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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개의 패러다임(p.31~64)

1.1.

우선 하나의 패러다임의 계보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이 연구를 시작해보자. 이 패러다임은 서양 사회의 전개와 그 전체적 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p. 31).

 

두 개의 패러다임(p. 31~32.)

두 개의 정치 패러다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파생.
패러다임 1 패러다임 2
정치신학으로 유일신에 근거해 주권 권력의 초월성을 설정 오이코노미아[경제] 신학으로서 신의 삶과 인간의 삶 모두에 대한 내재적 배치로 착안된 오이코노미아라는 관념으로 앞의 초월성을 대체
정치철학과 현대의 주권 이론 파생 오이코노미아[경제]’의 승리를 비롯해 사회생활의 다른 모든 측면까지 통제하기에 이른 현대의 생명정치 파생

경제[오이코노미아] 신학의 역사는 여태껏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조차 잊힐 정도로 그늘 속에 가려져 있었음.
(이에 대한) 물음들이 억압되어온 이유를 자세히 살피고 그러한 억압을 산출한 사건들로 되돌아가려는 고고학적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할 수 있음.

 

결론)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최근작인 오이코노미아(2012년 출판)가 나오기 전까지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인 이 주제(두 번째 패러다임)에 관한 개괄적 연구가 전혀 없었다(p.33).

 

원인 1) 이 특이한 침묵은 적어도 신학자들의 경우에는 아마 그저 삼위일체설의 일종의 수치스러운 기원으로만 보일 수도 있을 무언가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사실 어느 모로 보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적인 신학적 진술의 최초의 정식화 곧 삼위일체 가 처음부터 오이코노미아적장치로 나타나는 것은 좀 뜬금없다).

 

원인 2) 이 개념이 서로 다른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확산되는 과정과 동시에 쇠퇴하게 된 것은 트리엔트 교회법령집에서 이 개념이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점에서도 증명된다.

 

1.2.

칼 슈미트: “현대 국가 이론의 주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다(p. 34).”

 

이중의 패러다임이 존재 이 진술은 공법(패러다임 1) + 패러다임 2(경제의 근본 개념과 인간 사회의 재생산적 삶이라고 하는 관념)으로 포괄/확장 되어야 함(p. 35).

 

아감벤의 주장: “오이코노미아[경제]b) 세속화된 a) 신학적 패러다임일 수 있다.” 신학 자체에 소급 적용

 

a) 신학에 관한 논의

 

신학 = 태생적으로 신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오이코노미아로 생각하고 있음.

       = 그 자체가 오이코노미아적

       ≠ 나중에 세속화를 통해 오이코노미아적이게 된 것

 

귀결 1) 하나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이 생명체에게는 정치가 아니라 오로지 오이코노미아[경제] 능력만이 있다는 것으로 드러남.

 

귀결 2) 역사 정치 / 역사 = ‘경영’, ‘통치

 

근거) 복음적 위계: 영생(zoē ainios) > 비오스(bios)

영생: ‘모든 생명체에 공통으로 속하는,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로서의 생명

비오스: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삶의 형식 내지는 방식으로서의 생명

 

귀결 3) 영생 =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의 권리로 내세움 = 오이코노미아(패러다임 2) 폴리스(패러다임 1)

 

 

b) 세속화에 대한 논의

 

세속화(p. 36):

현대 문화에서 전략적 기능을 수행해왔음.

관념들의 정치


베버의 전략 슈미트의 전략
세속화 점차 커져가는 근대 세계의 탈주술화와 탈신학화 과정의 한 양상 근대에 와서 신학의 존재가 사라지기는커녕 계속해서, 그것도 두드러진 역할을 보여줌.

 

세속화 하나의 개념

         = 푸코나 멜란드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표기(標記, signature)’

         = 어떤 기호나 개념 속에서 이 기호나 개념을 표시하고 초과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호적인 것이 새로운                의미나 새로운 개념을 구성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어떤 규정적인 해석이나 장으로 회부하는 어떤 것(p. 37).

         = 표기들이 서로 다른 시대와 장들을 이어주는 한 그것들은 말하자면 순수한 역사적 원소로 작동함(p. 38).

 

표기학 = 푸코의 고고학, 니체의 계보학 관념사, 개념사(이 둘은 표기학과 평행함)

 

귀결 1) 세속화는 근대의 개념 체계 속에서, 바로 그러한 개념 체계를 신학으로 회부시키는 표기로 작동

 

귀결 2) 세속화란 인간에게 세상을 처음으로 세속성과 역사성을 띠는 것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교 신앙 고유의 수행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

 

결론) 세속화 = 이 안에서 세계가 신의 오이코노미아에 속함을 확인하는 표시가 됨(p. 39).

 

1.3. 1960년대 후반 독일에서의 세속화 문제를 둘러싼 논쟁

 

뢰비트의 세계사와 구원: “독일 관념론의 역사철학과 계몽주의의 진보 관념은 모두 한갓 역사신학과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세속화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뢰비트가 말하는 종말론이 신의 오이코노미아’(패러다임 2)와 연결(p. 40)

 

셸링의 계시 철학: “고대 신학자들은 순수 신학오이코노미아를 구별했다.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리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내적 오이코노미아의 과정이다.”

 

셸링의 언급에서 암시되는 신학(하느님의 존재)’오이코노미아(하느님의 활동)’ 사이의 구별은 에우세비우스에서 칼케돈파에 이르는 동방신학에서는 근본적인 의의를 지닌다.

 

셸링이 바라보는 신학적 오이코노미아교리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3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의 출현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신비
                 ⇓
계시 철학의 가능성


계시 신화처럼 필연적 과정
      = 온전히 자유로운 방식
      = 가장 자유로운 어떤 의지의 결단과 행동
      = 새로운 창조, 2의 창조 가능

 

셸링은 절대적이고 아나르키아적(an-archic, 그리스어 anarkhia, 무정부상태의)인 자유를 존재론에 도입하는바, 스스로 이를 신학적 오이코노미아교리의 재개이자 완성으로 이해하고 있다(p. 42).

 

결론) 셸링은 자신의 계시 철학을 신의 오이코노미아이론으로 생각함(p. 41).

 

1.4. 1935~1970년 사이 페테르존과 슈미트의 특이한 논쟁

 

- 법학자인 슈미트와 신학자인 페테르존이 공통의 신학적 가정 공유

- 표면적으로 드러난 핵심 쟁점인 정치신학이 심오하고도 더 가공할 문제를 감추고 있음

 

둘 다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2장을 언급하면서 하느님 왕국의 도래와 세상의 종말 곧 에스카톤을 저지하고 억누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주장했다(p. 44).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2

지금은 어떤 것이 그자를 저지하고 있지만 그자는 자기 때가 되면 나타날 것입니다. 사실 그 무법의 신비는 이미 작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저지하는 어떤 이가 물러나야 합니다.”

 


슈미트 페테르존
현 인류의 역사 하느님의 왕국의 지연에 따른 과도기
종말을 지체시키는 요소 제국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유대인들의 거부
지연 그리스도교인 제국의 주권 권력과 일치 교회의 역사적 실존은 유대인들이 회심하지 않음

 

논쟁의 진짜 문제 = ‘구체적 종말론을 늦추고 제거하는 힘, 카테콘의 본성과 정체

                       ≠ 정치신학의 수용 가능 여부

 

과정 1) ‘오이코노미아라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리스도의 강림과 함께 완성에 이른 순간 에스카톤을 유예시키는 힘을 지닌 어떤 사건(유대인들의 회심하지 않음, 그리스도교인 제국) 발생.

 

과정 2) 구체적 종말론이 배제됨으로써 역사적 시간은 이제 허공에 붕 뜬 어떤 시간으로 바뀜.

 

과정 3) 이 유예된 시간 속에서 모든 변증법이 폐기되고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음.

 

귀결) 슈미트와 페테르존 두 사람 모두에게 결정적인 사안은 구원 지향적인 역사철학의 무효화(p. 45~46).

 

페트로존으로 대표되는 카톨릭의 반유대주의

 

유대인들의 회심하지 않음 시나고그(유대교)의 지속 교회의 존속 재림의 지연

 

귀결)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 교회와 이스라엘이 사라져야 함.

 

트뢸치 종말론 사무국의 폐쇄” =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의 연관을 철저히 의문에 부침 = 그것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사유들의 뿌리째 상실됨.

 

결론) 종말론 사무국의 문을 다시 여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문제(p. 46)

 

1.5.

페테르존의 인용(호메로스의 한 시구,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도 인용)

세상이 나쁜 통치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다수의 통치는 안 좋은 것이다. (통치자는) 한 명으로 족한 법이다.’”

 

페테르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 곧 부동의 원동자라는 신학적 패러다임이 어떤 식으로든 이후 유대-그리스도교 계통에서 나타나는 모나르키아(monarch, 군주정/단일 통치)적 권력에 대한 신학정치적 정당화의 원형임을 시사하고 있음(p. 48).

 

페테르존의 구별(p.48-49)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학 고대 그리스-로마의 정치학과
신의 모나르키아라는 유대적 관념의 연결
근거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작 세계에 대해
모든 운동의 초월론적 원리, 전술가가 군대를 이끌 듯 세상을 이끄는 자 독재자는 구중궁궐 안에서 숨어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세상을 움직임
페테르존의 서술 신의 모나르키아에서는 단일한 궁극적 원리라는 단일한 힘이 이 힘의 단일한 궁극적 보유자의 권력과 합치 ) “신은 우주에서 작용하는 …… 힘의 전제조건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그분 자신의 힘이 아니다.”

 

페테르존은 하느님의 모나르키아에 대한 가)의 이미지를 슈미트가 즐겨 썼던 표어를 인용해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공식으로 요약한다.

 

페테르존이 분석하는 이후의 정치 신학에서 신의 모나르키아라는 유대적 관념의 흔적들

필론: “하나의 민족이 하나뿐인 왕인 신의 통치를 받는다. 유일 민족, 유일신. 이것이 유대인의 표어다.”

에우세비우스: 폴리아르키아(참주정, 민주정) 아우구스투스의 태평성대콘스탄티누스

에우세비우스의 후계들: 세계 제국의 유일성과 실제로 이루어진 유일신 하느님의 계시 사이의 평행 관계가 역사 해석의 열쇠가 됨(p. 51).

 

반전) 페테르존은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라는 신학정치적 패러다임이 아리우스주의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당시 삼위일체 신학이 전개됨에 따라 이와 갈등을 빚게 됨을 보여주려고 한다.

 

결론) 정치적 문제로서의 일신론은 신학적으로 폐기되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로마 제국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이로써 모든 정치신학과도 단절된다(p. 52).

 

에우세비우스 네그리와 하트
유일한 세계 제국의 도래
폴리아르키아의 종언
한 분의 참된 하느님의 승리
유일한 자본주의 세계제국
국민국가 초극
코뮤니즘의 승리를 향한 길
전술적 의미
세계 초강대국과 교회 사이의 동맹의 결과인 교리
?

 

1.6.

페테르존이 제공하는 과감한 요약에 따르면 그레고리우스는 단일 위격의 모나르키아에 맞서 세 위격을 지닌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를 내세움으로써 삼위일체설에 궁극적 신학적 깊이를 부여했다는 것이다(p. 53).

 

슈미트는 같은 구절에 대해 상반된 결론을 이끌어 냄.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속에 모종의 내전이론(“참된 정치신학적 내분론”)을 도입했으며, 그런 식으로 여전히 신학정치젇 패러다임, 으레 동지냐 적이냐는 대당으로 회부되곤 하는 저 신학정치적 패러다임(패러다임 1)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p. 54).

 

삼위일체 신학의 정교화만으로도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라는 모든 신학정치적 발상을 배격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은 사실 따지고 보면 전혀 명백한 것이 아니다.

 

모나르키아는 하나의 위격에 국한되는 모나르키아가 아니라 왜냐하면 하나일지라도 그것이 자신과 내전 상태에 있데 되면 다수성 상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동등한 본성, 하나 된 마음, 동일한 몸짓으로 이루어진,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되고 통일되어 이루어지는 모나르키아입니다(그레고리우스, 연설 선집).”

 

그레고리우스의 관심사가 하느님의 실체의 단일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술어를 (보다 구체적인, 다시 말해 거의 육체적이라고 해도 좋을) 삼위일체의 술어와 조화시키는 데 있음은 분명하다(p. 56).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이미 확립되어 있던 술어적 전통에 따라 하느님 안에서 “(그분의) 본성에 관한 담론과 오이코노미아에 대한 담론을 구별할 줄 아는 자만이 이를 올바로 이해항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페테르존이 인용한 구절 또한 드러한 구별에 비추어서만 해석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결론) 모나르키아조차도 내전 곧 내부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한 그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치적 합리성을 오이코노미아적합리성으로 치환하는 것 뿐이다.

 

1.7.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라는 신학-정치적 패러다임의 계보 속에서 페테르존이 위에서 인용한 저자들을 대충 훑어보면 텍스트의 관점에서든 또는 개념의 관점에서든 오이코노미아에 관한 담론이 모나르키아에 관한 담론과 촘촘하게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P. 58).

 

페테르존이 인용한 테르툴리아의 프락세아스 논박

 

로마인들은 [외국어인] ‘모나르키아를 진심을 다해 발음하려고 하는 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자국어인] ‘오이코노미아를 이해하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 자신들이 유일한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오이코노미아도 함께 믿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오이코노미아에 대해서는 흠칫하고 꺼려합니다. 그들은 삼위의 다수성과 그것의 정립을 일체의 분열이라고 주장합니다.”

 

페테르존의 주장에 밑바탕이 되는 삼위일체설에 대한 이해는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에 대한 사전 이해를 전제한다(p. 60).

 

결론) 이 말이 구체적 맥락 속에서 어떤 표현인지를 모두 탐구해본 연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정치신학에 관한 한 동지이자 적인 두 사람 간의 논쟁에서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분간해낼 수 있을 것이다.

 

경계영역

슈미트 페테르존
정치를 그리스도교 신앙 위에 정초
정치신학:
- 정치를 세속적 의미로 근거 지음
정치를 고유한 의미로 근거 지음
카테콘으로 작동하는 그리스도교 제국의 세속적 힘으로 근거 지음
정치적 행동/전례적 행동으로서의 정치:
- ‘공적 실천이라는 어원적 의미로 되돌아온 전례
지상의 나라와의 어떤 동일시도 배제
종말론적 영광의 선구
카테콘으로 작동하는 것은 어떤 정치권력이 아니라 오로지 회심에 대한 유대인의 거부

 

하느님의 왕국의 종말론적 도래가 유대인들이 회심한 다음에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게 될 터라면 유대인 집단학살은 응당 교회의 운명과 무관한 것일 수는 없다(p. 63).

 

페테르존이 교회의 존립뿐만 아니라 완성까지도 유대인의 생존이나 소멸과 결부시키는 신학론적 입론의 끔찍한 양의성을 그 순간 깨닫게 되었을지 우리 스스로 자문해 보는 것은 정당하다.

 

결론) 이 양의성은 아마도 카테콘역사의 종말을 지연시킴으로써 세속 정치의 공간을 펼치는 힘 이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와 그것의 영광과의 본래적 관계로 되돌려질 때라야 비로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p. 6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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