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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21.10.0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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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배려의 인문학 강민혁 / 21-3/ 21.10.08. / 화니짱

 

2-1. 별일 없이 산다, 복수한다 : 루쉰(1)

2-2. 별일 없이 산다, 혁명한다 : 루쉰(2)

p126 : <광인일기>의 광인은 역사책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글자를 발견합니다. ‘인의도덕틈새에 식인이라는 글자가 비틀댑니다. 일련의 K컨텐츠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 오징어 게임, 배틀 그라운드, 기생충. 무한 경쟁의 사회라는 날 것으로의 신자유주의. 그 안에 있는 정신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을 돌보지 마라!” 혹은 나만 아니면 돼!” 그 맨 얼굴을 직시한 사람이 루쉰입니다. 계몽주의자이면서 반계몽주의자라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안팎의 식인들과 싸운다. 나는 나와 싸운다. 우리는 우리와 싸운다.”(129) 루쉰의 비판에는 성역이 없습니다. 전통문화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 서구 사상을 대안으로 생각하며 존중하는 사람 모두를 비판합니다. 관성적으로 사고하는 사람 모두를 비판하는 데 그 비판의 대상에는 자기 비판도 깔려 있습니다. 중국인이라는 민족성에 대한 비판, 국까, 국빠를 모두 까는 자기혐오적 비판.

어떤 대안도 가능할 것 같지 않는 절망감이 여기서 나옵니다. 루쉰은 얼척없는 희망론, 염세주의적 절망론을 모두 비판합니다. 믿쑵니다. 희망을 믿으면 미래가 변할 것처럼 말하는 희망전도사들, 절망을 씹고, 뜯고, 맛보는 절망성애자 모두를 비판합니다. 루쉰은 평화와 양보를 설파하는 사람도 혐오합니다. 유언장에 기재할 정도로 그는 끝끝내 복수를 갈망합니다. (134) 강민혁은 루쉰의 복수는 별일 없이 사는 것’ ‘침묵의 복수라 말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루쉰의 잡문선을 보면, 루쉰은 침묵을 택하고 조용히 별일 없이 사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의 권력자들과 자기 분별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자기이해에 눈 멀어 민중을 호도하는, 혹은 둘다인)을 매섭게 비판합니다. 어디서든 분란을 일으키고 많은 정적을 만들었습니다. 정적들의 비판을 무시한 것도 아니고, 다양한 필명으로 다중분신술(?)까지 동원하며, 다채롭게 떠들며 싸웠습니다. 근무하던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지역 권력자의 미움을 받아 생계는 물론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래서 강민혁이 말하는 복수와 싸움 끝에 오는 허무, 적막, 허위에 공감가지 않습니다. 무덤에서까지 평화가 아닌 싸움을 이야기한 게 루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p143 : 부정적인 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살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막이 생을 만드는 것으로 루쉰이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편 강민혁은 일상에 충실하라는 자기 계발적 구호를 비판합니다. “혁명이니, 복수니, 투쟁이니 하는 대의는 몰라요, 오로지 소박하게 먹고 사는 데 충실할 뿐이에요! 그게 삶의 전부 아니에요? 이 반문 앞에서는 윤택한 생활을 위한 실리적 기획만 의미를 가진다. 이를 위해서 기존의 통념적 가치와 위계에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만 중요해진다. 여기에 다른 고민과 분투는 필요없다. 오직 실리와 효율 아래에 자기를 단련시키(145)만 하면 될 뿐이다.”

그런데 한편 그는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인형에서 벗어날 수 있다(146)고 말합니다. “대의를 강조해도 주인 행세하는 노예가 될 뿐이라는 겁니다. “일상에 매몰되면 노예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대의를 강조하는 게 주인 행세하는 노예의 삶인지. 어떤 대의냐 언제 부르짖는 대의냐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요? 국가의 대의, 혁명의 대의, 회사의 대의(145)가 과연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쨌든 그는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조그만 힘을 통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상이 혁명의 출발점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새로운 일상을 일구며, 밥벌이와 함께하는 혁명, 혁명적인 일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47) 사회변혁없이, 시스템에 놓여있는 한 개인으로서, 국가라는 기계의 나사바퀴처럼 끼어있으면서 어떤 일상적 혁명이 가능한가요? 이 기계의 사목권력, 품행권력의 통치기구로서 교사인 제가 어떤 혁명, 밥벌이와 함께 하는 혁명이 가능한가요? 오히려 내가 딛고 있는 존재조건으로서의 밥벌이와 지향하고 꿈꾸고 가야할 혁명 사이에 크나큼 괴리, 분열, 그리고 그 일상과 혁명의 분열을 직시하고 고발하고, 기록하고 혁명적 변화를 부르짖는 것이 최선의 역할 아닐까요?

그 엄청난 틈새가 단어 순서를 뒤바꾸는 것과 같은 간단한 사고전환(일상적 혁명, 혁명적 일상)으로 매꿔질 수 있나요? 별일 없이 살며, 침묵하기에, 이 괴리에서 오는 허무, 적막, 허위를 위로하기 위한 정신승리 아닌가요? 형용모순이 형용모순인체로 너무 허무하게 끝난거 아닌가요? (별일 없이 산다, 복수한다 /별일 없이 산다, 혁명한다)

 

2-3. 구경하지 말고, 달려라! : 루쉰(3)

이번 장에는 루쉰의 책보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루쉰이 살고 있는 당대를 이해해야 그의 문제의식을 알 수 잇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레퍼런스를 루쉰의 글을 통해서 그런 문맥을 적확하게 뽑아내지 못한 부분은 아쉽습니다. 어쨌든 다케우치 요시미는 근대라는 관념이 유럽이라는 특정한 지역이 봉건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에서 봉건적인 것과 자신을 구별하여 유럽 자신이 자신을 바라본 자기 인식이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럽 자신의 자신에 대한 인식이며, 유럽 자신을 주체로 하여 정립한 자기 인식이라는 것입니다.(155) 그런 점에서 동양의 발전과 근대 초극’,‘서양과 동양의 조화’(동도서기론 등)라는 인식은 그런 프레임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방향으로 운동합니다. 왜냐하면 조화로운 동서양이란 유럽의 전진과 승리의 관점에서 유럽 자신을 보충하는 것으로 될 뿐이기(156) 때문입니다.

이것이 타인의 인식틀을 자신에게 가져오는 한계점입니다. “타인의 목표를 자신의 목표로 오인함으로써 자신의 운동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157) 테크노크라트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미래상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가 그렇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성숙한 민주주의, 공화정 민주주의의 역사 따위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바꿔야 하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훌륭하고 뛰어난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멍청한 형태로 구현하는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교육입니다. “나의 민주찡은 그렇지 않아!” 거꾸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현실을 항상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현실과 관념의 괴리라는 부조화를 항상 안고 사는데,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싸움의 장 밖에서 초월적인 시선으로 정치평론 같은 것을 할 뿐입니다. “현실 자체는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과학이나 합리주의를 통해 그 현실에 무한히 가까워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의 생각 자체가 노예의 과학이고, 노예의 합리주의입니다.(158) 교실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정치적 표백지여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정확하고 역사적으로 올바른 관념, 근대에 대한 박식하고 근사한 교양이 아닙니다. 역사는 만들 수도 분해할 수도 있는 구축물”(159)입니다. 우리의 한심한 현실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합니다. 아니 오히려, 별일없이 안일하게, 잘살고 있는 것 같은 (k문화, 경제, K민주주의 수출 등) 착각과 환상을 깨고, 어두운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빛이 빛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짙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160) 그리고 우리가 일상에서든(노동, 가족) 정치적 조건에서든 노예(국민, 자본주의)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로 노예다.”(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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