

3. 멕시코의 인신공회

사제들은 희생제물을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죽였다. 희생자들을 돌로 된 제단 위에 눕혀놓고 흑요석 칼로 가슴을 찔러 뛰고 있는 심장을 파내 태양을 향해 들어올렸다. 희생제물은 전쟁포로였기 때문에 이는 태양의 생명을 위해 전쟁이 필수적이라는 관념을 정당화시키기도 했다. 전쟁은 정복이 아닌 소진/소모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고 전쟁이 중단된다면 태양 또한 더 이상 빛나지 않을(77) 것이라 생각했다.

 

4. 희생제의의 집행자와 제물 사이의 내재성

아즈텍인들은 희생제의를 통해 결국 죽이게 될 포로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면서 인간적을 대했다. 전쟁포로를 잡아온 전사는 포로를 아들로 여겼고 포도 또한 전사를 자신의 아버지로 여겼다. 그들은 함께 춤추고 노래했다(81). 제물로 결정된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운명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노래하고 춤추면서 마지막 밤을 억지로 지새워야 했다. 취하거나 기쁨의 여인을 제공하기도 했다(82).

 

5. 전쟁의 종교적 성격

희생제의를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은 전쟁과 그 전쟁이 감당하는 죽음의 위험이다. 멕시코인들은 오직 죽음의 위험을 불사해야 하는 조건에서만 피를 흘렸다(83).

포로를 잡아 온 전사 역시 사제만큼이나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희생제물의 상처에서 나온 피로 흘러넘치는 첫 번째 주발이 사제에 의해 태양에 봉헌되었다. 두 번째 주발에 부을 피는 전사가 모아 담았다. 희생된 자의 몸은 다시 그 전사에게 하사되었다. 그 시신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가 머리는 따로 보관하고 나머지 몸은 소금이나 매운 양념을 전혀 치지 않고 구워서 연회를 열어 먹게 했(85). 하지만 먹는 이는 그 전사가 아니라 초대받은 사람들이었는데 희생제물을 자신의 한 아들로, 곧 또다른 자기자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축제를 끝마칠 때 전사는 희생제물의 머리를 손에 들고 춤을 췄다. 전사가 전투에 패해 죽었다 해도 전장에서의 그의 죽음은 포로의 제의적 희생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86).

 

6. 종교의 우선권에서 군사적 효율성의 우선권으로

멕시코 사회는 군사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야말로 그 사회 작용을 이해하는 명백한 열쇠가 된다. 그들은 전쟁과 정복의 합리적 조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87). 아즈텍인에게 전쟁이 지닌 극도의 중요성은 변화를 맞게 되었는데, 소진/소모의 잔혹한 폭력에 대립하는 기획의 이성이 지닌 의미로 전환되었다. ‘왕이 자신의 궁전에 머무는동안 신하들은 그해의 희생제물들 중 가장 위엄 있는 제물의 주위를 둘러쌌다. 그것은 일종의 대체 희생이었다. 소진/소모의 도덕적 원리인 내적 폭력은 그렇게 타자에게 투사되면서 경감되었다. 아즈텍 사회를 활성화했던 폭력의 운동은 그 바깥만큼이나 사회의 내부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88) 내적이고 외적인 폭력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하나의 경제(일반경제)로 통합되었다. 포로들의 제의적 희생은 전사들의 희생 또한 명령했던 것이며 최소한 그를 희생시키는 전사의 호사스러운 소비를 표현했던 것이다. 왕의 희생을 포로의 희생으로 대체하는 것은 희생제의의 도취를 명백히 완화/전환시키는 것이다(89).

 

7. 희생제의 또는 소진/소모

희생제의는 노예적 사용이 속되게 만들어 타락시킨 것을 다시 성스러운 세계로 돌려놓는다. 노예적 사용은 주체와 내재적인 참여 관계에 있는 어떤 것을 그저 하나의 사물로 만들었다. 희생제의는 사물들이 된 한에서 파괴하는 것이다. 파괴는 인간과 사물 사(90)이의 유용한 관계를 부정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희생제의가 효력을 갖는 것은 어떤 노예적 사용이 끝장내버린 참여의 과정, 곧 희생시키는 자가 희생제물과 함께 하게 되는 내재적 참여의 과정에 있다(91). 노예가 주인에게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면 노예는 실질적으로 자신의 내재적 가치의 일부분을 스스로 잃게 되고 주인은 노예에게서 현저하게 분리된다. 그저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사물이 될 수밖에 없는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92).

인간이 사물로 전락하게 되는 사회적 삶의 측면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 스스로 잘 알고 있으며 세계에 노동이 도입되면서 그 즉시 노동은 인간의 내재성을 대체했다(93). 최초의 노동이 사물들의 세계를 기초했고, 거기에 고대인들의 속의 세계가 화답했다. 사물들의 세계가 이렇게 자리 잡자마자 인간 역시 스스로 이 세계의 사물들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시대의 인간이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타락이었다. 기묘한 신화들 속에서, 잔혹한 제의들 속에서, 인간은 애초부터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종교는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으려는 오랜 노력이자 불안에 찬 탐색이다. 문제가 되는 것을 사물들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나와 신성한 질서를 되찾는 것이다. 심오한 자유의 의미는 파괴 속에서 주어지는 것인데(94) 파괴의 본질이란 유요한 작업의 속박에 묶일 수 있는 것을 아무런 이득 없이 그저 소비하는 것이다. 희생제의는 자신이 바치는 것을 파괴한다. 희생제의는 모든 것을 불처럼 파괴할 필요는 없고 거기에서는 봉헌물을 유익한 활동의 세계에 속박시키고 있었던 연결고리만이 끊어지는 것이지만 결국 분리는 결정적인 소진/소모의 의미를 띠게 된다. 희생제의에 바쳐지는 봉헌물은 실제적 질서로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분출로의 길을 열어젖히며 폭력을 해방시키는데, 그 원리 안에는 폭력이 전적으로 통치하는 영역이 마련되어 있다(95).

실제적질서에 전혀 종속되지 않고 오직 현재에만 관계하는 자유로운 주체에 대한 어떤 완화된 관념을 낳는 것은 광기 그 자체라는 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주체람, 다가올 시간을 염려하는 그 즉시 자신만의 영역을 잃어버리고 실제적 질서의 대상들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주체는 노동에 속박되지 않는 한에서 소진/소모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자마자 무용한 소진/소모는 나를 즐겁게 한다. 이렇게 절제없이 소진/소모한다면 나와 유사한 이들에(96)게 내가 내재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소진/소모는 분리된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는 길이 된다(97).

 

8. 저주받고 동시에 성스러운 희생제물

희생제물은 유용한 부의 총량에서 취해진 어떤 잉여이다. 희생제물은 아무런 이득없이 소진/소모되기 위해서만 오직 그렇게 완전히 파괴되기 위해서만, 출현할 수 있다. 희생제물로 선택된 순간, 그것은 폭력적인 소진/소모가 예정된 저주받은 몫이 된다. 그 저주는 희생제물을 사물들의 질서로부터 떼어 놓는다. 저주는 제물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 살아 있는 존재들의 내재서, 불안, 깊이에 빛을 비추는 것이다. 희생제물이 사물이라면, 오직 파괴가 제물로부터 사물의 성격을 제거해서 그 유용성을 완전히 없앨 때에만, 그 제물을 그것에 연결된 실제적 질서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희생제물이 봉헌되어 죽음과 분리하는 시간 동안 그 희생제물은 희생시키는 자의 내재성으로 들어가 그의 소진/소모에 참여하게 된다(99). 축제의 엄청난 혼돈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희생제물이 소멸되는 것은 정확히 그 순간이다(100).

경계들을 넘어서는 어떤 과잉만이 유일하게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과잉의 소진/소모야말로 신들에게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인간들이 사물들의 질서 속에만 빠지는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101) 있었던 것, 미래에 대한 욕심과 실제적 질서의 냉정한 계산 때문에 그들을 짓누르던 무게를 걷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소진/소모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서였다(102).

 

 

. 경쟁적 증여: 포틀래치

 

1. 멕시코 사회 안에서 과시적 증여가 갖는 일반적 중요성

과시적 낭비에 전력을 다하는 일은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던 주권자가 지닌 역할들 중 하나였다. 주권자에 의해서든 아니든 주권자가 육화한 백성에 의해서든 허용된 희생제의의 죽임은 무제한적인 소진/(103)모의 가치를 살해라는 거센 파도에 부여할 수 있었다. 주권자의 권력은 그를 보존했다. 이러한 주권자는 너무도 명백히 헤픈 낭비의 인간이었기에 자신의 목숨 대신에 자신의 부를 증여했던 것이다. 주권자는 그렇게 증여했고 그렇게 작용했음에 틀림없다(104).

 

2. 부자들, 그리고 제의의 헤픈 낭비

아즈텍 상인은 물건을 판매하지 않고 증여에 의한 교환을 행했다. 그는 주권자의 증여에 의해 부를 얻었던 것이다. 그렇게 받은 부를 다시 그가 도착한 다른 나라의 군주들에게 선물했다. ‘상인들은 자신들이 여행을 통해 가져온 물건들을 단순한 상품들로 생각하지 않았다(106). 그 물건들을 대낮에 집으로 들이지 않았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길일 날 집안에 들여놓으면 그 물건들은 성스러운 사물이 되고 그러한 성스러움이 지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증여의 실천안에서 교환의 대상은 사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속의 세계가 지닌 일상적 관성이나 생명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았다. 증여는 영광의 징표였고 증여의 물건 자체가 영광의 빛을 띠고 있었다. 탐험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첫 번째 일은 동업자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선물을 한가득 안기는 것이었다(107).

판케찰리츨리라는 연회는 성스럽고도 파괴적인 의식이었다(108). 노예들을 희생제물로 한 장엄한 희생제의를 행했는데 그 제의 뒤에는 상인의 집에서 제물들의 살을 함께 나눠 먹는 공동의 소진/소모가 이어졌다(109).

 

3. 북서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

북서아메리카 지역 인디언들이 행하고 있는 포틀래치가 그러한 교환 체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110). 포틀래치는 상업처럼 부가 순환하는 하나의 방식이지만 가격 흥정을 배제한다. 아주 자주 막대한 부를 장엄하게 증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는데 한 족장이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거나 도전을 하여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벌어졌다. 증여의 수혜자는 도전을 받아들이며 그에게 지워진 채무를 갚아 충족시켜야 하는데 더욱 후한 새로운 포틀래치만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이자를 쳐서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111).

 

4. ‘포틀래치의 이론

1) ’권력획득으로 환원되는 증여의 역설

포틀래치 제도에 대한 연구는 일반경제에서 어떤 특권적인 가치를 갖는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과잉의 소비라는 문제이다. 과잉을 증여하거나 소멸시키거나 파괴해야 한다. 하지만 획득의 의미를(114) 갖지 못한다면 증여 역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증여하는 일은 곧 권력을 획득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증여는 증여를 행하는 주체의 초월을 가능하게 하지만 주체가 초월을 전유하게 되는 것은 주어진 대상의 교환 안에서이다. 부에 대한 경멸로 인해 오히려 부유해지는 것이며 그에게 필요한 것은 관대함이다

어떤 이가 다른 이 앞에서 대상을 파괴하거나 증여하게 될 때, 그는 다른 이의 눈에 그렇게 증여할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가 진실로 부유하게 되는 것을 바로 그 이후인데, 그가 부의 본질 안에서 요구되는 부의 사용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소진/소모될 때에만 부가 되는 것을 과시적으로 소진/소모했기에 비로소 부유해지는 것이다(115).

2) 증여의 표면적 무의미

증여는 일반경제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증여하는 자에게만 낭비가 있는 것이다. (116). 증여받은 자는 다시 그 증여를 되돌려주면서 바로 그 권력을 파괴하고자 한다. 경쟁관계는 더 큰 증여하는 반대급부를 부추긴다. 따라서 증여는 일견 상실로 보이는 것이 상실을 행한 자에게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포틀래치가 지닌 비합리적 모순은 기만적인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되돌려 받을 수 없는 포틀래치일 것이다. 이러한 포틀래치의 수혜는 이윤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반대로 받는 행위는 주는 행위를 더욱더 자극하는데 받는 일에서 기인하는 채무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서열의 획득

포틀래치가 증여하는 자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대가로 다시 받은 증여의 필수불가결한 추가분이 아니라 최종 결정권을 가진 자에게 부여될 수 있는 서열인 것이다. 서열은 개인의 증여 능력의 여하에 따라 다양하게 정해진다(118). 우월성의 결과인 영광은 전투의 열정이 전제하는 비상식적인 격정과 무절제한 에너지의 소비라는 운동을 표현한다. 전투가 어느 순간에는 계산을 언제나 벗어나 있게 된다는 점에서 전투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생명 자원의 막대한 소비를 통한 서열의 획득에 연결되지 않고서는 전쟁과 영광의 의미를 포착하기 어렵다. 포틀래치가 그 가장 뚜렷한 형태이다(119).

4) 근본적인 제일 법칙들

포틀래치는 우리의 근본적인 양가성으로 가르쳐준다(119). 1) 사회가 가용하는 추가분에 대한 탕진은 그 자체로 전유의 대상이 된다. 2) 탕진 안에서 전유되는 것은 탕진하는 자에게 주는 특권인데, 그러한 특권은 일종의 재화로서 획득되며 서열을 결정한다. 3) 개인이 갖는 서열은 도구나 장소처럼 전유될 수 있다. 그러한 서열이 궁극적으로 이득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 원리 또한 획득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탕진에 의해 결정된다(120).

5) 양가성과 모순

모순적이게도 인간은 자원의 낭비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자원의 낭비를 활용하는데 그 자신뿐 아니라 그 전 존재 자체를 모순에 빠트린다. 인간 존재는 재화의 노예적 사용에 대한 부정 속에 삶의 가치와 특권과 진실을 부여하는 동시에 바로 그 부정을 통해 노예적 사용을 행한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유용한 사물이 인간 자신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게 되는 바로 그때부터 인간 존재는 포착 불(121)가능한 것, 자신과 재화들의 무용한 사용, 곧 놀이를 부르게 되는데 포착 불가능한 것을 포착하고자 하며 유용성에 맞지 않았던 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열은 이러한 뒤틀린 의지의 효과이다. 서열은 사물과 대립적인데 서열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며 일반적 배열의 질서를 위계라고 부른다(122).

상실이 획득으로 변화되는 서열은 지성의 활동에 부응하며 사유의 대상들을 사물들로 환원한다. 사실상 포틀래치가 드러내는 모순은 사유의 작용 안에서 더욱 극심하게 드러난다. 희생제의, 포틀래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그림자이며 우리는 이를 헛되이 시, 깊이, 열정의 내재성 등의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우리는 이런 그림자를 포착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만에 빠지는 것이다(123).

6) 사치/과잉과 빈곤

성장과 획득이 자신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고립된 존재가 욕구하는 대상인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해방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진정 거짓말의 탈을 쓰고 해방된다. 결정적으로 인간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해방을 이익에 관계짓고자 노력한다. 그때부터 인간은 모든 방식으로 거짓말을 한다(124).

포틀래치는 사치/과잉의 특수한 표현이자 의미심장한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126). 사치/과잉은 서열을 만들어내는 포틀래치의 기능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사치는 여전히 사치를 과시하는 사람의 서열을 결정한다. 하지만 사치를 누리는 이들의 인색한 계산은 결국 모든 방향으로 경계를 벗어난다. 어떤 결함을 통해서 생명 전체가 넘침/과잉의 진리로 귀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리는 진리가 아닌 어떤 것을 진리로 취한 이들을 파괴한다. 부의 형태는 언젠가 붕괴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부를 확보하고 있다고 믿고 있던 인간을 혼란에 빠트릴 것이다. 현재의 사회는 일종의 거대한 기만인데, 부의 진리는 교활하게도 비참한 빈곤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치는 부의 완전한 멸시를 요구하며, 또한 노동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무한히 파괴되는 화려함으로, 부자들의 고된 거짓말에 대한 조용한 경멸로 살아가는 이의 어두운 무관심을 요구한다. 군사적 착취와 종교적 신비화와 자본주의적 횡(127)령을 넘어서 누더기의 화려함과 무관심의 어두운 도전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그 후로 폭발과 헤픈 낭비와 흘러넘치는 과잉을 알려주는 부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128).

 

저주받은 몫 2부(조르주 바타유 24.3.2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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