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장 살해와 제사.hwp

 

2017.06.21.

조류쥬 바따이유/에로티즘 7-13/낭만쌤

 

7장 살해와 제사

 

제물을 바치는 제사행위도 살해금기의 위반이라는 점에서는 전쟁과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은 명백한 종교적 행위이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헌물을 전제한다. 피가 필요한 제사인 경우에는 동물을 희생시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을 희생물로 바치는 일이 끔찍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는 동물은 대체 희생물이 아니었다. 가금 사육 시대 이전의 원시인간의 눈에는 인간과 동물이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동물은 금기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보다 신성하게 보였다.(88) 신성이란 폭력과 저주에 거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원시인들은 동물도 금기의 근본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의 생각에 동물은 절대자처럼 의식적으로 금기를 위반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동물을 죽이는 일은 온통 폭력만을 난무하게 하는 폭력의 극치였을 것이다. 그렇게 신성의 위치를 획득한 폭력은 희생물을 신격화 시켰을 것이다.(89) 금기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다. 인간에게는 금기의 충동 외에 위반의 충동이 있다. 바로 그 위반의 충동에 의해 동물과 가까워진다. 그러나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은 인간에게 그런 동물적인 성향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의 얼굴 대신 동물의 탈을 씌워 그 뒤에 숨곤 했다.(90) 동물적 신성은 요지부동의 금기 가운데 어떤 제한적인 위반이 저질러졌을 때 현현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성에 동의할 때 위반의 세계에 돌입하는 것이다. 위반정신은 죽어가는 동물신의 정신이다. 그 신의 죽음은 인간에게 부과된 금기로서는 제한이 불가능한 폭력을 야기시킨다.(91) 갓 태어난 그 세계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세계는 자연과 신성이 뒤섞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에 의지하면 그것은 쉽게 이해될 수도 있다. (92)

 

금기에 대한 번뇌는 원시 인간들로 하여금 생의 맹목적 충동과 그것에의 거부-물러섬-사이를 방황하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생은 생식과 죽음의 방대한 움직임이다. 그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원시인은 죽음과 생식을 거부하는 금기를 두기에 이른다. 결국은 거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었지만. 삶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방황이며, 낭비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어떤 것을 기꺼이 원하기도 한다.(93) 힘만 있으면 우리는 곧 낭비하고 위험에 몸을 내 맡긴다. 그 과정에서 부단히 위험에 직면한다. 현대의 탐정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94) 제사 의식은 일정한 날에 거듭되는 신화(신의 죽음)를 재연하는 것이다. 고통의 놀이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가장 큰 고통, 즉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원하는 이유는 마침내 죽음과 폐허 너머에서 그것의 극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면서부터는 동물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는 고통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동물을 희생시키는 대신 인간을 희생시키곤 했다. 그리고 확고한 문명이 들어선 뒤부터 인간을 희생시키는 일이 야만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다시 동물을 대신 희생시키기 시작했다. 그 후 이스라엘 족들의 피의 제사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기독교도들은 상징적 제사밖에 치르지 않았다.(96)

 

8장 종교적 제사에서 에로티즘으로

 

오늘날의 제사는 고대의 제사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의 십자가가 아무리 강하게 작용한다고 해도 피를 직접 보는 제사와 미사의 공물이 동일하게 느껴질 수는 없다. 문제는 기독교가 규칙 위반을 혐오한다는 데에 있다. 십자가의 희생은 위반의 성격을 변질시켰다. 기독교는 위반의 신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한다.(97)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의도된 위반이다. 희생자는 죽음에 처해진다. 희생자는 죽음에 의해 돌연 연속성에 이르며, 그의 개별성은 사라진다. 이제 희생물은 한계를 벗어나 무한 절대의 신성의 세계에 돌입한다. 욕망하는 대상(희생물)의 옷을 벗기고, 그 안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고 싶은 사람의 행위가 의도적이듯이 제물을 바치는 행위도 의도적인 것이다.(98) 남자가 여자를 덮칠 때 여자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존재를 빼앗긴다. 하지만 곧 성적 유희에 몸을 맡기며 남자의 비인격적 폭력에 몸을 연다. 당시 고대인들에게 이런 분석이 가능하지는 않지만 제사의 경건성과 에로티즘의 충일의 유사성을 감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폭력을 통해 존재의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의지와 종교적 제사가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독교는 박탈해버렸다.(99) 제사 의식은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을 일치시킨다. 삶은 죽음에 이어져 있으며, 죽음은 삶의 표상이자 무한에로의 열림이다. 제사 의식에서는 혐오감과 역겨움이 극복된다. 애정 행위와 제사 행위는 육신을 드러내는데 공통점이 있다. 규칙적인 삶을 살던 동물의 생명을 발작시키는 것이 제사다. 성적 발작도 마찬가지다. 의지가 자리를 비우면 성적 충동은 한계를 넘는다. 육신은 기독교적 금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는 천성적인 적이다. 끊임없이 위협받는 성적 자유를 그것으로부터 되찾으려는 것은 육신이다.(100) 성금기가 있다면 그것도 어떤 폭력적인 요소에 대한 금기일 것이다. 파열과, 그 파열이 몰고 오는 폭력이 에로티즘의 근본임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101)

 

9장 성적 팽창과 죽음

 

에로티즘은 전체적으로 금기의 위반이며, 인간적인 행위이다. 에로티즘은 동물성이 끝나는 데서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동물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에로티즘에 대한 우리의 내적 체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동물의 성적 기능을 자료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102) 생명은 무능하지 않은 한 에너지를 끌어 모아서 새로운 한 단위를 잉태시키든지, 또는 순천한 허비를 위한 허비를 한다. 생식도 생장의 한 형태다. 유기체의 무돈 세포들이 그렇듯이 생식선도 분열한다.(103) 사랑의 애정행위도 생장의 한 형태이다. 그런데 생장이 우리를 초월하는 어떤 존재나 총체를 위한 생장이라면, 이때의 생장은 생장이 아니라 헌신이다. 헌신은 주는 것이다. 자신의 생장을 포기하고 총체의 생장을 위해서 온통 자신을 바쳐야 한다.(104) 팽창은 존재를 차츰 분할시킨다. 분할의 위기는 팽창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분리는 아니다. 팽창은 존재를 안정과 휴식의 상태에서 격렬한 동요의 상태로 변하게 한다. 동요는 마침내 분할의 폭력을 부르며, 존재의 불연속성은 거기에 기인하는 것이다. 분할이 완료되어, 두 존재가 완전히 구분되면, 존재는 다시 안정을 되찾는다. 세포의 팽창은 이렇게 하나의 개체가 위기를 맞아 새로운 두 개의 개채를 창조해내기에 이른다. 세포 a는 새로운 세포 a에도 a′′에도 살아남지 못한다. 분할된 바로 그 순간 a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죽은 것이다.(105) 세포의 팽창은 창조적인 죽음으로 끝난다.(106) 해골은 수백만 년 보존되기도 한다. 유성생식체인 인간이 자기 안에 어떤 불연속의 원칙인 불멸성이 간직되어 있다고 믿는 이유다. 인간은 육신의 부활을 상상한다. 그런 상상은 눈에 보이는 흔적을 과장하는데서 오는 결론이다. 그러나 무성생식이든 유성생식이든 연속성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유성생식의 경유에도 생식세포의 분열을 무성생식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세포분열의 과정에는 언제나 연속성이 개입함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유성생식에서는 암수 세포가 결합한다. 잃어버렸던 연속성을 되찾은 암수 생식세포들의 결합은 근본적인 존재의 연속성을 계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106)

 

불연속성이라는 술책이 생식세포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자웅의 결합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물이 성적 열병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에는 오히려 고립이 극에 달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순간, 죽음과 고뇌의 두려움이 극복되는 것이다. 개체성이 소멸하면 동화는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을 과학적 관찰에 의하면 동물의 반응은 생리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미세한 생물체라고 내적 체험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즉자적 실존에서 대자적 실존으로의 추이는 복잡한 동물이나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아에 대한 의식은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의식이지만 자아에 대한 느낌은 모든 존재가 느끼는 느낌이다.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고립감과 자아에 대한 느낌은 비례한다. 성행위는 외적으로 감지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아에 대한 느낌을 잃게 하며, 위기에 빠뜨린다. 이 위기는 객관적 사건이 내부에 일으키는 위기이다.(108) 위기의 외적 징후는 팽창으로 나타난다. 이어 팽창하던 개체는 죽음을 맞는다. 유성생식에서도 성기를 자극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과잉 에너지다. 단순 생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성생식체의 경우에도 과잉은 죽음을 부른다. 다만 금방 죽음이 오지는 않는다. 과잉과 죽음이 직결되지는 않지만, 절정에 이른 후의 실신은 하나의 조그마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잉은 죽음을 초래하며, 존재의 불연속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침체뿐이다. 개체간의 경계를 지워 없애려는 충동과 불연속성을 유지시키려는 침체는 숙명적인 대립관계에 있다.(109)

 

존재는 어떤 시련에 부딪히게 되면 내적 체험을 한다. 그것은 위기이다. 그 위기는 연속성 속에서 불연속성으로, 또는 불연속성에서 연속성으로의 추이과정에서 발생하는 존재의 위기이다. 에로티즘은 출산을 의식하지 않는다. 희열이 크면 클수록 그 결과 태어나는 아이 생각은 덜 하게 된다. 에로티즘의 막바지에 이르러 겪는 경련은 하나의 조그만 죽음이다. 성행위 중 상대방은 연속성의 가능성으로 제시되며, 빈 틈 없는 개체의 불연속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파고든다. 팽창과 폭력은 일단 둘은 서로 부정하게 한다. 그러다가 비록 순간적이나마 하나로 결합되어 연속성의 흐름을 맛본다. 두 존재가 성적 결합을 통해 자아를 잊고 잠시 위기를 함께 겪을 뿐이다. 발작이 지나면 각자의 불연속성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성행위는 가장 진하면서도 가장 의미 있는 발작인 셈이다.(112) 성금기의 특징 중의 특징은, 그것은 위반에 의해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쾌락을 야기하는 동시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 금기이다. 에로티즘은 본질은 성적 쾌락과 금기의 풀 수 없는 엉킴에서 얻어진다. 애초의 충동은 자연적 충동이다. 인간의 성행위는 근본적으로 금기라는 점에서 동물의 성행위와 구별된다. 에로티즘은 넓게 보면 조직된 행위이며, 조직적 행위인 한,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에로티즘은 결혼이라는 위반을 통해 그 의미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118)

 

10장 결혼, 향연, 위반

 

결혼의 역설은 침해를 예상하고, 그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결혼 규칙에 내재한다. 희생양의 살해가 금기인 동시에 의식이듯이, 결혼 첫날 밤의 성행위는 허락받은 강간이다. 대개는 결혼을 앞둔 여자를 처음 범할 사람을 지정한 사람은 사제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에게 그러한 일을 맡기는 일이 기독교 세계에서 더 이상 용납되지 않기에 이르렀다. 봉건영주에게 낙화권이 주어진 것은 바로 그래서다.(120) 결혼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혼이란 습관이고, 습관은 강도를 약화시키곤 한다는 데 있다. 두렵던 첫 접촉의 기억이 사라진 후에 계속되는 반복적 성행위는 더 이상 아무런 위험이 없는 그것이다. 반복과 의미의 부재, 이것들의 상관관계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습관은 초조한 상태에서는 음미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닌다.(121) 반면, 성생활이 습관에만 그친다면, 변칙과 동요가 가져다주는 에로티즘의 희열을 더 이상 연장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결혼이라는 틀은 폭력을 억압하며, 거기에 거의 배출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러한 억압의 살에 위반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축제이다. 축제는 결혼을 벗어난 위반의 기회를 부여하는 동시에, 정상적인 생활과 질서를 되찾을 수 있게 한다. 성충동을 억압하는 금기를 은밀하게 벗어나는 주연도 일종의 축제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축제보다는 덜 무질서하다. 디오니소스의 축제에서는 위반이 회원에게만 국한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에로티즘을 넘어서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다. (122)

 

술을 마시면 한계를 넘어서보려는 힘이 솟구친다. 축제가 노동의 삶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주연(酒宴)은 전적인 전복의 신호였다. 농경제 사회에는 주연이 있었다. 주연 중에는 주인이 노예 노릇을 하고, 하인이 주인의 침대에 눕는 등 사회질서가 완전히 전복되었는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농경제 사회에서의 주연은 성적 도취와 종교적 법열과 다를 것이 없었다. 주연은 아무리 무실서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동물적 성행위를 초월한 에로티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주연은 성의 범람을 신성에까지 이르게 한다. 초기의 제의적 무녀들은 광란의 극에 달하면 아직 젖먹이 어린아이들을 산 채로 뜯어먹었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면 무녀들은 아이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젖을 주어 기른 염소를 산 채로 잡아먹었는데, 그것은 바로 신성모독을 위한 행위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123) 그러한 충동은 인간의 생명력이 팽창할 대로 팽창할 때 발동한다. 금기에 의해 갇혀 있던 존재의 옹색한 고립과 죽음의 폭력을 향해 문을 열고 서로 뒤엉키는 이 거대한 무질서는 대립적이다. 주연의 무질서는 아예 처음부터 종교적 몰입으로 시작한다. 보잘 것 없는 인간조건을 뛰어 넘어 존재케 하는 이 거대한 주연의 회오리는 농경사회인들에게 당연히 신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필자의) 해석과는 정반대로 고대인들의 주연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의하면 주연은 주술적 행사였다. 주연이 비옥한 토지를 기원하는 행사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124) 노동은 세속의 세계와 신성의 세계를 갈라놓았다. 노동은 다름 아닌 금기의 원칙으로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게 하는 결정적인 조건이다. 금기에 의해 저지당하던 폭력이 신성의 세계에서는 어느 순간 폭발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단순한 폭발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폭력은 동물의 폭력을 초월한다. 그것은 종교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 인간 사회의 노동원칙과 인과질서에 결국은 통합되기 때문이다. (125)

 

11장 기독교

 

고대인들의 인간적인 반응은 오늘날의 인간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원시인의 수치심과 우리의 수치심은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지언정 강도의 차이는 없다.(128) 주연을 휴식의 일환으로 볼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주연은 전체적으로 볼 때, 무질서와 폭력이며, 종교적 열병과도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축제가 표면이라면 주연은 이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면은 전복의 힘으로 나타났다. 엄청난 융합의 조장하는 주연에서의 폭력은 종교에서나 가능한 에로티즘을 가능케 할 정도였다. 기독교는 위반 정신을 부정한다. 기독교의 근원적인 위반충동은 연속성에로의 욕구로 표현될 수 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아무런 계산 없는 사랑을 지향했다. 잃었던 연속성을 신에게서 되찾으려고 했다. 신적 연속성에 의해 신 안에서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 승화될 수 있었다. 그렇게 초기의 충동을 벗어난 기독교는 정반대 방향의 길, 즉 폭력을 초월하는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129) 기독교의 신은 연속성이라는 무서운 감정 위에 우뚝 서 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의 초월은 조직적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조직성은 노동에 근거하는 동시에 불연속성에 기인한다. 인간은 존재의 본질이라고 느껴지는 잃어버린 연속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과 함께 불연속적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불연속적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상상해낸, 죽음조차도 침해가 불가능한 불연속성이다.(130) 기독교는 신성을 창조신이라는 하나의 불연속적 인격체로 변형시켰다. 게다가 기독교는 이승을 저승에 연장시켜, 저세상을 불연속적 영혼의 세계로 환원시켰다. 그럼으로써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 신의 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제멋대로 분리하고 갈라서 영원한 파편으로 구천을 맴돌게 했다.(131)

 

종교가 아직 우상 숭배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는 위반 그 자체가 신성이었다. 불결한 쪽도 순결한 쪽 못지않게 신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에 의해 불결이 배척되었다. 신성이란 죄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음에도 기독교는 죄를 배척했던 것이다. 그렇게 밀려난 불순한 신성이 불경의 세계가 되었다. 악마는 원래 신의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유대 신화의 연장인 기독교 세계)는 위반을 더 이상 신성으로 취급하지 않고 타락으로 취급했다. 악마는 이제 타락한 신이었다. 원래 불경이란 신성의 불경한 사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에서는 신성의 세계와 불경의 세계의 원래적 대립이 배변에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는 신성(神性)을 의미하던 신성(神聖)도 선한 삶 또는 신을 섬기는 삶을 지칭하기에 이르렀다.(133) 교회는 엄격한 논리를 중시했다. 교회는 경계선을 그어서, 교회가 신성하다고 판단하는 것만을 신성으로 간주했으며, 그 외의 것은 악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세계를 그렇게 분리시켜 버렸다. 에로티즘, 불순, 악마 등도 불경의 세계와 분리되긴 했지만, 기독교처럼 분명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었다. 이교도들은 불순한 것은 불순하게 보는 동시에, 그 앞에서는 형식적인 태도를 지녔다. 그러나 단죄 받은 이교도, 즉 기독교는 불순을 더 이상 형식적 태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135)

 

에로티즘의 변천과정은 불순의 변천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에서는 에로티즘의 일차적 특징, 즉 에로티즘의 신성을 사라지고, 오직 종족 보존의 요구만이 강하게 드러난다. 에로티즘을 개인적인 쾌락에 머물지 않고 신성의 의미를 획득케 하는 주연은 교회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136) 교회는 전적으로 에로티즘을 반대했는데, 그것은 혼외정사를 불경으로 보는 데에 기인한 것이었다. 초기의 종교 세계는 불순과 폭력이 배척되거나, 엄격히 단죄되지는 않았었다. 중세 또는 근대 초기의 밤의 향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창의성의 원칙은 신성모독이었다는 것이다. 신성에의 접근은 죄악이며, 죄악은 곧 불경이다. 관능은 본질적으로 위반이었으며, 공포의 극복이었다. 따라서 그 공포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서 얻어지는 환희는 그만큼 더 컸다. 문제는 언제나 금기 저편에 이르는 일이다.(138) 의식 절차를 통해서 금기의 제방을 거두면, 불경이 가능해진다. 엄청나게 자유로운 불경의 문이 열린다는 말이다. 의식적인 절차를 거친 불경은 무한을 향해 열릴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때로는 무한의 풍요를, 때로는 비참을 향해 열린다. 그리고 이어 탈진이 오고, 죽음이 온다. 교회는 이러한 위반과 에로티즘에 깃든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은 교회가 떠받드는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본원적인 불안의 요소로 작용하던 악마와 불순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교회는 더더욱 신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어 버렸다. 반면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은 더 이상 죄악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에로티즘은 이제 더 이상 과실이 아니었다.(139)

 

12장 욕망의 대상, 매음

 

주연이란 에로티즘의 신성한 측면이다. 거기에서 존재들이 고독을 초월하여 연속성을 가장 명확하게 얻어낸다. 하지만 주연은 필경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연이 최고조의 달하면, 개체성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142) 에로티즘의 최종적인 의미는 경계의 제거와 상호 융합에 있다. 그런데 주연에서는 욕망하는 대상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는다. 주연에서의 충동은 어떤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충동이다. 그와는 반대로 평상시의 성적 자극은 어떤 객관적인 특별한 요소에 의해 유발된다. 에로티즘은 욕망의 대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더라도 욕망의 대상과 에로티즘은 구별해야 한다.(143) 평상시와는 다른 알몸은 일단 부정(不淨)의 의미를 갖는다. 반면 알몸은 결합의 순간을 고지한다.(144) 에로틱한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몸치장을 허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매음이다. 그러한 몸치장은 공격하기 위한 몸치장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의 공격을 기다리는 몸치장이다.(145) 결혼한 관계에서 행해지는 위반은 더 이상 에로티즘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매음의 경우는 달랐다. 매음에서는 매춘부가 위반에 바쳐지는 봉헌식이 있었다. 매춘부의 온 생애는 금기를 범하는 데에 바쳐지는 것이었다. 기독교 이전의-또는 기독교권 외의-종교 세계는 매음을 반대하기는커녕 그것도 하나의 위반으로 보았으며, 그래서 거기에 일정한 양식을 부여했다. 축성된 장소에서, 신성과의 접촉을 유지한 채, 매음하는 매음부들은 사제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신성을 부여받았다.(147) 인도의 사원에서는 아직도 돌에 새겨진 에로틱한 현상을 많이 볼 수 있다. 인도의 사원들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외설들을 경건하게 부각시켰다.(148) 극도의 비참에 빠지면 더 이상 위반의 개념을 사라진다.(149) 천박한 매음이 다다른 상황과 기독교적 상황은 상호 대립적인 동시에 상보적이다. 기독교가 끔찍하고 불결한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오직 신성의 세계만을 빚었다면, 천박한 매음은 기독교 세계가 배척한 불경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150)

 

13장 미에 대하여

어떤 대상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것은 간절한 욕망의 표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158) 인간은 동물성에서 멀 때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인간의 동물적인 부분을 혐오한다. 하지만 미의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으며, 거기에는 잡다한 다른 요인들이 끼어들 수 있다. 동물 같지 않을수록 여자의 아름다움은 돋보이지만 어떤 여자가 아주 끈끈하고 은밀한 동물성을 암시하거나 예고하지 않는다면, 그 여자는 욕망의 대상으로서 금방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동물성이 깃든, 부정적인 아름다움은 우리의 욕망을 일깨운다.(159) 만약 어떤 남자가 동물성과는 거리가 먼 여자를 더 탐낸다면, 그것은 그 여자를 소유하면 그 이후에 거기에서 드러나는 동물적인 더러움은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더렵혀지기 위해 요구되어지는 법이다.(160) 속죄양의 경우를 보자. 속죄양의 선택에 있어서도 비슷한 원칙이 적용되었었다. 속죄양은 살해의 잔인성을 확실히 드러내는 대상이 선정되었다. 육체적인 결합을 전제한 인간적인 아름다움도 인간성과 동물성의 대비효과에 의해 드러난다. 에로티즘의 본질이 더럽히기인 한 에로티즘에서는 아름다움이 가장 중요하다. 에로티즘에서의 금기는 인간성이며, 에로티즘은 그것을 범하는 것이다. 인간성은 위반되고, 모독되고, 더렵혀진다. 아름다움이 크면 클수록 더럽힘의 의미는 그만큼 커진다.(162)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