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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바타유 에로티즘 2부 연구 1-3.hwp


연구1. 킨제이, 패거리 그리고 노동

모든 사람은 일정량의 에너지를 가지며, 그 중 일부를 노동에 할애하면 에로티즘에 할애하는 에너지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인간의 시간 안에서 노동하는 반 동물적인 인간성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물화시키는 부분이며, 반면 동물성은 우리 안에서 자신을 위한 주체적 실존의 가치를 지켜내는 부분이다.

이 말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동물성’, 즉 성적 충일은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사물이 되지 않게 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노동 시간의 인간성이란 그것이 갖는 특별한 의미로 볼 때 성적 충동을 희생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물이 되게 하는 어떤 것이다.(182)

 

연구2. 사드의 절대인간

관능은 파멸적 탕진과 얼마나 가까운지 우리는 관능이 절정에 이른 순간을 심지어 작은 죽음이라고까지 부른다. 그 결과 에로티즘의 극단적 양상들이 떠오르게 하는 것은 무질서이다. 발가벗은 상태는 우리가 옷을 입은 상태에서 지키는 예의를 파괴한다.(197) 우리는 오직 마구 탕진할 때 마치 상처가 우리 안에서 열리는 것 같은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우리는 우리의 소비가 쓸데없는 것이기를 바라며, 파괴적인 것이기를 확신하려고 한다. 우리는 재산의 증식이 규칙인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러한 전도적 세계라는 관점에서 에로티즘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에로티즘의 진실은 배반에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이론은 에로티즘의 파괴적 형태에 근거한다. 도덕으로부터의 고립은 구속의 제거를 의미한다. 사드는 낭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은 결국 구속당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존중은 그를 몽롱하게 하며 어떤 절대 갈망을 가늠하지 못하게 한다. 절대 갈망은 도덕적 또는 물질적 자원을 증대시키고자 하는 욕망조차 굴복시킬 수 없는 것 아니던가.(198)

연구3. 사드와 정상적인 인간

사드에 의하면 삶은 쾌락의 추구이며, 쾌락은 삶의 파괴에 비례한다. 다른 말로 환원하면 삶은 삶의 원리를 엄청나게 부정할 때 비로소 가장 강렬한 쾌락에 이를 수 있다.(210)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처형을 포함해서 기독교 의식과 신성의 끔찍한 특성을 연과 짓게 만들지 않는 잔인성이 없다. 신은 신의 제일 원리인 소진, 파멸의 필요성을 충족시킨 다음에야 인간의 수호자가 되었던 것이다.(211) 배려하는 삶과 열병적인 삶이 종교 행위 덕분에 서로의 보호 아래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고뇌와 희열, 강밀함과 죽음은 축제 속에 뒤엉켰다. 공포는 격앙을 낳았으며 소비는 유용한 활동의 최종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적당한 어울림은 없었다. 서로 반대되는 그리고 양립 불가능한 두 원칙들 사이에 결코 손쉬운 화해란 없었다.(212)

악행과 살해를 저지르고 싶은 욕구와 성적 충동이 무관하지 않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종교가 어떤 일탈 현상의 설명에 불과한 것이라면, 사디즘이라고 명명된 인간의 성본능은 인간에게 숨겨진 어떤 근본적인 잔인성을 더 잘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드는 숨겨진 인간의 본능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서서히 자아의식(213)에 이르게 한 공헌이 있다. 대체적으로 소진, 소멸은 우리에게 행복감을 안겨 준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신적인 것으로 또는 신성한 절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요용성과는 무관한, 그 자체 외에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그래서 결코 그 후의 다른 어떤 결과에도 예속되지 않는 절대적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216)

사드가 의식에 가담시키고 싶었던 것은 의식에 대한 반항적인 어떤 것이었다. 가장 반항적인 것만이 그가 보기에는 쾌락을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었다. 사드의 업적은 관능적 도취에서 정신적 불규칙을 찾아낸 데 있다.(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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