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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허물기 3장 발제(16.12.25).hwp

3장.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 : 성전환과 트랜스섹슈얼의 알레고리

 

주체의 의미와 경계가 이미 정해진 이런 세계에서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질문하기 시작할 때 나는 어떤 규범의 제한을 받을까? 그리고 내가 만일 주어진 진리 체계 안에 있을 여지가 없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바로 이것이 푸코가 “진리의 정치학이 (...) 작동하는 가운데 주체의 불복종”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97)

머니의 연구소는 정상화라는 명목하에 트랜스섹슈얼들을 동원해 브렌다를 여성적으로 자라게 한 반면, 내분비학자들은 자연이라는 명목하에 데이비드에게 유전적 운명을 되찾아주는 트랜스섹슈얼리티의 성전환 절차를 처방한다. (109) 말하자면 유연성은 강제적으로 부과된다. 또한 자연스러움은 인위적으로 유도된다. (110) 데이비드가 진정한 젠더에 대해 느낀 점을 말할 때 데이비드의 응답 부분 중 거의 설명되지 않은 것은, 바로 브렌다/데이비드라는 사람과 그 사람의 몸에 적용된 지식 장치였다. 자기 보고 행위와 자기 관찰 행위는 특정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 상상 속의 수용자로서의 특정 관객과 더불어, 그 관객에 대한 언어적이고 시각적인 자아의 그림이 산출되는 특정 관객 앞에서 일어난다. 이런 행위들이 바로 수년간 브렌다의 젠더의 진리를 가혹할 만큼 낱낱이 조사해온 사람들에게 때로 전달되던 화행이다. (111) 그는 구분 자체의 절대주의를 경계하는데, 그의 남근이 그의 가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가치를 끌어오고 자신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인간됨을 선언해줄 규범과 그가 자신에 대해 말로 주장하는 것 사이의 이런 간극, 이런 통약 불가능성에서 온다. 그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그 사람을 구성하는 내용물을 다 알 수 없으며, 이 말의 의미는 그의 인간됨이 등장하는 것은 그가 완전히 인정될 수도, 제거될 수도, 범주화될 수도 없는 바로 그 방식들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질문을 거부하고 상대의 용어를 뒤집어서 그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습득함으로써 이런 ‘외부’를 이뤄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20)

데이비드는 진리의 정치학을 뒤흔들고, 규범의 지배를 넘어선 사랑의 가능성을 세우기 위해 존재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불복종을 이용해서 그들이 아는 것에 한계를 긋는다. 그는 일부러 규범과의 관계 속에 위치하지만, 그 규범의 요건에 순응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떤 특정한 ‘불복종’의 위험을 무릅쓴다. 그는 주체인가?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데이비드의 담론은 비평 기능 자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푸코의 정의에 따르면 진리의 정치학 안에서 주체의 불복종을 의미하는 비평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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