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젠더허물기 / 5장 친족은 언제나 이미 이성애적인가? /

주디스버틀러 / 2017.1.1.() /닥홍

 

170101 젠더허물기 주디스버틀러 5장 닥홍.hwp

게이 결혼과 관련된 논의에서 섹슈얼리티가 재생산 관계에 기여하도록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혼이야 말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핵가족 모델을 따르지 않고, 생물학적이고 비생물학적인 관계로 맺어진 수많은 친족 관계가 미국 내에 존재하고 존속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여러 사회학적 방법이 있다. 우리가 친족을 삶의 재생산과 죽음의 요구가 타협하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를 확립하는 일련의 실천이라고 본다면, 친족이라는 관행은 인간 의존성의 근본적 형식에 대해 말하고자 생겨났을 것이다.

친족에 관한 지속적 딜레마가 결혼에 관한 논쟁의 조건이 되는 동시에 한계도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국가의 규범화 권력은 특히나 분명해진다. 결혼 서약을 통한 가족 형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규범적이고 두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이성애와는 다른 친족의 변형태들은 아이에게 위험한 것으로 생각될 뿐 아니라, 인간의 인식 가능성을 유지시킨다고 여겨지는 상상 속의 자연법과 문화법에도 위험천만한 것으로 간주된다.

1세계 국가의 친족 딜레마들은 종종 자국의 국가 기획에 나타난 친족 변형성의 파열 효과에 대한 우려를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고 주장하려 한다. 나는 친족과 결혼에 관한 프랑스의 논쟁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하는데, 이는 합법적 연합을 주장하는 이 논쟁이 어떻게 친족의 부계적 전제나 그것이 지지하는 통일된 국가 기획을 교란하지 않은 채, 인정 가능한 친족 관계에 대한 국가의 규범화 및 권리를 확대하는 계약 조건과 호응하며 작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다음에서 나는 국가가 동성 부부에게 해줄 수 있는 인정을 모색하면서도, 규범적 친족에 대해 계속 행사하는 국가의 규제적 통제에는 반대한다는 당면한 딜레마의 최소한 두 가지 차원을 숙고해보려 한다.

 

게이 결혼: 국가의 욕망에 대한 욕망,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소멸

 

게이 결혼 문제는 분명 이성애 부부 문제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관계를 국가가 합법화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심도 있고 지속적인 투자에 달려 있는 문제다. 국가에 의해 합법화되는 것은 합법적 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합법성은 특정 종류를 배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의 투쟁은 단순히 비합법적인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게 아니다. 비합법적 부분이라는 것은 합법성 담론에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 궁극적 욕망으로 삼지 않은 성적인 장일 것이다.

게이 결혼이나 합법적 혈연 연합의 경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성행위와 성관계가 인가법 범위 외부에서 비합법적인 것, 더 나쁜 것,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되었는지 알고 있으며, 공적 담론에 새로운 위계들이 등장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런 위계는 합법적인 퀴어의 삶과 비합법적인 퀴어의 삶을 구분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비합법성의 형식 가운데서도 여러 암묵적인 구분을 만든다. 비합법적이긴 해도 대안적 결혼으로 인정받는 형태로 기능하는 성적 주체는 이제 합법성으로 해석되기에 합당치 못할 성적 가능성이 된다. 이런 가능성은 결혼 논쟁이 전제하는 우선조항 때문에 정치학 영역에서 점점 더 무시당하게 된다. 이런 비합법성은 앞으로 결코 없을 것이며 과거에도 없었던 것이다.(172) 이러한 재현 불가능성의 장소에서 어떻게 정치성을 사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재현 불가능성의 자리에 대해 사유하지 않고 정치학에 대해 생각할 수가 있는가?(173)

그런데 왜 현 상황에서는 정치적이 되는 것의 전망 자체가 그런 담론으로 제도화된 이분법 안에서 우리가 작동할 능력에, 또 성적인 장이란 이런 조건을 수용함으로써 강제로 규제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능력에, 애써 알지 않으려 할 능력에 달린 것일까? 권력 역학이 당대의 정치적 장의 토대가 되고, 그런 성적인 장을 정치적인 것에서 강제로 배제시킴으로써 토대가 된다. 그런데도 이런 배제 하는 힘의 작용은 마치 권력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마치 정치적 숙고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논쟁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비평적 관점이 없다면 정치학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작동 영역이 시작되는 힘의 관계의 미지성에, 또한 탈정치화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평성이란 이미 경계가 정해진 영역에 있을 만한 딱히 어떤 위치도, 어떤 장소나 자리도 아니다. 말하자면 토대 자체의 열 개와 파열을 겪어야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무심코 자신이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비-장소nonplace이다. 아직은 주체가 아닌 상태not-yet-subject지만 거의 인정받을 만한 상태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지형학적 변환 지점이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어떤 정치적 주장을 하려는 긴급성 때문에 성적인 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생각되는 선택안을 자연스러운 것인 양 만들 때 발생하는,(175) 여러 가능태들의 배제foreclosure of the possible를 다루려는 것이다. 게이 결혼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비평적 관점을 유지하는 것과 정치적으로 합당한 주장을 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주고 있다.(176)

섹슈얼리티의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동성애공포증 논쟁에 대응하라는 요구를 받는다.(178) 자연적이건 인공적이건 재생산 관계에 대한 공포에 주력한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 새로운 인구통계에 대한 공포, 국가의 단일성과 그 변환 가능성에 대한 공포, 또한 페미니즘이 육아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상 친족을 가족 외부로 열어 낯선 이들에게도 개방했다는 점에 대한 공포가 있다. PACS(성적 경향과는 상관없이 혈연관계가 아닌 두 개인의 결혼의 대안적 형태를 형성하는 시민연대협약)에 관한 프랑스 내의 논쟁에서 이 법안의 통과는 결국 비이성애 커플에게 아동 입양 권리나 재생산 기술을 이용할 권리를 금지하는 문제에 달려있었다. 프랑스 문화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서 문화는 인종적 순수성과 지배에 관한 암묵적 규범을 전달한다. 문화란 무엇이고 누가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주체들이 어떻게 재생산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도 집중한다. 이 논쟁은 또한 국가의 위상에 관심이 있으며, 특히 성적 결합의 형식을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국가 권력에 관심이 있다. 누가 국가를 욕망하는지, 누가 그 국가의 욕망을 욕망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불쌍한 아이와 국가의 운명

 

결혼의 대안으로 시민 연대를 제정하려는 프랑스의 법안(시민연대협약PACS)은 결혼은 피하면서 동시에 법적 연대는 공고히 하고자 했으나 재상산과 입양의 문제가 표면화되자 한계에 부딪쳤다.(181)

프랑스의 상황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친권의 변형이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실비안 아가친스키는 동성애자가 가족을 형성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상징질서에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것들은 어떤 사회적 형식을 취한다 해도 결혼이 아니며 가족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국가와 결혼에 대한 이성애적 인정은 자연법이 아니라 상징질서라 불리는 어떤 것에 구속을 받는다. 아가친스키는 만일 그런 변화(친족의 허용)가 일어나게 된다면 미국 계보의 퀴어와 젠더 이론이 프랑스로서는 괴물과도 같은 미래가 될 것이라고 규정한다. 내가 아가친스키에 반대하면 나는 국가의 입법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치는 위치에 있게 될까?(184) 한편으로는 그녀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쉬울 것이며, 문제의 가족 형태는 가능한 사회적 형태이고 이런 사회적 형태의 관점에서 현재의 인식 가능성의 인식소가 의미 있는 도전을 받아 재표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쉬울 것이다. 다른 한편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처를 치유하고자 국가적 합법화를 추구하는 일은 그와 더불어 심적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문제들을 많이 야기한다. (국가의) 인정규범 없이 산다는 것은 심대한 고통을 초래하며 심리적 문화적 물질적 결과 사이의 구분을 혼란스럽게 하는 권리 박탈의 양식을 초래한다. 한편 인정받고자 하는 요구, 이 대단히 강력한 정치적 요구는 국가적 합법화가 제공하고 필요로 하는 그 인정 규범에 대한 비평적 도전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새로운 형식이자 부당한 형식으로, 성적인 장의 갑작스러운 배제로, 국가 권력을 지지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국가의 인정을 어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에 합법적인 성적 연대로 인정 가능한 것의 영역을 사실상 제한하고, 따라서 인정 규범의 근원으로 강화하면서 시민사회와 문화생활 속에 있는 다른 가능성들은 힘을 잃게 만든다.

국가의 규제는 존재하는 것에 항상 질서를 세우고자 하지는 않지만, 특정한 상상의 방식으로 특정한 사회생활을 그려내려 한다. 국가 계약과 기존 사회생활 간의 통약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은 국가가 계속 권위를 행사하고, 국민에게 부여되리라 예상되는 일관성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둘 사이의 차이가 감추어 져야 한다는 의미다. “엥겔스에 따르면, 국가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국가법의 신성성과 불가침성에 기대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대표해야 할 국민들과 유리되고 멀어졌기 때문이다.”

자연법, 문화법, 국가법

 

아나친스키는 게이의 자녀 양육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문화에도 위협이 된다고 쓴다. “아동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아동의 이원적 기원을 지워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남녀로 시작된다. 여기서 남자는 아버지의 자리, 여자는 어머니의 자리이다. 이렇게 혼합된 기원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기반이다.” 아가친스키에게 이성애적 성행위는 실제 자녀를 양육하는 한쪽 혹은 양쪽 부모와 무관하게 아이의 기원으로 이해되며, 그 기원은 상징적 중요성을 가진다.

사실 여러 인류학자들이 언제나 근친애 금기에만 기원이 있다고 할 수 없는 규칙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친족 관계들도 강조했다.(196) 그런데 여성 교환에 따라 생각하게 된, 성차에 대한 구조주의적 설명이 어째서 현재 프랑스의 논쟁이라는 맥락으로 복귀하려는 것일까?

씨족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1949년의 레비-스트로스에게 원시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었지만 1999-2000년에는 유럽이 각국 간의 개방과 새로운 이민자 문제로 시달리게 되면서 국가의 문화적 통일성을 얻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근친애 금기는 인종주의 기획과 나란히 작용하게 되는데 이는 문화를 재생산하기 위한 것이고,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문화를 보편성과 암묵적으로 다시 동일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공격을 받은 국가에 대한 환상을 굳건하게 만들어서 마치 ~인 것처럼 작동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이다. 씨족은 인종적 관점에서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전염 가능성을 규제함으로써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문화에 들어 있는 인조적 전제 조건의 관점에서 읽히는가? 족외혼에는 제한이 있다. 인종 간 결혼 금지는 근친애 금기가 명하는 족외혼에 제한을 가한다. 지배적 유럽 백인성에 대한 열망과 동일시로 가득 차서 보편성 안에서 보편성 자체로 자신을 재생산한다.

인류학 내부의 노력으로 인해 친족은 더 이상 문화의 기반으로 자리 잡지 않고, 다른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현상들과 복합적으로 상호 관련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간주된다. 인류학자 프랭클린과 매키넌은 친족이 국가적이고 초국가적인 정체성의 정치적 형성, 노동과 자본의 경제적 동향, 종교의 우주론, 인종 젠더 종의 분류의 위계, 그리고 과학 의학 기술의 인식론과 결합했다고 쓴다. 이제는 친족이 디아스포라 문화, 글로벌 정치경제의 역동성, 혹은 생명공학 및 생명의학의 맥락에서 발생하는 변화들을 포함한다.” 프랑스에서 성적인 관계나 젠더 관계의 미국화에 관해 아가친스키가 시사하는 공포는 특히 프랑스 방식으로 조직된 친족 관계를 유지하려는 욕망이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상징질서의 보편성에 대한 호소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만의 국가주의 기획을 보편주의 기획과 동일시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이 활용하는 수사법이다.

프랭클린과 매키넌은 친족에 대해 더 이상 자연스러운 관계라는 단일하고 고정된 개념에 근거해서 개념화되지 않고, 이런저런 자잘한 관계의 복합물에서 자의식적으로 조합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쓴다. 그렇다면 친족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행위이며, 그것이 발상하면서 의미를 조합하는 행위라는 논지에서 그들이 설명하는 조합 과정을 이해하는 게 중요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서사, 규범적 담론, 그리고 비평

 

결혼을 할지 말지, 임신을 할지 말지, 또 아이를 양육할지 말지에 관한 이런 논쟁 전체에 성적인 장이 배제되어 있다는 것은, 그 대답이 네이든 아니요이든 모든 대답이 갑작스레 현실을 제한하는 작용을 한다는 점을 밝힌다. 이런 것들이 결정적인 문제이고 우리가 어느 편인지 알고 있다고 결정해버리면, 우리는 근원적인 상실의 구조, 즉 애도할 대상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상실의 구조를 가진 인식론의 장을 이미 받아들인 것이 된다. 이런 규범의 관점으로는 사유할 수 없게 된 섹슈얼리티, 친족, 그리고 공동체의 삶은 급진적 성정치학의 상실되었던 지평을 형성해낸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애도할 수 없는 것의 궤적을 따라 정치적으로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된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