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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기원2-Ⅱ, 적절한 간격, pp11-48.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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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506월의 서곡>

12장 적절한 간격: 미군 철수, 38도선 일대의 전투, 유격대 진압

미국과 한국 우익의 역사에서 맥아더는 한국의 영웅이고, 애치슨은 유럽에 집착하여 공산 세력에 공격의 기회를 제공한 평가에 대해서 진실은 그 반대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오히려 미군 철수를 밀어붙인 사람이 맥아더와 국방부 관료들이고, 미 국무부는 이승만 정권의 안정화를 위해 철수시기를 늦추려 하지만 결국 압력에 미군 전투부대가 1949년 철수합니다. 미국이 이승만 정부군의 작전 지휘권을 보유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변 동맹국과 적국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야 했고, 애치슨은 어려운 방어와 억제 계획’(14)을 고안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의 입안 이후, 미국 군대는 점진적으로 철수하고 이후 군사 및 경제고문을 통한 원조의 간접적 방식을 통해 공산주의를 견제하려 합니다. 특히 미 국방부의 일본 우선주의자’(14)인 철수 주요 지지자들의 맥락에는 일본에의 자원의 투입이 목적이었고, 일본의 재건을 통해 한국에 미국의 권한을 행사하는 구상을 보입니다.

이에 19483월 한국에서 선거 이후 미군의 철수를 육군성이 국무부에 전달하였으며, 이승만 정권의 수립 이후 미군정의 종료와 미군 철수의 시기를 타진하다가, 5차례정도 미뤄지면서 19496월로 미뤄지게 됩니다. 여기에는 194810월의 여순반란 및 남한군의 능력부족, 북한에 대한 우려 등울 복합적으로 고려한 미 국무부의 생각이었습니다. 거기에 무초도 한국군의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군 철수를 지연시킵니다.

북진과 군사력 강화를 주장하는 이승만의 요구에 19495월 예정된 시일보다 빠르게 철수하려 했지만, 무초가 이승만에게 북한에 대한 공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며 6월 말로 철수가 미루어지게 됩니다. 당시 미군부는 북한의 위협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평가하는데, 1949년 초반 합동참모본부와 CIA는 미군 철수 이후 북한의 침략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하고, 소련의 지원 없이도 남한이 정복될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미군 전투부대가 1949629일 인천항을 떠나며 남한에는 주한 미군 군사고문단과 김포공항을 운영하는 미국 공군 요원을 포함 650명이 남고 주한 미군은 해산됩니다. 미국은 15개 정보기관과 위원회를 유지하며 한국을 주시하고, 육군성도 북한의 침공을 방어하도록 권고합니다.

철수를 반대했던 이승만은 외교와 군사의 이원전략’(17)으로 미국을 개입시키려 하면서, 한국-대만-필리핀 등을 아우를 나토와 비슷한 기구인 태평양 협정을 만들고자 하지만 진전되지 못합니다. 이에 이승만은 전쟁을 도발하고 38선 일대 대규모 전투를 일으켜 미군이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켜야할 필요성을 확신시키는 전략을 선호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평가로 공포심을 감추려는 허세(호주)’, ‘집단적 과잉 반응(CIA)’, ‘공황 상태에 가까운 위기(무초)’, ‘정신착란의 절정(북한)’이라는 주변의 평가가 흥미롭습니다. 이승만은 38도선 일대에서 충돌을 일으키라고 군 지휘관들에게 지시합니다.

1949년 여름 옹진과 개성에서 일어난 전투를 한국군이 일으킨 것이며, 북한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미군 철수를 실현하기 위해 반격을 자제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미군이 철수한 19506월까지의 1년의 시간, 미국은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방어를 위한 극비 계획을 준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로스 정이라는 인물의 첩보 예시를 들며 당시 시기의 미국 철수를 둘러싼 내외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봉쇄선 위의 한국

철수 뒤에 남겨진 미국 군사고문단의 규모는 그리스나 터키에 비해 큰 규모였으며, 트루먼 독트린의 봉쇄 정책을 수행하게 됩니다. 대만에는 군사고문단을 보내지 않은 판단에는 섬의 방어가 무너질 것을 우려했으며, 한국의 군사고문단의 의미는 미국의 군사적 방어를 보장하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트루먼와 애치슨의 의도를 해석하고 있습니다(21). 애치슨의 생각에는 한국에의 침략은 곧 유엔 체제에의 도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발언한 내용도 서술되어 있습니다. 남한의 국가 수립이 가지는 의미는 공산화에 대한 미국의 세계 규모의 봉쇄의 일환으로 지지되어 왔음을 보여줍니다.

 

제한전과 전면전

“지금까지 쓰인 연구 문헌들은 전쟁 이전 한국에서 미국이 행사한 억제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혼란을 겪고 있는데, 제한전과 세계전의 상황을 구별하지 못했고 한국전쟁의 기원이 내전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 내전이라는 상황에서 행사한 억제력의 구체적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2)

미군의 장비가 한국 부대가 북한을 공격을 유도할만큼 비축하지 않았고, 전면전의 가능성이 보인다면 새로운 군사 원조 계획이 아닌 미 8군의 비축 분량을 제공하는 방안을 살펴본다면, 미군의 의도는 적과 자기 편 모두 봉쇄’(22)하고 싶었으며, 전면전이 일어나는 상황을 곤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공격의 대응은 세계규모의 전쟁과 유럽 방어를 위해 미군을 이동해서 배치하는 스윙전략을 고려하는 수준에서 일본을 방어하는 수준 정도였음으로 보입니다.

내부적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이 미국 전략의 유연성을 주장한 반면, 보수 세력은 승리를 강조하는 전략적 차이에서 제한적인 군사적 대응이나 전면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케넌은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긴급 배치군의 유지를 통해 해외 거점을 확보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동력을 강조하며, 제한적인 군사적 능력의 사용을 통한 전략을 강조합니다. 반면 군부는 폭탄 사용’(24)이라는 세계 규모의 전쟁과 전면전을 전제로 생각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상황에서 애치슨은 케넌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국방부의 전면적 전략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정치적 문제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림1] 딘 애치슨, 애치슨 라인(출처 : 위키피디아)

 

194938도선 일대의 전투

 

19495월부터 10월 사이에 38도선 일대에서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수백명이 죽었지만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쟁의 기원이 내전에 있음을 저자는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49년의 전투가 50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1년의 차이는 북한이 전쟁에 대한 준비가 되었는지의 여부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1949년의 전투를 한국전쟁의 대부분의 역사서술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전투의 책임을 북한으로 돌리고 남한은 위협할 의도와 능력이 없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 한국 전문가가 이승만의 북진 이야기를 군 지휘관들이 뒤에서 웃고는 했다는 일화가 이런 한국 내부의 서술의 경향성을 확증합니다.

하지만 기밀 자료에서의 내용에서 보면 한국은 미군 철수 이후 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미군이 주둔하기 위한 상황을 만들고자 했으며 특정 인물들에 의해 부추겼다는 G-2의 연구 내용을 언급합니다. 38도선의 분쟁에는 남한의 치안부대가 개입되어 있으며 이승만은 미군 철수 시점에 군대를 증강하고 8월 말에 약 10만의 군대를 보유하며 당시의 북한 병력보다 많았다고 추정됩니다. 이런 경향에 맞추어 북한도 병력을 증강하고 중국에서 병사를 귀환시키는 등 19506월 시점에 95천명 규모로 보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군대는 일본군 복무자, 북한에서 피란온 장교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세력을 지지하는 반공세력을 구축하는 것으로, 당시 중국 국민정부군과 전투에 참여한 민족주의자를 배제했다는 평가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승만의 군대에는 서북청년회 출신인 백선엽, 백인엽 형제, 양국진, 김석범, 그리고 동북파의 정일권 등 당시 만주군에서 복무한 30대의 젊은 장교들이 주요 세력이었습니다.

서북청년회의 군사적 도발, 방첩부대인 대한관찰부의 공작원 파견 등으로 북한에 침투하는 등 분쟁을 일으키는 반면, 북한은 여순사건 동안 38도선을 조용하게 유지하는 등 미군의 철수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이후 전투에 통일정책을 융합하면서 19506월 전조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림2] 옹진-개성-철원 위치와 당시 38도선(출처 : 구글어스, kknews.cc)

 

194954일 개성에서 4일간 교전이 이어지며 북한군 400, 민간인 100, 남한군 22명이 사망한 전투가 벌어졌고, 당시 남한 보병 중대 6개와 몇 개의 보병 대대가 투입됩니다. 몇 달 뒤 북한은 당시 남한 제1사단장 김석원(가네야마 샤쿠겐,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관동군에서 김일성을 추적한 인물이며, 일왕 훈장도 받음)이 이끄는 부대가 북한을 공격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월북한 한국군 8연대 1대대, 2대대 소령 표무원과 강태무의 대담의 기록에서, 김석원이 일제의 주구이자 악명 높은 사람이며, 6사단장 김백일(가네자와 도시오,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 친일반민족행위자)이 일본군 특수부대를 지휘했다고 주장하는데, 남한 군대의 핵심인 두 인물이 19495월의 사건이 개입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림3] 김석원(1955년 사진), 김백일(1946년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38도선을 기준으로 수킬로미터를 오가는 남한과 북한의 군대 전대가 이어지고, 당시 전투가 일어난 옹진반도 지역에 626일 유엔 한국위원회가 대표단을 보내어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당시 보고서에는 소요의 원인이 북한의 침입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 유엔 한국위원회가 한쪽 편을 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그들의 앞에서 상황 보고를 한 인물이 김석원, 예편 이후 고등학교 교장, 5대 국회의원 역임, 친일반민족행위자)

그리고 6, 서북청년회회원이자 한국군 장교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되는데, 미국과 영국 자료에서 이승만이 암살의 배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김석원을 필두로 이승만의 북벌 지시에 따라 북한을 공격한 기록들이 남아있으며, 38도선 이북 돌출지 지역에서 지속적인 전투가 벌어집니다. 81일 옹진지역에서 남한군이 북한군 영토인 은파산을 공격하고 84일 북한군이 야포와 박격포로 반격하여 산을 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한이 완패하고 2개 중대가 전멸하고 수백명이 사망합니다.

미군 군사고문단의 기록, 무초와 국방장관 신성모와 이승만의 대화 기록 등을 보아 당시 남한의 북한 공격과 이를 주도한 김석원에 대한 평가, 로버츠 미국 대사의 군사고문단 철수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한 군부에는 북진에 대한 의견이 확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방장관 신성모와 미국은 자제를 촉구하지만, 남한 군부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고 9월에도 옹진 지역을 공격하여 공장과 시설을 파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국방부 군사정보 책임자 르로이 S. 어윈 소장이 919일 북한의 직접적인 군사 침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이 서울에 도착하여 남한 정부의 도발을 주시고, 북한의 공격 사태를 피하려고 합니다. 9월에 유격대 활동이 증가하고 충돌이 지속되며, 1014일에는 북한이 은파산을 목표로 남한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징후가 가속됩니다.

북한에 만주 귀환병이 투입된 조선인민군 부대가 배치되고, 소련에서 중화기가 도착, 전차부대의 이동 등이 관찰됩니다. 이 시기 즈음 김석원이 경질되고 12월 중순까지 일시적인 평온이 유지되지만, 김석원을 대신한 백인엽 중령이 웅진 은파산을 재공격하는 등 전투가 발생합니다. 충돌 사태에 미국은 해군 기동부대를 한국에 입항시키고, 무초와 애치슨은 내전 억제를 위해 이승만에게 권고합니다. 당시 미국의 전략이 한국군의 돌출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한정적인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봉쇄 전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옹진 지역을 둘러싼 전투를 두고 이승만과 한국군 내부의 북진의 의도와 미군 주둔을 위한 과정의 내전들이 이미 발생한 상태였으며, 1945년부터 내전의 시작이 정규군간의 전면 충돌로 빗어진 1949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유격대 문제의 최종적 해결

잠시 38도선이 잠잠해지자 이승만 정권은 후방 안정을 위해 유격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로버츠도 미군 보병 장교를 파견해 한국군과 협력하여 유격대를 소탕할 것을 요구하면서, 유격대 섬멸을 위한 기동부대가 태백산, 지리산, 호남에 설치되었고 김백일 대령이 이를 이끌게 됩니다. ‘대규모 유격대 토벌 군사작전’(39)이 미군의 입안 하에 진행되고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유격대와 좌익 활동 세력을 목표로 유격대와 전투가 벌어집니다. 100명 이상 규모의 유격대와 충돌이 잦아지고, 대규모 토벌 작전이 벌어지면서 이승만 정권과 한국군은 촌락을 파괴하고 유격대에 협력한 마을과 주민들을 잔인하게 공격’(41)하는 등의 무질서한 파괴 활동을 벌입니다.(이를 미국인 고문이 전형적 사례로 평가했다는 부분이 이제는 놀랍지 않습니다.) 이를 오히려 유격대가 자행한 학살로 보고하는 등의 거짓보고, 유격대 토벌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신체 일부를 잘라서 보고하는 행위, 촌락의 파괴와 주민 살해 등의 만행이 벌어집니다.

194910월부터 이뤄진 토벌에서 약 5~6천명의 유격대가 살해(이정도 규모를 신뢰할 만한 수치로 보고 있음)되고, 사로잡힌 유격대 및 좌익 의심자는 고문으로 전향을 유도하고, 보도연맹을 통해 지역에서의 활동을 감시합니다. 이런 방식은 일본 식민지 시대 헌병대의 전향 방식으로 일제의 분할통치 방법 가운데 가장 증오스러운 것으로, 본질 자체는 사악하지만 저항 세력 내부에 쓰라리고 지속적인 균열을 내는 데는 효과적’(43)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월북을 시도하는 빨치산들을 돕기 위해 북한에서 정예 유격대 수백명이 침투되기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제주 유격대 지도자 김달삼이 이끄는 부대가 전원 사망하거나, 일부는 월북하거나, 북한에서 투입된 유격대와 같이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김백일의 6사단과 유재흥의 8사단이 이 유격대들을 궤멸시키는 성과를 거둡니다. 이에 따라 유격대의 활동이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한 공산주의 지도자인 이승엽은 유격대 활동의 실패에 대한 원인으로 겨울을 나는 고통, 남한 군부대의 대대적 토벌 작전, 촌락의 파괴와 마을의 소개, 호남지역에서의 유격대 활동의 지리적 어려움 등을 들면서 유격대 손실의 피해를 변호하려 했고, 김상룡은 미군이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19503월 즈음 유격대의 패배가 보이고 이는 지도층 균열로 이어집니다.

유격대가 1949-1950년의 동계 공세에서 큰 타격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지방 유격대 활동이 근절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계 공세 이후 유격대 진압 작전은 경찰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상기의 19496월을 전후로 하는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미군 철수, 남한군의 38도선 도발과 공격, 이승만과 장제스의 회담, 이승만과 이범석의 북진 주장, 유엔 한국위원회 조사관의 한국 편들기, 북한 원정군의 귀환, 중전차 부대와 중화기 부대의 남쪽 배치, 남한 내 유격대 진압 등 이런 과정에서 미국 내부의 전략노선의 차이로 인한 봉쇄전략과 반격노선의 대립 가운데, 19506월의 전쟁은 이런 사건과 세력들이 망라된 과정의 결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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