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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줄리아 크리스테바 / 개벽크 / 23. 06. 15./

 

 

<조르주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1973>

 

 

 

5. 판단

 

 

한나 아렌트의 마지막이자 미완성 저술은 지고의 정치적 행위인 판단에 바쳐졌다. 그것은 1970년 가을 뉴스쿨에서의 칸트 정치철학에 곤한 강의와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판단력 비판에 관한 세미나를 포괄하는데, 칸트도 아란테드 정교하게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우리가 오직 꿈꿀 수만 있는 미래 정치철학의 매우 도전적인 기초들을 제공한다.(126)

 

그녀가 칸트에 이어서 정치철학을 위한 기초로 제시하는 판단은 하나의 인지 판단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공통감각에 의한 미감의 승인으로서 그것은 이해를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헤겔 방식의 역사에 의한 판단이 전혀 아닌데, 헤겔에게는 세계 역사는 세계 법정이고 마지막 선택의 특권을 오직 성공에게 수여하는 개념이다(127)

 

가다머가 칸트 미학에 가한 비판, 즉 공통감의 이상을 비정치화했고’, 미감 능력을 미학화했다는 비판과 더불어 하버마스가 아렌트에게 가하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29)

 

하버마스는 그녀가 판단의 인지적 차원을 부정했으며, 실천(정치적) 담론을 이성 담론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비난한다.

 

가다머와 하버마스에 의해 제안된 독법과는 반대로 나는 아렌트와 칸트의 판단에 대한 관점과 그 정치적 범위들에게 그것들을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이들이 전 전조적 현상학이나 더 급진적으로 무의식 이론을 적용하는 것을 계획한 직관적경험의 심화를 요구할 수 있다.(130)

 

아렌트에 따르면, 판단은 이성적 이해의 장악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매우 취약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데도 고유하지만 여전히 소통할 수 있는 미각을 가진 관객들로 구성된 인간 공동체의 불확실성 안에서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러하다.(131)

 

아렌트는 니체를 세심하게 읽는 독자로서 양심뿐 아니라 계약을 공격하는 니체의 폭력과는 반대로 시간에 대한 관계가 변하는 한에서 가능한 것으로 인격의 갱생 가능성을 조용히 보증한다. 그래서 그녀는 힘에 대한 의지의 고통 속에서 씨름하면서 계약상으로 부채를 진 양심의 어두운 그림을 피하고, 오직 니체가 그것을 구상하는 힘라고 불렀을 것만을 간직한다.(134)

 

그녀는 용서의 거대한 문제점과 명료하게 씨름하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악한행위들이 있고(그녀는 1961년 아이히만 재판보다 훨씬 전 칸트를 인용하면서 1958년에 썼다)(135)

 

아렌트는 용서는 사람을 향한 것이지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용서는 사람을 향한 것이지 행위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살인이나 절도를 용서할 수 없고, 오직 살인자나 절도자를 용서할 뿐이다. 무엇이 아닌 누군가를 목적하면서 용서는 그것을 하나의 사랑의 행위로서 드러낸다.(137)

 

아이히만 재판에 관해서 그녀는 결코 이 범죄인을 용서할 수 없는데, 정확히 왜냐하면 사람을 염두에 두었지만그녀는 한 비-인간, 인격이나 누군가의 부재,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능력이 없고, 그래서 자신을 용서의 영역에서 제죄한 한 자동인형 공무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그녀에게 용서할 수 없는 범죄’, ‘깊게 뿌리내린 악’, 아이히만이 자신을 거기에 내어준 시스템에 의해서 저질러진 악, 그리하여 그것으로써 인간 힘을 위한 모든 가능성을 파괴시키면서 우리에게서 모든 힘을 가져가 버리는 악을 말하는 것보다 덜 과격해 보이지 않는다.(138)

 

아렌트의 판단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누구보다도 용서받을 만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단지 그 사랑의 이유 때문만이 아닌데, 그 사랑은 인간 삶에서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로서 자기현시의 독보적인 힘과 인격의 노출을 위한 생각에서 견줄 대상이 없는 명백함을 가진것이다. 또한 사랑스러운 계시의 도움으로 다른 모든 것 중에서도 특별히 하이데거 사유에 의해서 그녀에게 일깨워진 성찰의 이유 때문이기도 한데, 말하자면 그녀는 그것을 세상의 공간이 우리 사이에 놓아둔 거리로부터 그 사람에게 대한 시선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논의하고 해체한다.(140)

 

아렌트는 예수 덕분에 용서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용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고, 희생자에게 인정을 베푸는 로마적 원리가 오직 먼 과거에 선행되었을 뿐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용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되면서 그 그리스도적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권위에 도전하는 경향이 있는 작고 긴밀하게 짜인 제자들의 공동체에 근거한다.(141)

 

예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게 제시하는 접속어들이 아렌트에게는 핵심적으로 보인다. 신만이 용서하는 유일한 자가 아닐 뿐 아니라 먼저 인간이 서로 용서할 수 있으므로 마침내 신은 확실하게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 마태복음을 인용한다: ‘만약 네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너희 하늘 아버지도 역시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 용서는 무의식에도 적용될 수 있는데 일관되어야 하고 무한하기도 해야 한다.

 

아렌트가 행한 이 종교적 실천의 전유는 우리가 그 윤리를 해석의 다른 현대적 행위로 확장하도록 초대한다. 정신분석학적 경청과 전이와 반전 안에서 분석가의 말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용서 행위로 나타난다. 질환의 광기와 비통, 또는 증상을 넘어서 의미 부여하기, 이야기의 낭독과 정지의 효과주기를 말한다. 트라우마의 연결을 끊고 해석을 해체하는 것은 주체의 재탄생을 허락하여 이후로 그 주체는 자신의 마음 지도와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된다.(142)

 

아렌트는 환상적 약속들로 이루어진 전체주의 프로파간다의 사이비-예언자적 조작을 규탄했다. 그래서 그녀는 내일을 약속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예측 가능성의 어ᄄᅠᆫ 섬이상도 아니고, 깨지기 쉬운 인간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들은 무엇보다도 아주 한정된 약속인바, 특히 조약이나 계약과 같이 그 안에 안전성의 확실한 이정표를 땅에 세울 수 있는상호적이고 계약적인 수행이다.(144)

 

용서와 약속과 함께 아렌트는 그녀가 본질적이고 비할 데 없는 공적 삶의 두 가지 조정 장치를 활성화했다고 확신한다. 일상적 삶의 이러한 냉혹한 장치들에 직면하여 용서와 약속은 사실 하나의 판단인데, 그것은 결정적으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보증이다.(145)

 

용서와 약속이 불러일으키는 어려움 중에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기독교적 용서와 약속이 발생한 급진적 외재는 정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믿음의 초월이라고 불렀다. 용서를 위한 사랑과 약속을 위한 입법을 일깨우면서, 아렌트는 인격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해 긴요한 아르키메데스점에 따라서 사고하는 것을 요구하는 일에 결코 몸을 사리지 않는다. 그녀는 지렛대의 지축을 신 또는 초월이 아닌 인간 다원성이라고 부르는데,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끌어들이면서 평화에 도달하는 칸트의 강화된 소통 가능성을 전유하면서 그러한다. 그녀는 여기서 둔스 스코투스의 묵인’, 니체의 아멘’, 하이데거의 내맡김의 정치적 버전을 발견한 것 같다.(148)

 

그녀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인간성은 확장된 정신과 상식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재질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언어와 동일시될 수 있다. 인간성과 언어는 아렌트 존재의 각색판이다. 언어는 미칠 수 없다. 이것이 아렌트의 생각이다.(150)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리 각자의 언어, 담화를 보살피고, 공동체 결속 자체를 보호하는 의무일 것이다. 우리의 예스아멘을 떠받칠지 모르는, 영원히 고정되고 미치지 않은 정체성 속에서 그것들을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일시적인 정도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인격의 일시적인 계시들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것은 계시에 대한 서약이 허락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언어, 인간성, 모든 정체성, 그리고 존재 자체도 숨겨져 있고’. ‘뒤로 물러나 있고’, ‘망각하고’, 또는 정도를 벗어나 있는것 이상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전제한다.(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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