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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콤/ 화교 이야기 김종호 / 3. 이익과 생존, 내셔널리즘의 충돌 / 화니짱 / 21.10.10

화교 이야기 - 김종호 (21.10.1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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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남아 화상이 근대를 살아가는 법

 

1) 아시아의 근대와 제국의 상인

아시아의 근대는 아수라장이었다. (107)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외부자라고 할 수 있는 서구 제국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와중에 발생한 혼란을 기회 삼아 성장한 집단이 있었다. 바로 상인이다.

 

2) 제국의 상인들: 인도 상인과 일본 상인

근대 인도 상인의 네트워크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에 걸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대부분 대영제국의 확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고 했다. (108) 당시 영국령 해협식민지와 영국령 미얀마, 영국령 말리야로 건너온 화교는 초기 정착금이나 사업 자금을 대출로 해결하였는데, 주로 타밀인이나 혈연, 지연 기반 동향 및 씨족 단체로부터 충당했다. 물론 이는 대부분 고리대였고, 이 사업 자금으로 화교 역시 말레이인뿐 아니라 다른 화교를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했다. 이른바 타밀인으로부터 시작한 고리대의 연쇄였다. (109)

사실 영국과 인도 상인의 관계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국 제국의 피지배자라는 신분 덕분에 인도 상인은 국제적 상업 네트워크를 비교적 쉽게 형성할 수 있었고, 제국민으로서 상업 영역에서 각종 보호를 받을 수도 있었다. (111) 한편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제국의 아시아 진출은 일본 상인의 진출과 함께 이루어졌고, 해외에 진출한 그들은 때로 본국의 제국적 진출의 첨병역할을 수행했다. (112) 20세기 초 일본 상인이 아시아의 역내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화상의 네트워크에 의존했기 때문인데, 그러한 관계는 1920~1930년대가 되면 역전된다. (113)

 

3) ‘제국 없는 상인’, 화상의 생존법

21세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깊이 뿌리내려 아시아의 유대인이라고 불리며 초국적 네트워크를 유지한 이들은 화상이 유일하다. 화상은 어떻게 인도 상인과 일본 상인이 모두 물러난 근대 이후의 아시아 시장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 (114)

 

4) 다국적과 무국적의 화상들

영국이 해관을 운영할 당시에는 홍콩의 화상이 영국 국적임을 내세워 5퍼센트의 관세 할인을 누렸고, 가격경쟁에서 앞선 홍콩의 화상이 광저우 상인에 비해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9년 난징 국민정부가 해관 운영권을 되찾음에 따라 영국적으로서 우위를 누리던 검은머리 외국상인들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난다. 그동안 아니꼬운 꼴을 보아 온 광저우의 상인들은 당연히 당한 것이 있으니 외국인으로 대우하여 관세를 높이 책정하자고 하였고, 홍콩의 화상은 또 그들 나름대로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은 국화다라는 이식을 심어 줄 필요가 생겼다. 홍콩 상인의 반일 보이콧과 국화운동의 배경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120) 인도 및 일본 상인과는 달리 때로는 다중국적, 때로는 무국적의 성격을 띠는 화상의 이러한 특징이야말로 그들이 아수라장의 근현대 아시아를 헤쳐 올 수 있도록 해 준 생존비결일 것이다. (122)

 

2. 친일의 두 얼굴, 오분호와 림분컹의 친일과 그 후

 

1) 오분호의 상업활동

오분호는 1882년 당시 영국령이던 동남아 미얀마의 양곤에서 푸젠 하카 출신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하카 출신의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내려온 만드는 기술을 더욱 완벽히 발전시켜 대량생산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129). 1926년에는 싱가포르를 본격적인 사업의 전진기지로 삼고, 동남아시아 전체에 호랑이 브랜드의 의약품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유통망을 1930년대 홍콩과 광저우 등으로 확대하여 초국적, 초지역적 상업 유통망을 형성한 거부가 된다.

그는 사업으로 발생한 이익의 25퍼센트에서 60퍼센트 정도를 자선사업에 투입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으로 호파빌라 혹은 타이거 밤 가든이 있다. 그의 이름인(129)호와 동생의 이름인 파를 붙여 작명한 일종의 교육 목적의 놀이공원이다. 각각 홍콩, 싱가포르, 푸젠 용딩 지역에서 1930~1940년대에 개장하였다. 놀이공원이지만, 화교 자녀들에게 중화 문명의 다양한 요소를 소개하기 위해 지어진 교육시설로 볼 수도 있다. 내부에는 유교와 도교 신앙의 전설 및 민담을 소재로 한 코스들과 역사적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호파빌라는 현재까지도 운영되고 있다.

 

2) 림분컹의 사회사업 활동

1869년 페낭에서 태어난 림분컹은 말레이 지역(말레이반도, 싱가포르, 수마트라, 자바 섬 등)에서는 페라니칸이라 불리는 3세대 푸젠계 화예다. 페라나칸은 말레이어로 현지에서 태어난 이를 가리키는 말로 흔히 현지인과 화교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가리키지만,(131)광의로 해석하면 지역에서 태어난 외부인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18세에 이미 영국 여왕의 장학금을 받고 영국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에딘버러대학에서 의사 수련을 받은 엘리트였다. 스코틀랜드에서 공부했을 때 백인들로부터는 중국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당하고, 청에서 온 중국인들로부터는 중국어를 모른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이주민으로서 경계인의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의술을 수련하고 1893년 싱가포르로 돌아온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겪은 정체성 충돌의 경험 때문인지 돌연 싱가포르 페라나칸 공동체 사이에서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주민으로서 화교가 중화성을 분명히 가짐으로써 말레이 로컬 문화의 영향과 유럽 근대문명의 영향을 배제한 그들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한 듯하다. (132)

 

3) 같은 친일, 다른 평가

19422월 싱가포르가 일본에 의해 점령되고, 그 명칭 역시 교난토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싱가포르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 핵심 지역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군은 그 기선제압의 일환으로 이미 항일화교명부를 준비해 놓고 있(135)었다. 100여명이 넘는 항일단체 지도자와 임원 그리고 주요 회원의 주소를 미리 파악해 놓고 점령 이후에 모두 교외로 끌고 나가 기관총과 총검으로 학살하였다. 이를 소위 숙청사건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군정의 간부이자 숙청사건으로부터 림분컹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을 구한 바 있는 시노자키 마모루(일본의 쉰들러, 전범재판에서 협조적 증언)는 림분컹에게 쇼난화교협회의 설립을 요구했다.

림분컹은 당시 일본 점령하 싱가포르 화교의 대변인과 리더를 맡아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고난을 함께 감내했다. 쇼난화교협회의 드러난 목표는 일본의 전비마련이었지만, 그 감추어진 진정한 목표는 싱가포르 화교의 구조와 보호였다고 한다. 게다가 림분컹은 50만엔을 요구한 일본권에 대해 겨우 28만엔을 모금하여주었다고 한다.

당시 다양한 계층의 많은 화교가 림분컹과 같이 일본의 학살과 압박에 못 이겨 일본에 협력하였는데, 전후 영국이 다시 돌아왔을 때 이들 친일 화교의 재산을 적산으로 간주하여 일괄 정리하려고 하였다. 탈출한 이들은 재산상에 아무런 손실이 없고, 남아서 고초만 당한 이들이 친일과 적산으로 분류되는 현실에서 림분컹의 존(139)재는 일반 화교에게 변명과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을가. 그러한 측면에서 탈출하다 잡힌 데다가 전후에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오분호에 대한 화교의 여론이 좋았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비난은 받았을지언정 오분호의 친일을 통한 생존 모색이 없었다면 그의 대표 상품인 호랑이 연고가 현재까지도 동남아시아와 중국, 타이완, 홍콩에서 잘 팔리는 초국적 인기 상품이 되었겠는가. 결국 신념으로 고난을 함께한 친일 지식인은 지명을 남겼고, 이익을 위해 친일을 한 기업가는 상품을 남긴 셈이다. (141)

 

3. 제국민과 국민 사이 호키엔정체성 탄카키 또는 천지아겅

 

1) 동양의 헨리 포드, 탄카키의 성공

탄카키는 1874년 중국 푸젠성 통안(지금의 샤먼시)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그의 아버지 탄키펙은 싱가포르에 거주하면서 사업으로 돈을 벌어 고향의 탄씨 가족 및 씨족 클랜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고 한다. 17세에는 싱가포르로 건너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면서 비지니스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동남아 화교 사업장에서 인력을 수급하는 매우 전형적인 형식이었다. 돈을 좀 벌었다는 화교는 그들의 고향에 크든 작든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그들의 자식, 혹은 클랜의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149) 그들은 지금과 같은 국민국가적 경계인식보다는 다양한 공동체를 품고 있는 초국가적, 혹은 제국적 경계인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50)

고무는 브라질이 원산인데, 1870년 영국에 의해 처음으로 보르네오섬과 말레이반도에 이식되었다가 이후 1880년대 수마트라,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전파되었다. 1900년대 고무산업이 활황을 맞게되는 것은 자전거가 일상적으로 보급되고, 자동차가 상용화되면서부터다.

기존 화교가 거의 독점하다시피한 고무산업에 일본의 상사들이 자체적으로 대량 제작한 고무 제품을 가지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며,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다. 이와 같은 사업적 정체를 맞는 시기에 공교롭게도 탄카키는 국화운동에 앞장서면서 중국 본국과의 정치적 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2) 탄카키의 친공애국활동

1940년대 탄카키의 활동은 친공으로 유명했는데, 사실 그는(153)1940년대에 이미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국민당 정부의 관료집단과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을 체감하고 있었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화교로부터 모금한 돈이 불분명하게 쓰이고 있었음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 지지로 선회하게 된 것이다.(154) 당시 탄카키뿐 아니라 대부분 중립 성향의 화교는 그들 본국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집권 세력이 더 이상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을 강한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세력인가의 여부가 중요했다.(156)

경계를 뛰어넘는 제국의 프레임이 배타적 경계를 설정하는 국민국가로 전환되면서 경계에 있던 이주민인 화교들 역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동시에 강한 본국이라는 내셔널리즘적 인식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탄카키 역시 부패한 국민당보다는 청렴했던 공산당 지보두에 마음이 더 기울었을지도 모른다. (157)

 

3) 탄카키와 천지아겅

탄카키가 공산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모두 그의 고향인 푸젠 지역의 근대화와 안정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특히 탄카키가 중국으로 건너간 것은 샤먼 지역의 교육사업과 경제 재건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59)

냉전 이전 탄카키가 가진 의식에서는 고향인 푸젠 지역과 그 지역 출신 화교들이 주로 거주하는 말레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지역이 모두 하나의 공동체로 상상’(=아시아주의, 대동영공영권)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샤먼에 갔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행위는 같은 영역 내부를 오고 가는 것에 다름 아니었고, 그의 어린 시절처럼 일상적인 일이었다.

결과만 놓고 봤을때 최소한 냉전과 내셔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가진 호키엔과 호키엔 이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정당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60) 냉전초 탄카키의 행적은 당시의 화교가 더 이상 호키엔이 아닌 중국인 혹은 중국계 말레이인, 중국계 싱가포르인,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도전에 내던져졌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제국과 국민 사이 호키엔의 정체성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잔존하고 있는데, 화교사회에서는 탄카키라 불리고 중국대륙에서는 천지아겅으로 불리고 있다.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중국 동남부 교향지역과 동남아시아 이주민 사회 사이에 형성된 중화성의 도전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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