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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4 3 전주인간무늬연마소사회심리학 연구모임

주제: 조르주 바타유, 최정우역,  저주받은 , 문학동네 2022

3 Apr 2024 콩빠 조루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인무연.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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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적 여건들 -  산업사회

1) 자본주의의 기원들과 종교개혁 2) 부르주아 세계 (185 – 233)  요약 인용 발표: 콩빠

 

I. 텍스트

인용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면죄를 구입함으로써 자신의 자원을 이용해 천국의 시간을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조르주 바타유, 197)

로마는 신성을 비참한 수준으로 강등시켰던 것이다. “루터파가 보기에 유일한 방책은, 신앙 내적인 심오한 삶과 관계없는 모든 것을 신과 결정적으로 분리시기는 , 다시 말해 우리가 행하고 현실적으로 실현시킬 있는 모든 것을 신과 결정적으로 분리 시키는 것에 있었다.” (조르주 바타유, 197)

루터는세계를 더욱 완전히 부정하는 방법 외에는 알지 못했다. 교회는 거대한 탕진을 통해 인간에게 하늘 나라의 문을 여는 수단을 행사함으로써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는데, 교회는 땅을 천상의 것으로 만들지도 못했고 천상을 세속의 것으로 만들지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상대적 안정 속에서 경제를 유지했다. (조르주 바타유, 198)

칼뱅은 이익을 얻는 대부업에 원칙적으로 가해졌던 단죄를 철폐하고 일반적으로 상업의 도덕성을 인정했다. --- ‘ 사업이 토지 소유보다 많은 이득을 얻을 없다는 것일까? 자신의 근면과 수완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상인은 어디에서 이득을 얻을 있다는 말인가?’ (조르주 바타유, 199)

근본적인 면에서 칼뱅의 교리는 루터의 교리와 의미/방향이 같다.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인데, 이는 단지 기도를 통해서만 추구될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투쟁과 노동에 의한 세계의 신성화(神聖化) 통해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조르주 바타유, 200)

종교개혁이후의 기독교인이란 검소하고 절약하며 노동하는 자여야 했다. 그렇기에 구걸행위는 심지어 배척되기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 (조르주 바타유, 201)  

 

종교개혁이라는 혁명은 확실히 심오한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의미란 새로운 경제 형태로의 이행이다. … 우리는 심지어 그러한 종교개혁이 자신의 극단적인 결과들을 종교적 순수성 요구에 부여함으로써 성스러운 세계, 비생산적 소진/소모의 세계를 파괴하게 되었고, 그래서 결국 땅을 생산의 인간들에게, 부르주아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고 말할 있을 것이다.” (조르주 바타유, 208)

 

인간이 종국에 스스로를 되찾아야 한다고 해도, 인간은 오히려 자신에게서 멀어지기만 했던 길을 따라 스스로를 헛되이 추구할 뿐이다. …”  인간은 이러한 단순한필요조건 오히려충분조건이라고 믿고 있다.( 조르주 바타유, 212)    

칼뱅주의에서 신에 대한 긍정과 동일시됐던 자기 부정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도달할 없는 이상이었다. (조르주 바타유, 223)   

 

자본주의가 무시하는 봉건제와 종교의 잔존은 사실 노동자를 하나의 사물 만들고자하는 확고부동한 무의식적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다. 비교하자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노동자의 노동을 부정하는 활동 바치지 않고서는 스스로 해방될 없다고 할때, 노동자는 그렇게 하나의 사물 밖에 없는 것이다.(조르주 바타유, 230) 

 

그의 비판은 공산주의 자들에게도 향한다. 그들은어제나 사물에 우의를 부여하며. 그렇게 사물에 종속된 성격을 갖지 않으려 하는 것에 반대한다”(조르주 바타유, 231).

부르주아 또한현실적으로 그들 세계의 자유란 것이 결국 혼란의 자유라는 사실을 망각할 밖에  없다 (조르주 바타유, 233).

 

바타유는 근본적으로 사물에 대한 부정을 원리로 삼는 사치 낭비(luxe) 오히려 자본주의적 정신 안에서 거꾸로 마치 사물들처럼 포착되는 역설적인 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정신의 총아라 만한 학문의 엄격한 정신 자체가 이러한 오류의 기원에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소진/소모가 지닌 근본적인 힘을 파괴하여 인간의 삶을 단지 사물의 지배로만 환원시켰다는 것이다.”(역자 최정우 설명: 조르주 바타유, 228).

   

II. 2 문헌 산책

1. 이영석

바타유의저주의 나타난 증여와 존재의식

프랑스문화예술연구 학술저널 28, 2009.05 317 - 340 (24page)

우리는 기부를 할까? 답은 간단하다. 연결하기 위해, 삶에 연결하기 위해, 살아있는 시스템에서 순환을 유지하기 위해, 고독을 깨고, 다시 사슬의 일부가 되기 위해, 전승하기 위해,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특히 인류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 사는 낯선 이에게 선물할 때마다 우리는 무언가, 특히 인류의 일부라는 것을 느낄 있습니다. 기부는 나에게 속한 무언가를 그것을 받아줄 수밖에 없다고 믿는 누군가에게 자발적으로 양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부는 무한히 요구하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관대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온전히 인간적인 존재의 원리로 나타난다.

바타유는 선물에서 부를 기능으로 되돌리고, 베풀고, 대가 없이 낭비하는 근본적인 움직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을 선포한다. 텍스트는 선물의 개념을 탐구하기 위해 생명체가 처분할 있는 에너지의 과잉이라는 가설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적 존재는 비생산적 가치의 창출과 분리될 없으며, 이는 다시 이러한 가치의 소모적 파괴를 통한 낭비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경제적 교환과 선물의 가장 차이점은 전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후자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 재화의 일부가 아닌 것을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이다. 또한 선물의 구조를 구성하는 것은 무상/보은의 쌍으로, 경제적 교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윤리적 개념으로 특징지어진다. 경제적 교환에서는 이자와 효용 계산을 말하지만 선물에서는 오히려 무상함과 희생을 말하고, 경제적 교환에서는 부채를 말하지만 선물에서는 무상 감사를 말한다. (이영석. 340 논문 초록)

 

2. 위키백과 https://fr.wikipedia.org/wiki/La_Part_maudite (바타유 - 저주받은 )

바타유에게는 지구상의 모든 에너지의 움직임, 특히 생명체의 움직임을 고려한 일반 경제의 원칙을 세우고, 생명체와 인간에게 저주받은 부분인 과잉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이론적 서론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경제학의 의미'라는 제목의 번째 부분에서 바타유는 경제학은 연구 대상인 시스템을 분리하여 연구한다고 설명한다. 생명체는 일반적으로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태양 에너지는 생명체의 왕성한 발달의 원리이다. 잉여는 성장에 사용될 있지만, 개인이나 집단의 성장이 이상 불가능해지면 이익 없이 소비해야 한다. 따라서 일반 경제의 본질적인 질문은 사치의 문제이다.

번째 부분의 제목은 "일반 경제의 법칙"이다. 송아지를 예로 들어 모든 유기체는 생명체가 기능하는 필요한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성장과 번식을 한다고 설명한다. 성장에 한계가 있을 때만 초과 에너지를 낭비할 있다. 지구의 성장을 제한하는 것은 지구 공간의 크기이다. 생명의 압력은 한계에서 발생하며 여러 가지 효과로 나타난다: 첫째, 확장(과밀한 투우 경기장이 예시), 둘째, 낭비 또는 사치(일부 종은 다른 종을 잡아먹음), 죽음, 성적 번식의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낭비 또는 사치. 과학 기술은 우리의 에너지 비축량을 늘릴 있게 해주지만, 생활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전쟁과 같은 낭비를 초래하기도 한다(따라서 사치도 커진다). 그러나 가지 측면은 이중의 저주로 간주되어 전쟁을 거부하고 생활 수준의 증가가 사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낭비는 일반 경제의 기본 법칙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저주받은 부분을 의식적으로 파괴해야 필요성이 있다.

바타유는 자본주의의 부상을 종교개혁, 특히 칼빈주의와 연결시킨 막스 베버의 연구를 말한다. 중세에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목적이 정해져 있었는데, 신이 기뻐하는 (성직자 유치, 자선, 대성당 건축, 종교 축제 ) 잉여 에너지의 소비 방식을 결정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일을 통해 얻은 공로라는 개념을 거부하였다. 칼뱅에게 목적은 행동과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행위는 이상 정죄 받지 않았다. ‘개혁주의 기독교인은 겸손하고, 절약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하였다. 경제는 점차 종교적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초점은 비생산적인 소비에서 생산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항상 이상하게도 잃어버렸던 친밀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세상의 가능성의 끝까지 가는 문제이다.)

 

3. Hildegund Keul (힐데그룬트 코일)

Schöpfung durch Verlust. Band I: Vulnerabilität, Vulneranz und Selbstverschwendung nach Georges Bataille

(상실을 통한 창조. 1: 조르주 바타유가 말하는 취약성과 자기 낭비)

https://opus.bibliothek.uni-wuerzburg.de/frontdoor/index/index/docId/23500

 

인간의 취약성은 개인과 정치, 사회와 경제, 문화와 종교 생활에서 전례 없는 힘을 발휘한다. 이는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드러났다. 인류 공동체가 이러한 취약성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면서도 불안정하다. 취약성은 행동을 요구하고 파괴적이고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DFG (독일 연구재단) "상실을 통한 창조" 연구는 최근 수십 동안 '취약성' 학제 연구의 핵심 개념으로 만든 과학적 담론에 기여하고 있다. 연구는 취약성 담론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공하고 철학자이자 종교 이론가인 조르주 바타유 (1897~1962) 이론적 관점을 처음으로 소개한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신성한 것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상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 소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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