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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강민혁)

2부 문학 창구 4~5 발제 열음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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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소세키를 넘어선 소세키 : 나쓰메 소세키(1)

 

 

신경쇠약을 만드는 세계

 

p165 1900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문부성 국비 유학생으로 영국에 가지만 넉넉하지 않은 유학비, 서양인에 대한 신체적인 열등감, 언어장벽, 위궤양, 노이로제 등으로 시달린다. 신경쇠약은 소세키 전 생애에 걸쳐 괴롭힌다.

 

p166 이런 증상은 소세키 개인 기질 때문만이 아니라 소세키의 몸을 경유하여 드러난 근대의 증후라 해야 한다.

 

세계는 철도의 격자처럼 정교하게 연결된 지 오래이지만, 소세키 세대에게 이 현실세계는 와 도무지 연결되지 않은 채 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한다. 그 세계는 거대하고 무지막지하고 독립적이며, 한마디로 인정사정이 없다.

 

p167 소세키는 서구문명 앞에서 자꾸 늦었다는 생각에 부끄럽고 초조하기만 하다. 그의 신경쇠약은 쏟아지는 서구문명에 대해 정신적 예속과 그 피곤을 보여주는 셈이다.

 

 

자기본위, 해체의 다른 이름

 

p167 원래 한문학을 공부했던 소세키는 유학 중 영문학을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불안감과 절망감에 빠진다. (168)그렇지만 한문학과 영문학 사이에 본성상 차이가 있음을 자각하면서 영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바꿔 질문한다.

 

p169 근본적인 방향으로 질문을 변형시키자, 내가 할 수 있는 지평에서 방법들이 구성되고, 목표가 재생산된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한문학의 입장에서 영문학을 바라보면 되고 이런 시도가 유일한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신만의 목표를 정하면 된다. 이제 소세키는 문제를 뒤집어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삶과 대결할 수 있게 되었다.

 

p169 소세키가 새롭게 구성한 문제는 뒤집혀 있던 것을 바로잡는 하나의 전복이며 현재의 위계를 뒤집어 허물어뜨린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전복이다. 또한 한문학이나 영문학 모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온한 전복이다.

 

p170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신이 수많은 얼굴을 어떻게 이렇게 모두 다르게 만들었을까? (전능)

왜 똑같이 만들지 못했을까? (무능)

가시적인 위계 밑에 숨어 있던 질문을 찾아내 뒤집고, 새로운 질문으로 바꾼다. 당초에 신이 전능하다는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했던 질문의 구조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프로그래밍된 답변을 뒤집어 버리는 전복이다. 이런 전복 위에서 비로소 신은 절대적으로 전능한 자에서 무능할지도 모르는 자로 변형되어 나의 지평 안으로 들어온다. 질문 자체를 뒤집어서 도달할 수 없었던 대상을 나의 지평 안으로 들어오게 만든 것이다. (자기본위)

 

p171 ‘자기본위는 본성상 차이일 뿐인 것을 아무런 근거 없이 위계로 치환해 버리는 것에 대항한다. 그 위계를 폭로하고, 그 위계로부터 도출된 거짓 문제를 전복함으로써 자신을 보다 근본적인 입장에 서게 하고, 대상들을 나의 지평으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필연적으로 타인본위를 해체해야만 가능한 이 실천은 본질적으로 불온하며, 반시대적이며, 해체적이다.

 

소세키는 주류 지식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왜 영문학을 공부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기본위는 타인으로부터 의심 없이 주어진 상황과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투쟁한다.

 

 

자기’, 새로운 자연의 세계

 

p172 자기본위는 태생 자체가 해체적이므로 자기본위를 실행하는 자기가 고정불변으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세키에게 자기란 타자와 마찰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정신들의 상호작용이다.

 

p173 인간은 태어나고 나서야 자신의 목적을 구성하고 실현한다.

<그 후>의 다이스께는 자기 본래의 활동을 자기 본래의 목적으로 삼는다. 걷고 싶으니까 걷는다. 그러면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자기 본래의 활동 이외에 어떤 목적을 세워서 활동하는 것은 활동의 타락이 된다. 따라서 자기의 모든 활동을 한낱 방편의 도구로 삼는 것은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p174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고양이의 주인 구샤미는 혼자서 있을 수 없는 목적을 만들어 내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혼자서 그것과 싸우고, 이어 스스로 화가 나는 어이없는 상황을 연출한다.

 

다이스께는 이를 자신의 활력에 충실하지 못한 것이라 보며 또 단번에 행동하려는 용기와 흥미가 부족하므로 행동 중에 그 행동의 의미를 의심하게 됨으로써 그런 혼란이 발생한다고 한다. ‘생활의 의의(실감)를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진 것이라 한다. ‘활동이 곧 목적이라는 다이스께의 이념은 매순간 존재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실감나게 구성하는 이념이기도 하다.

 

p175 다이스께는 욕망도 이해관계도 없는자연, 모든 활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자연으로 돌아갔다.

 

p176 언제나 틀린 질문, 틀린 대답을 해온 거라면 그 질문을 받아들인 나를, 특히 나의 욕망을 의심해야 한다. 나의 예속은 내가 타인의 욕망에 갇혀 있어서 가능한 예속이다.

 

 

 

2-5장 소세키를 넘어선 소세키 : 나쓰메 소세키(2)

 

 

아이러니한 자기본위의 세계

 

p179 ‘자기본위는 기존 세계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야 하는데 소세키는 이 세계를 자연이라 불렀다. 다이스께가 순수하고 완벽하게 평화로운 생명이 발견되는 땅이라 한 그 지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기본위를 통해 주류 도덕을 이탈한 후의 모습은 황량함과 슬픔, 그리고 불안의 정서로 가득하다. 주류로부터 소환될까 봐 언제나 불안하다.

 

p181 담벼락 밖에서는 아름다움이 황량함을 숨긴다. 그러나 담벼락 안에서는 불안과 황량함이 아름다움을 숨긴다. 일상생활은 밖에서 보는 모습과 달리 너무나 소박하고 따뜻하다. 미래나 과거를 얘기하지 않고 오직 현재의 결합에 충실하다. 산속에 사는 심정으로 도시에 산다. 주류 사회와의 접경지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성한 것이다.

p182 주류로부터 낙인찍혔으니 조마조마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주류에 대한 기대감 자체가 사라져 버리고 없으니 그만큼 자유롭다. 둘은 하나의 생명인 듯이 빛난다.

 

<행인> “도덕에 가담하는 자는 일시적 승리자임에 틀림없지만, 영원한 패배자이다. 자연을 따르는 건 일시적 패배자이긴 해도 영원한 승리자이다.”

 

그 지대는 통념적인 것에 적대 행위(불륜)를 하고서야 건너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자연은 경계의 지대이다. 주류로부터 탈주하였지만, 여전히 주류와 긴장관계 속에 있는 지대이다. 소세키는 하이카이(俳諧)적인 문학과 함께 목숨을 거는 것과 같은 격렬한 정신의 문학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이 격렬한 정신이 구성되고 있는 곳이 경계로서의 자연이다.

 

 

자기본위가 만든 삶의 해방구

 

p184 다이스께는 노동이 다른 것의 간섭을 받게 된다면 그런 노동은 타락한 노동이라며, 먹고산다는 목적만으로 맹렬히 일하는 주류의 일본을 조롱한다. 그는 남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나에게 가장 적합한 것과 접촉하며 지내야 한다고 선언한다. 다이스께 같은 사람들은 모두 경계의 자연에 살고 있다. 그들이 보는 세계는 다른 세계이다.

 

그러나 그 지대에 갔다고 해서 모두 주류의 도덕이나 이기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일부에게는 욕심과 경쟁심이 여전히 숨어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그들이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마저 있다고 고양이는 진단한다. 해방구는 여전히 타인본위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본위를 안고 타인본위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는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186)자기본위로 만든 삶의 해방구는 그 자체로 위태로워 보인다.

 

 

소세키를 넘어선 소세키

 

p188 여태껏 자기본위로 산다고 했지만, 자기가 혹시 근대라는 타인본위의 또 다른 생산물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라고 의심한다. (189)소세키는 자기본위의 퇴행과 대면하며 결국 자기와의 싸움 앞에 다시 선다. 소세키는 이 싸움을 이기적인 자기’, ‘퇴행적인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돌파한다.

 

p190 소세키가 말하는 자기본위의 길을 뒤따라갔으나 그 길 끝에는 자기가 없다. 타인본위의 체계들로 둘러싸인 경계지대에만 존재하는 자기본위는 항상 위태롭고, 뒤집히며, 끊임없이 굴절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음>의 선생은 죽음으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이 자기본위로부터 굴절되었음에 항거한다. 거기에서 기만적으로 삶을 영위해 왔던 자기 자신을 제거한 것이다. 타인본위로부터 탄생한 이기적이고 기만적인 자기였다.

 

활동이 목적인 존재로서의 자기란 자기가 없는 (191)‘자기이고 진정한 자기본위란 자기가 없는 자기본위이다. 타인들만 있는 곳, 자기가 사라져 버려 자기조차 타인인 곳에서 자기본위로 산다는 것, 그런 삶이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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