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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기원, 북한의 체제, pp427-470.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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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북한의 체제

남한이 미국의 복제된 자유주의의 형식주의라 평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도 동유럽의 인민 민주주의의 일종으로 이해하려 했고 스탈린주의의 이식이자 응축된 형태’”(429)로 보면서 북한이 가진 정통성과 민족주의 이념을 거부되어왔다 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보는 시선이 일반적인 가운데, 로버트 C. 터커는 북한이 동유럽의 동독 유형과 일치하는 강요된 유형”(430)으로서 자생적이지 않다고 평가하였으며, 북한의 정치와 김일성주의스탈린주의의 동양적 경향의 끔찍한 과잉’(430)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스탈린주의 특징인 모든 인민 계급을 상대로 한 집단적 폭력이나 전형적인 대규모 숙청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없다’(431)는 것에서 위와 같은 견해에 반하는 모습도 보이는 듯하지만, 일반적으로 북한은 소련의 위성국이자 독자적 행동력이 없다고 평가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브루스 커밍스는 자신의 연구에서 이와는 다른 4가지 관점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 북한은 1940년대 후반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발전시켰다.
2)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경합했으나, 김일성에게 영향을 준 외국 사례는 중국이었고,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소련을 증오했다.
3) 북한은 동유럽 사례와 일치하지 않으며 소련에 복속된 나라가 아닌, ‘혁명적 민족주의 협의체에 가까웠다.
4) 북한은 모든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와 가장 달랐고 지금도 그러하며, 지도자의 역할부터 그의 자립적인 이념과 대외관계의 자주적 자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토착적인 정치 관행 요소를 극단적으로 다시 표출한 것이다.(432)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두 강대국 사이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하며 한국소련중국의 경험이 융합된 것으로, 한국의 정치문화가 모델로서 깊은 영향을 줬다.’(432)고 평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꼭두각시가 아닌 김일성주의체제가 자립한 것으로 봅니다. 북한에서 레닌과 스탈린에 대한 관심과는 상대적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독립적인 사상을 갖지 못했지만, 이후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분기점과 김일성 노선이 등장하게 됩니다. 김일성과 유격대는 혁명적 전위로 서술됩니다.

교재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한국의 독특한 상황, 이를테면 조직과 활동의 모든 방법은 한국의 구체적 역사 상황에 맞춰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지, 어떻게 김일성만이 외국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주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는지, 어째서 그 밖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는 대중과 접촉하지 않는 프티부르주아 당파주의자인지 그리고 왜 북한은 “통일되고 자립적인 독립국가”를 준비하는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지 등을 자세히 설명했다.(435)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닌 한국의 특수한 상황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실용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거부하였습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한국인도 최고 지도자는 영혼의 기술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강요가 아니라 모범적 행동을 보여야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그리고 바른 생각에서 좋은 사상이 나오고 그것은 지도자에게서 대중에게 전달되며, 대중은 전수받은 지혜를 반복해 숙달함으로써 그 가르침을 배운다고 여겼다. 이런 유교적 유산은 소련의 강령과 융합해 김일성을 일종의 자비로운 스탈린이자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대척점에서 심오한 관념론과 의지론을 주도하는 사상의 원천으로 만들었다.(436)

상의하달주의”(437)에 따라 남한과 북한은 관료화된 상부를 중시하는 정치 구조와 인민의 복종을, ‘급진적 인식론의 반영이 아니라 당이 바라는 바를 이행하기 위한 것’(438)으로 간부 중심의 엘리트주의적 성격을 보인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대중 정당

북한은 소련과는 다르게 광범위한 농민계급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당을 발전시켰으며, 그 권력의 중심은 김일성 세력으로 채웠다’(438)는 점, 사회주의 혁명이 발생하는 계급 구조가 아닌 나라로서 노동자민족자본가농민의 연합’(439)적인 노동자 정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일성의 한국적 방식은 소련이 좋아하는 형식을 채택했지만 실질적 측면에서는 그들을 배반’(439)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림1] 친소파 허가이, 1946년의 김일성(출처 : 위키피디아)

당 핵심인물 중 친소파인 허가이는 당에 농민이 너무 많은 상황에서, 당은 노동자계급이 기반이 되어야 하며 지주와 사업가들을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김일성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김일성은 자기의 추종세력을 통해 대중을 흡수하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계급적 배경 상관없이 당원이 되는 개방정책을 펼치며 계급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당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 충성으로 묶인 핵심층’(440)이 모이게 됩니다.

농민과 소시민 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에 소련의 반대를 불러오지만, 김일성은 대중 정당을 보유하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북한은 빈농을 포용해 그들을 프롤레타리아로 개조’(441)하며 빈농과 중농 중심으로 일본에 고난을 겪은 부농들도 혁명에 동참하게 하는 마오쩌둥의 생각와 비숫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1946년 후반 북조선노동당에 노동자보다 빈농들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였으며, 이들은 3분의 1이 문맹일 정도로 무지한 전위였습니다. 그럼에도 김일성의 개방정책으로 빈농에서 당의 세력으로 받아들여진 송용필, 김추숙, 김철금, 동학정 등의 빈농출신의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대중 정당”이라는 개념은 수백만 명의 빈농에게 그들의 부모는 거의 꿈꾸지 못했던 지위와 역할을 부여했으며, 그것은 김일성이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형성했다.(444)
김문식은 지식인이나 지주 출신이 많았던 남한 공산주의자의 좋은 사례다. 신분이 높았지만 학교나 사업에서 좌절한 그들은 지위의 하락이나 실제적 또는 가상적 억압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지적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내분을 지향하거나, 활동가일 경우 대중을 인내심 있게 조직하기보다는 도시 중심의 정치와 테러리스트의 폭력에 의하지는 쪽을 지향했다. …… 남한 공산주의자에게 이것은 김일성의 낮은 이론적 수준이 반영된 것으로 보였다.(446)

 

협동조합주의와 혁명적 민족주의

북한 사회주의에서 가장 큰 일탈은 체제를 통제하는 고위부, 즉 혁명의 진정한 전위를 구성한 핵심 지도층에서 나타났다. 조직 원리는 관료주의적 위계질서 대신 긴밀한 관계로 엮인 측근 집단 안의 개인의 충성심이었다. 그리고 그 집단은 방사형으로 끝없이 팽창하는 동심원의 핵심이 됐다. 그 개념은 합리적합법적이라기보다는 권위 의존적이었고, 관료적이라기보다는 유기적이었다. 핵심부를 서로 연결시킨 접착제는 항일 유격 투쟁의 권위를 지닌 개인들이었다. 이념은 혁명적 민족주의였다. 정치체제는 일종의 협동조합주의에 가까웠다. 그 결과 또한 민족적 유아론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것이었다.(447)

1946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후로 김일성에 대한 선전과 영웅화, 그런 김일성을 따르는 주요 지도자들과 단결 속에서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복종은 당과 대중 조직의 좋은 원칙’(450)으로, 김일성을 미덕으로 칭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447-450)

김일성에 대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인물로 표현하려는 의식적인 시도’(451)가 보여지고, 자애로운 우리 아버지’(451)이자, 미화적인 표현들은 그에 대한 충성존경의무의 맹세로 모든 사람을 결속하고 용기무용희생의 남다른 미덕을 심어주면서 권위적 정치가 시행됐으며, 그 정통성은 과장된 역사와 초인적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신화’(451)로 김일성은 모범적 존재로 묘사되면서 대중노선과 핵심 지도층 양성을 통해 권력을 형성해 갑니다.

김일성에 대한 이런 일종의 개인 영웅주의’(454), ‘유교적 대중노선’(454) 등의 흔적들과 함께, 중국과 마오쩌둥으로부터 모방적인 성격을 보이고, 가족관계가 공산주의에 침투하는 등 북한의 체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두드러지는 것은, ‘전체는 개인을 위하고 개인은 전체를 위한다는 단일주의상태이자 주체사상의 정신 상태 등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작가들은 “국체의 정신을 마음에 굳게 다져야 한다.”면서, 당신이 그것을 마음에 한번 체득하면 다른 모든 것이 따라올 것이라고 쉬지 않고 써다. 한국인은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주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 목표는 주체적이며 유아론적 정신 상태를 지니는 것이며, 올바른 생각을 먼저 하면 올바른 행동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 용어는 번역할 수 없다. 외국인에게 이 의미는 끝없이 멀어져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모든 요소의 바다로 빠뜨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이 단어는 한국인 이외는 이해할 수 없다.(456-457)

김일성에게서 보여지는 자주성과 민족주의적 자기주장은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통일되고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458)를 건설하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보장할 수 있는 부강한 나라를 건설”(459)해야 한다는 발언들이 문서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으며, 이는 소련이 철수한 1949년부터 원리로 채택됩니다.

김일성의 사상은 남한에서 우익의 이범석이나 안호상 등 극우 진영에 공감을 얻으며, 그 사상이 가진 특성이 완고한 한국 우선주의자이자 단호한 민족주의자라는 측면에서 일치’(461)하며, 한국을 단결시킨 이상이라고 서술합니다.

 

정치적 탄압

북한도 남한 우익처럼 정치적 반대 세력을 철저하게 제거했지만, 우월한 조직에 비해 반대 세력이 취약한 상황인 점, 또한 중축 공산주의처럼 정치적 반대파를 교육과 교정하는 정치적 관행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소집단 비판회와 자아비판 집단활동’, ‘정치 토론회, 학습 토론회’(461) 등 집회와 토론이 촉진되었고,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집단 소속과 집단 생활을 강조합니다.

김일성의 통일전선정책 아래에서 조선민주당, 청우당 등의 정당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실질적 권력이 없는 하부기관이라 할 수 있었고, 당의 민주화작업을 통해 조선민주당 소속의 지주와 친일파, 기독교 신자들이 비판하고, 조선노동당의 선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 이용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천도교 기반의 토착성을 보이는 청우당은 다른 대우를 받는 듯 보이지만, 청우당 또한 정권의 정책을 전달하는 기구적인 성격을 보였고, 1946년 언론의 자유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평양을 비롯, 북한의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모습을 보입니다. 북한의 지도층 숙청은 그들의 정권에 영향을 주거나 오래 지속되지 않고 대량 학살 사태로 이어지지 않는 특성을 보입니다.

 

경찰과 첩보

북한에서의 치안조직은 혁명적 정의를 구현하는 기구였으며, 철저하고 때로는 전면적인 통제와 감시가 이뤄지는 체제’(465),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였지만, 남한에 비해 폭력적이지 않고 숫자는 적었지만 북한에서 거대 조직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들은 정치 문제, 계급과 사상 조사, 도덕성 등을 감시하는 조직이자, ‘인민의 안내자로서 준법정신의 모범을 보여주며, 인민에 대한 봉사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와 맞서 싸우는 것으로 묘사됩니다.(467) 이에 대해 유교의 이상인 군자 같은 다양한 도덕을 갖추고 있었다.’(468)고 서술하면서 북한의 경찰에 요구된 사상적 측면을 보여주지만, 경찰 자체가 맡고 있는 정치적 통제와 감시, 비밀 정보망의 형성과 당 내부 지령의 전달 등의 내용들도 서술하고 있습니다.

지주, 관료, 자본가, 월남 친척이 있는 자 등이 감시의 대상이 되어, ‘반동 행위를 감시하고, 다른 당원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특이한 점은 경찰 자신도 감시 대상’(470)으로 북한 정권이 예외를 두지 않고 광범위한 감시 체제 안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이 정권이 옳다고 정의한 행동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대단히 강력한 침투력을 지닌 구조’(470)를 가진 체제였음을 설명합니다.

(미국인이라면 아무도 그런 체제 아래서 살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는 부분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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