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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하나의 이야기다(한나 아렌트)

(아렌트)삶은 하나의 이야기다(3,4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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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세기를 이야기하다 4장 인격과 몸(58-125)

 

 

 

#1

 

320세기를 이야기하기

 

아렌트는 픽션을 통해서 20세기의 뜻을 드러내는 역사적 행위의 관찰자들인 소설가들을 택한다.

다른 이들의 문체의 고유성도 아렌트가 주목하는 핵심이 아니다.

그녀는 이야기 주제들에 더 관심을 둔다

한 역사적 경험의 목격자 이야기를 집약하거나 또는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짧은 이야기 진행들에 주목한다.

아렌트는 유대교가 유대적인 것이 되는 세속화 과정이 이름 속에 소속(그들중의 하나가 됨) 대신에 자기 동일성(존재)을 포기하는 것이고. 또한 세속화 과정이 쇼아(홀로코스트)와 같은 사악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을 드러내 주면서 해석한다.

 

20세기 유럽 유대인에게 있어서 유대적인 기원은 어떤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함의 없이 어디에서나 하나의 심리적 자질로 되면서 유대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로부터 오직 덕이나 악덕의 범주에서만 고려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독서는 카프카 니체 하이데거 그리고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포괄하는 진정한 문학적 모자이크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 언어에서 자기 세계의 사유와 역사를 위한 싸움터가 된다.

 

그녀는 카프카에서 나타나는 인간적 자질이 결핍된 추상적 특성을 세계가 마치 그 안에서 기계처럼 작동하고 주인공이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성찰로 해석하지는 않는다.

카프카는 느끼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주의 소설가라기보다 사유가로서 우리가 거기서 인물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하였을 사고의 도식을 추적한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자서전에서 아렌트는 한 유명인이 됨으로써 자신을 구별시키기를 원하는 동화 유대인의 드라마에 주목한다.

 

드문 여성 중의 하나인 이자크 디네센, 아렌트로부터 그녀의 어두운 시대 동안 본 시대 소설가들의 아렌트적 판테온을 완성하는 명예를 얻는다

 

한나는 논하기를 만약 티타니아 이자크의 철학이 제시하는 대로 어느 누구의 삶도 그 삶의 이야기가 말해질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이 맞다면, 그 삶은 하나의 이야기로써 사라질 수 있고 또한 사라지기까지 해야 하며 한 사람이 생에서 해야 하는 일은 이야기를 실현시키는 일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장의 표제어는 그것을 디네센으로부터 빌려와서 모든 염려는 당신이 만약 그로부터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딜 만하다라고 했다.

라헬부터 티타니아까지 그렇게 고리는 완결되고, 한나는 이미 자신의 삶이 지금부터 하나의 구술된 이야기가 되는 만큼 그렇게 진실한 역사인 것을 안다.

 

 

한 반순응주의자 여성 이야기꾼으로서 정치적 삶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말하기를 통해서 행위를 위해 결정한다.

 

이데올로기적 상상이 프랑스인들의 이성주의적 반유대주의를 완결하기 위해서 필요했다라고 아렌트는 참으로 사악한 기억인 반유대 소책자를 인용하며 쓰고 있다.

엘리트들 사이에서의 위선을 벗기려는 욕구자유주의자들의 친유대주의에 반대하는 혐오가 더해졌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뿌리 없는 대중들에게는 일반적이고 엘리트에게는 현실감의 부족으로 야기된 허구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키플링과 기원들의 전설,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그의 영국적 자아, 바레스, 모라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자주 대조적으로 환기되는 페기와 더불어 그녀의 참고가 되는 이야기 세계를 둥글게 싸고 있고 이것들이 전체주의의 기원에 궁극적 기원에 놓여 있다.

 

나탈리 샤로뜨는 아렌트가 연구한 유일한 동시대 작가이다.

아렌트는 샤로뜨가 그것으로 이기적 나의 파국적 내면성을 탐색하는 잔인성과 아이러니를 즐긴다

거기서 각 단어는 평범하거나 진부한 것이 아닐 때 하나의 무기가 되고 그와 함께 가족과 사회는 해체되며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칭하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것이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인 그들의 공허 속으로 빠져든다.

거기에 더해서 아렌트적 분석은 사회적 메커니즘의 폭로를 위한 방식으로써 이야기를 높이 평가하는데 여기서 심리 사회적 희극의 폭로를 말한다.

 

 

샤로뜨에게서 진실의 순간은 두 개의 심층 대화가 충돌하면서 하나의 변신을 창출하고 아렌트에게는 그것이 동시대 문학에서 유일한 극적인 자질처럼 보인다

 

마침내 아렌트는 브레히트를 지지하는데 그녀는 그의 우울한 천재성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시인들의 안에서 자라나는 무책임함으로부터 어떤 정치적 의미성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들은 좋은 사유가이지만 판단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아렌트가 구술자의 시적 언어가... 현연하는 자아 사이를 어떤 철학적 개념이나 신비한 환상보다도 훨씬 더 잘 결합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 있다.

우리는 카프카와 관련해서 그녀가 하듯이 어떤 양식이라도 자체의 마법으로 일종의 진실로부터의 도망이라고 아주 쉽게 선포하는 루카스식 사회학으로 인해서 간담이 서늘해질 수 있다.

카프카는 동료 시민이 되는 것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선포하는 것 등이 해당된다.

 

우리는 아렌트가 정신착란증뿐 아니라 전례 없이 이야기와 언어와 자아의 구조를 재평가하는 이 세기의 아방가르드들을 우울, 그리고 그녀가 말한 것처럼 황폐화뿐 아니라 정신병의 영역으로 이끈 저항의 역사적 필요성 또한 인정해 주지 않는 사실을 애석게 할 수 있다.

 

아렌트 그녀는 인간사의 덧없음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관점에 따르면 이야기 예술은 정의로운 행위 아래 종속된다.

 

 

비록 그것이 정의로운 행위를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사실 이야기 예술은 바른 행위에 의해서 압도되는데 어떤 미적 특권이나 작품의 우수성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아름답고 선한 삶의 이상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지워버릴 수 없다.

 

 

#2

 

현대 예술가는 아렌트에게 있어서 노동하는 인간의 전형으로서 그녀에 따르면 인간성에 매우 저속한 변형이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주요 작품은 작품이 아닌 작품, 쓰여지지 않은 작품, 그래서 생산으로 구체화되지 않은 작품이 아닐까

 

덕이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도시의 은인이 되는 일로부터는 한참 거리가 먼 소크라테스는 역사가 아렌트에게 활동 속에 있는 사유의 전형, 중단 없는 질문으로 공적 일에 대한 관심을 결코 그쳐서는 안 되는 이론적 삶을 남겨두었다

 

소크라테스가 한 일의 의미는 활동 자체 안에 놓여 있다.

사유하는 것과 온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동일하며

이는 곧 사유하는 것은 항상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리하여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향한 추구로 이해된 이야기의 삶 전반에 걸쳐 아렌트가 찾은 것은 전체적인 그리고 전체화하는 작업이 아니다. 또한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 있는 정치 공간의 창조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의 본질을 환영하는 비범성, 지배의 도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현연의 장소로 보는 것은 아렌트 사유에 부합하지 않는 심미화를 대변하는 것 같다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삶이란 모두에게 갈등을 드러내는 이야기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치적 삶이 그 자신의 심리화에 저항하고 자신을 단순한 생산품으로 환원될 행위 자체를 보는 한에서 그러하며, 또한 자신을 살아있는 사람들의 축소할 수 없는 다원성에 의해 공유되는 것으로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하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술은 서구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로 일컬어지듯이 반드시 국가적 미학의 핵심은 아니다.

이야기와 소설에 대한 주목에서 아렌트는 구술이 어떻게 다른 정치, 열린 기억의 그것, 그녀가 누군가의 삶이라고 부르는, 새롭게 갱신되고 공유된 기억에 참여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술자가 때때로 오해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사이-존재의 판단하는 통찰력에 제공된, 활짝 열려 있고 무한한 정치 행위로서의 이야기하기의 구조적 가능성을 그대로 놓아두는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한나 아렌트 자신이 특히 청년기의 힘겨운 시간에 낭만적 열정의 시련과 그의 뒤따르는 우울로 고통받았을 때 시를 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녀는 시적 표현을 구술적 표현의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아렌트는 오만과 죽음에의 집착을 그 대신에 구슬되는 행위의 실천지, 즉 계속해서 새로 태어나고 낯설고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부활적인 것으로의 가능한 변환을 제시했다.

 

마침내 만약 이야기가 전문적인 철학자들의 지혜가 쳐놓은 덧에 빠지지 않고 또 예술 소재를 구성하는 자들의 실용주의를 벗어날 기회를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이론적 삶과 정치적 삶 사이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한에서 그러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아렌트적인 경험 자체 외의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다원성과 그 스스로에 대해서 묻는 일을 그치지 않는 행위의 모순들 말이다.

 

지금 아렌트가 공포와 쇼와를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지정한 것은 어떤 이해나 분석 또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이야기 자체이다.

 

구술된 행위와 행위하는 구술에 대한 강조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이성-실천지의 안정책인, 신들의 영역으로부터 철저히 물러난, 정신을 넘어서는 인간 실천의 영역에 동조하면서 그렇게 한다.

정신과 구별되는 이성은 신적이지 않다

이것이 진정 아렌트가 거기에 헌신하고자 하는 것인바, 신적이며 살아있는 말로서 정치적인 삶에서 정신의 삶을 전개시키는 그것이다.

 

아렌트가 제공한 긴 목록에서 가져온 한 다른 신화적 이야기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잘 알려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렌트는 이야기를 이렇게 분석한다.

생각해 낼 뿐 아니라 창조하는 것, 소설의 상상적 특성들, 당신은 잘 감각화해야 한다.

창조적 상상력은 보이는 세계의 요소들을 조작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마치 에우리디케의 지각할 수 있고-볼 수 있는 몸처럼 오직 탈감각화하고, 휘발시키고 죽인 후에 비로소 성공한다.

 

그것은 지각할 수 있는 요소들과 여성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유일한 길은 에우리디케를 탈감각화의 이야기를 상세히 열거할 수 있는 오르페우스로 만드는 일 안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이 방식으로 이 구술의 사실로부터 탈감각화의 이야기가 행위 속에서 모든 참가자들에게 지각될 수 있다.

 

대신에 지각할 수 있고 여성적인 것은 개념들로서보다는 그녀의 사유를 구성하고 강점들을 대변하는 빈번한 비유들로 다시 돌아오며 사유의 결정적인 연결들인 기원, 조건, 탄생은 아렌트에게서 정신적 삶과 활동적 삶 사이에 긴장의 흔적뿐 아니라 한 여성을 천재 사유가로 만드는 감각화와 탈감각화 사이에 그것도 보여준다.

 

근대인은 속히 더 나아가서 천재를 창조함으로써 ...천재의 우상화는 상업 사회에서 다른 신조가 우세한 것처럼 인간인격의 똑같은 타락을 감춘다

천재를 떠나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가의 본질은 결코 자신에 의해서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말하는 아렌트의 에너지와 함께 남겨졌다

 

한나 아렌트는 아마도.... 아름답게 성숙한 여성과 유대인으로서 정치가로서의 그녀의 작업이 증거인데 마치 상세히 구술된 삶이나 또는 삶의 필수 불가결한 이야기 그리고 또한 필요한 조건과 그 양쪽에 대한 그녀의 성찰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정치적 삶이 없이는 어떤 삶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구술적인 재탄생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삶도 없기 때문이다.

#3

 

4장 인격과 몸

 

우리는 아렌트적 정치 행위 개념의 고유성을 그녀가 정치 행위를 한 존재에 대해서 개연성 없는 주장에 근거하기보다는 가설적이고 위험한 희망에 의존하는 인물의 현실화로 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다.

 

아렌트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경험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관심과 비판을 현대 세계에 집중하도록 조절하는 일로 이끈다.

인간의 본질에 집중하는 근본적 존재론의 전유로부터 시작한다.

 

사고, 의지, 그리고 판단은 그녀를 철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찰들로 인도하는데, 그 성찰들은 철학을 바로 정치를 그렇게 하듯이 분해하고 자유를 새롭게 보는 길, 특별히 아렌트적인 길을 그려내도록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인가에 대한 반대로서의 우리는?

이것은 아렌트의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작업에 생명을 부여하는 폭로이고 관심이다.

고독한 성찰과는 반대로 아렌트는 인물의 계시적 행위들과 말들을 세계의 다원성 안에 새긴다

 

아렌트의 사유는 하이데거적 혁명을 지목하여 논의한다.

인물(인격)은 후설적 에고가 놓여있는 의식의 선언적 삶으로부터 추출된다. ...

아렌트에 의해서 결코 거부되지 않으면서 이 계시는 인간의 조건에서 누구무엇사이에 세워진 구별의 전체 범위를 정한다.

그녀는 정치 영역에 몰두한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것의 평가절하가 아니라 바로 육화의 기독교적 유산에 대한 현대적 성취이다.

만약 누구가 이 세상에 있다면 그가 육화되었다면 이 누구는 피할 수 없이 정치적이어야 한다.

누구무엇사이의 구별은 여기서 본질적이다.

 

무엇은 사회적 외양과 생물학적 속성들로 축소된다.

자질 재능 소질 그리고 약점이 개인적 고유함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모두 무엇에 관계있고 종의 익명성 속에서 또는 용어의 자연스러운 의미에서의 생명 속에서 사라지는 예들과 연관된 것이다.

 

인격은 자신을 생명력으로 이해된 생명이나 사회적 공리주의 안에서 객관화하지 않으며 더군다나 아렌트에게서 그 인격은 고독한 자아가 아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것을 그녀의 존재에게 드러내는 인격의 과잉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대신에 행위와 다른 사람과의 말 가운데 초월을 자리매김한다.

어떤 사람의 삶으로의 인격은 사실 본질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러나 특별한 방식으로 그러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한 다원성의 시간 속에서 현실화되는 하나의 본질인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유일성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생각하고 행위하며 그녀의 독특한 적성을 상호적인 신뢰 가운데 인간 존재들의 다양한 중심에서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정 인격은 함께함으로부터 분리된 내밀한 지식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수의 다른 사람 앞에서 반드시 분출하는 역동적 예외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데 그렇게 탄생한 다른 사람들은 은연 중에 너는 누구야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각각의 새로운 도착한 사람의 행위를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인격은 자연과 사회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데 그와 동시에 자아의 전유하는 고립으로부터 구출한다.

인간의 다원성 속에서 흩어지면서 그리고 인류 이야기들의 무궁한 덧없음 속에서 인격은 그 자신을 하나의 역동적인 현존, 공적과 행위를 뛰어넘는 하나의 현실태로써 드러내며 그것은 어떤 구체화나 객체화의 시도에도 반대한다.

 

인격은 오직 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바 인격이 거기에 결합된 행위를 말한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생산적 활동만을 초월하는 것이라면 행위는 의미가 없을 것이고. 사실 이 인격이 없다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과잉으로서의 인격은...하나의 근원처럼 보이지만 인격은 무엇보다도 무한한 방식으로 사실 이후에 자기를 창조한다.

인격은 헤라클레스적 암호의 방식 속에서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많은 증거들이 상세히 열거하는 방식으로 판독될 수 있다.

 

인격은 무엇이 되기를 그치고 작업뿐 아니라 작품을 행위로 바꾸려고 한다.

과거와 미래를 향해서 말해지고, 기획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지는 행위인 것이다.

아렌트는 단테를 인용하면서 행위를 어떤 주어진 인물의 하나됨을 계시하는 것으로 찬양한다.

 

행위의 활동성 안에서 인격의 지시자는 다름 아닌 특별함이다.

아렌트는 또한 인간을 뛰어나게 유일한 것으로 만드는 그의 개인적 원리를 환기시킨다.

둔스 스코투스는... 인간의 일을 저주스러운 우연성에 맡기는 모든 인과성에 대항하면서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자유를 고유한 인간에게 수여한다.

 

사랑한다는 것: 원함과 같은 것이다.

사랑은 활동으로 파악된다라고 아렌트는 쓴다

이 사고와 감각적으로 파악된 행위의 합체는 아렌트가 이미 그리스 영웅 사상에서 찾은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는 그의 자유의 철학과 우연성에 대한 선호를 통해서 아렌트에게 인격의 유일성에 대한 성찰과 사고와 감각적 지각 사이의 긴장에 대한 성찰을 원함과 사랑의 최전선 심화시키는 기회를 준다.

 

그녀는 ...이 의지의 철학자는 자아의 자신과의 실험이라는 용어를 통해 인격의 고유성에 대한 이러한 대안적 파악 속에서 단순히 주어진것을 뛰어넘는다

 

인간 일의 덧없음속에서 인격을 밝히고자 애쓰면서 아렌트의 물음은 두 전선에서 계속된다.

그 하나는 공적 영역의 고통스러운 결속 안에 기초 존재론을 정박시키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이 일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사유는 오로지 정치라는 표제 아래에서 초래된 것을 제거하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격에 대한 반대로써 몸은 아렌트에 의해 두 가지 방식으로 생명과정에 작인으로 이해된다.

다산성과 노동이 그것이다.

종과 그것의 유지에 갇혀서 이 몸은 바로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 나눌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적 재산의 범주가 된다.

 

세계로부터의 물러남 속에서 노동과 그것의 기관인 몸은 인간적 측면에 가장 적게 공통적인것들이고, 정념의 대상이 되어서 아렌트가 대위적으로 제시하는 세계 사랑을 상기하지 않는 한 결코 가늠할 수 없는 폭력이다

 

아렌트적 몸은 비정치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순서에 따르는 존재로 보여지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대하여로부터 지지를 받는 이 주장에 도취되어서 아렌트는 몸의 장기들과 마음의 상태들이 동일하고 개인적 차이는 나타남의 공간에서 명확하게 선언된 담론에 의해서만 끼어드는 것으로 믿는다

 

누군가는 아렌트와 더불어 논쟁하면서 DNA와 같이 가장 감추어진 생물학적 몸이야말로 반대로 가장 개인화된 것이 아니냐 하고 또한 차이의 공간으로서 공적 영역을 구하기 위한 그녀의 야망이 쓰는 논중이 항상 검토를 견뎌내지는 못한다 해도, 참 고귀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렌트는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함께 비난한다.

심리학 심층심리학 또는 정신분석은 계속 변하는 기분 우리 심미적 삶에 오르내림 외의 다른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단조로운 동일함과 만연한 추함이 현대심리학 발견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더 나아간다.

 

오직 무질서와 비정상이 그들을 개인화할 수 있다라고 아렌트는 말한다

 

프로이트의 발견은 만약 정신적 삶이 자신을 고유하게 표현하는 일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녀의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경험의 축적은 그녀를 인간 일에 덧없음을 승화시키는 일로 이끌었는데 그녀는 인간 일의 덧없음의 행위와 말이라는 이종성과 고통스러운 특성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 승화를 하나의 정치라고 부른다

아렌트가 기독교 교회에서의 권위 개념 특히 권위가 근거하고 있는 지옥의 공포와 싸울 때 이 가학피학성 성애의 주제를 건드릴 것이다.

보상과 징벌의 상호작용과 그것으로 일깨워져서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진한 공포가 타당하게도 그녀에게는 전통 종교에서의 유일한 정치적 요소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세속화된 현대세계의 중심에서 이 공포와 권위의 연금술에 특별한 운명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최적의 정치적 다원성의 심장부에서 인격의 자유를 구하는 일과 그것을 어떤 조정할 수 없는 무의식에 넘기지 않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는 또한 어떤 주어진 사람의 인격성을 몸에서 박탈하는 일을 감행한다.

아마도 방해물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몸의 가변성이라니!

 

아렌트가 판단의 기원을 분석할 때... 판단은 정치 영역에서 핵심적인 활동인데 왜냐하면, 사유가 확장된 정신보편적 의미에 참여하기 위해서 독단주의를 통과하는 것은 판단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말한 미감은 우리에게 다른 감각들보다도 훨씬 내면적인 구두적 미각과 냄새를 동원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내밀한 감각 인식이다.

 

 

판단은 상상을 통해서 그것을 이용하고 미감을 정치 영역으로 확장한다

아렌트는 발설하기를 소통 가능성’, ‘공적이라는 특성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빠르게 대상들을 성찰의 작동을 위해 준비시키는 상상의 길에 내어놓으면서 아렌트는 첫 번째 쾌락, 맛을 보거나 즐기는 몸의 쾌락을 무시했다.

여성적 몸은 아렌트로부터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관심을 끌지 못한다.

 

생물학적 삶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여성이나 노예에 반하는 정치적 삶이 유일하게 고상한 영역이 아닌가?

그런데도 아렌트 사고는 여기서 점점 더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인격의 긴장 안에 포괄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권리로 감사와 무기는 마땅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여성성을 그녀가 유대인성에 대해 그러하듯이 단순히 거부할 수 없이 자체로서 받아들이는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아렌트는 두 성 사이의 구분은 이미 창세기 117절 속에 선언되어 있다고 밝힌다

우리 철학가에 따르면 이 텍스트는 인간적 다양성은 행위에서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제시해 주는데 남자와 여자 사이의 최초의 다름이 처음부터 다양성을 구성한다.

 

여성성은 우리의 첫 번째 기원으로부터 주어진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알기를 아렌트에게서 정치적인 것의 핵심이 되는 행위를 위한 본질적인 차이라고 보여진다

 

 

여성성은 자신을 노예처럼 몸이 한정하지 않지만, 참으로 세계의 다원성, 그가 참여하는 다원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세계 사랑에서 무엇이 여성성의 궁극적 역할이고 본질인지에 대한 이 예비적 사고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녀는 각자와 모든 사람의 차이를 주창하는 일에 전념했다.

한 인격으로서의 그녀 고유성을 무화시키고자 했을 수 있는 어떤 운동이나 그룹에 동화되지 않도록 자신을 방어했다.

 

다원성은 인간 행위의 조건이다.

참으로 우리가 전체주의로부터 어떤 더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The End. 202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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