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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바타유 에로티즘 연구4-결론.hwp



연구4. 근친상간의 수수께끼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1949)에 대한 서평이다. 바타유는 특히 근친상간 금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해석에 주목하고, 이를 자신의 관점과 비교하고 있다.

근친상간 금지에 대한 기존의 설명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합목적적 이론은 금기에 우생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아이는 저능아가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6세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이론이며, 실제 관찰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둘째, 근친상간 금기는 인간의 천성에 따른 본능적인 혐오라는 관점이 있다. 정신분석학 또한 근친상간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인 강박관념을 지적한다. 셋째, 역사적인 관점에 의하면 외혼제도는 약탈혼이 정상적인 결혼형태로 굳어진 결과다.

레비스트로스 당시에 가장 지배적이었던 것은 뒤르켕과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뒤르켕은 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동일집단의 피, 즉 여자들의 월경의 피가 터부였으며 그래서 금기는 여자들로 하여금 동일 집단의 남성들을 거부하는 한편 다른 집단의 남성들을 받아들이도록 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아버지는 아들들이 부인이나 딸에 손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금기를 부과하며, 형제들은 질투와 견제를 통해 금기를 유지한다고 주장하였다.

레비스트로스는 근친상간 금기와 외혼제도를 여성의 배분과 교환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같은 세대의 구성원들은 크게 근친으로 인식되는 평행적 종형제자매들과 결혼이 가능한 교차적 종형제자매들로 나뉜다. 여기에는 문화에 따라 수많은 형태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평행적 종형제자매들 사이의 혼인은 금지되고, 교차적 종형제자매들 중에서도 부계보다는 모계가 더 선호된다. 이런 구분은 생물학적 기준과는 관계가 없다. 장소에 따라 이 분류기준은 달라지며, 그런 금기에 대한 윤리적인 이유가 붙는다(“그들은 동성 방계 종형제자매들과 이성 방계 종형제자매들의 차이를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이밝혀낸다.)

레비스트로스는 고대의 결혼 제도는 배분적 교환 체계가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여성은 신성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여성을 얻는 것은 부를 얻는 것이었다. 따라서 결혼은 부의 재분배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참조한다. 다른 부의 교환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교환도 거래보다는 상호 증여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아버지나 오빠는 딸이나 여동생을 자기가 가지지 않고 남에게 줌으로써, 다른 여성과의 결합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그래서 근친상간을 지하실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행위에, 외혼을 샴페인을 터뜨리는 축제에 비유한다(여성이 샴페인이다.)

한편 바타유는 여성이 노동력일 뿐만 아니라 탐욕의 대상임을 강조하면서, 레비스트로스가 에로티즘과 포틀래치의 관계에 주목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근친상간 금기를 경제적 차원의 설명에만 한정함으로써 모스가 주창한 전체적 사회 현상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타유는 노동으로 건립되는 인간 세계, 그리고 동물성의 부정으로서의 금기라는 개념으로부터 근친상간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에서 보면 결혼은 부부 사이의 일이 아니라 자기 것인 딸이나 누이를 자기가 갖지 않고 남에게 증여하는 남성의 행위가 된다. 바타유는 이에 동의하면서 나아가 이 근친의 거부는 한편으로 대상(여성)의 매혹적 가치를 부각시키고, 폭력을 유보시킴으로써 인간 세계를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고 본다. , 탐욕을 유보하는 근친 거부와 탐욕의 대상을 중시하는 에로티즘은 상보적이다. 에로티즘이라는 탈선이 가능하기 때문에 금기는 존경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금기가 있기 때문에 에로티즘은 매혹적이 된다.

 

연구5. 신비와 관능

 

카르멜 수도회 연구집에 실린 신비와 금욕에 대한 논문들에 대한 논평이다. 여기에 투고한 수도사와 신학자들은 금욕은 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성적 결합은 초월적 결합을 상징할 수 있다는 등의 주장을 내놓았다. 이를테면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은 신비가들의 신비적 감동에 대한 묘사는 성적인 쾌락과 대단히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신분석학자나 정신의학자들은 신비 체험을 비정상적인 감각적 흥분, 성적인 것과 관련된 신경증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성생활을 포함한 부부생활이 신앙생활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바타유는 에로티즘과 신비 체험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는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신이 원하는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성행위는 인간에게 고유한 에로티즘이 아니라 생식을 위한 동물적 성행위에 가깝다. 에로티즘은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고,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이나 신자들을 유혹하는 것은 번식 충동이 아니라 에로티즘이다. 따라서 신비 체험과 관련되는 관능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결혼에 제한된 성행위가 아니라 일탈적이고 폭력적인 환락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타유에 의하면 에로티즘과 신비 체험에 대한 기존의 비교에는 문제가 있다. 정신병리학자들은 비교를 위해 신비 체험을 격하시킨다. 종교인들은 성욕을 숭고하게 떠받들어 천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성에는 가장 사회적인 형태(결혼)로부터 사회적 질서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형태(하층민들의 음란하고 혐오스러운 성)까지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리고 이들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성에는 불변의 주제가 있다.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에도 여러 형태가 있지만(제도종교에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최면, 영매와 같은 유사종교적 집단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벗어남,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닥치는 고통을 한계까지 버틸 때 찾아오는 무한한 존재의 환희다. 신비 체험이 관능과 다른 점은, 육체를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충동을 내부로 응집시켜서 체험을 얻는다는 점뿐이다. 그 외에는 육체적 욕망과 신비주의 체계의 주요 이미지와 의도가 유사하다. 사유에 의한 신비 체험도 성행위의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에로티즘도 신비 체험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비 체험의 극단에 도달하는 온전한 절대성의 영역은 성 체험이나 다른 사소한 신비 체험과는 다르다. 이 상태의 인간은 아무런 욕망이 없고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최종 목적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욕을 포기해야 하는가? 바타유는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신비 체험은 존재의 가능성을 극단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얻을 수 있다. 그를 위해 전통적인 수도원 생활은 금욕을 통해 유혹에 저항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성적 무질서 또한 자아를 포기하고 절대적 초월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6. 신성, 에로티즘, 고독

 

이 강연에서 바타유는 에로티즘 및 신비 체험을 철학과 비교하고 있다. 철학은 담론의 세계다. 그러나 에로티즘은 인간을 침묵으로 끌어들인다. 신비 체험은 에로티즘과 좀 더 가깝다. 그러나 신비 체험은 담론(설교 등)의 형태로 설명될 수 있는 반면, 에로티즘은 인간을 고독에 빠트린다. 철학적 체험은 신비 체험이나 성적 체험을 용납하지 않는다. 현대의 전문화된 철학은 더 이상 지식의 총체가 아니라, 인간의 무수한 체험 가운데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총체성이나 보편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 때문이다.

바타유는 헤겔의 철학이 비교적 종합적이며 에로티즘을 중요하게 다루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헤겔 또한 전문화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즉흥적인 체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형식주의와 계획 속에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에로티즘과 신비 체험은 변덕스럽고 욕망에 이끌린다. 그러나 바타유는 가능성의 총체와 종합 작업으로서의 철학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은 전문화된 철학이 아니라 욕망이라고 보았다.

바타유는 전문 작업으로서의 철학은 하나의 노동이며, 극단적인 인간성을 멀리하고 일상적 세계에 속한 평범한 인간성만을 다룬다고 비판한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등의 근대 철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듯이 이런 철학은 종합 작업을 포기함으로써 심오한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중병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철학을 부정하고 비웃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을 포함하는 노동과 담론은 고독과 침묵을 특징으로 하는 에로티즘을 배척한다. 따라서 바타유는 청중에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자신의 강연도 의심해 보라고 한다. 언어를 부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자신도 철학 언어를 써서 떠들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에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이 철학이다. 일종의 제사이다.” 그리고 자신은 제로 상태의 말, 침묵에 가 닿는 말, 백지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7. 에두아르다 부인에 부치는 서문

 

에두아르다 부인은 바타유 본인이 가명으로 출판한 포르노 소설이다. 여기에서 바타유의 에로티즘 이론은 좀 더 노골적인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다. 바타유는 신비 체험, 성적 도취, 죽음을 비정상적인 초월이라는 관점에서 결합시키고 있다. “이 책은 신의 모든 속성들을 한껏 문제 삼는다. 신도 말하자면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창녀이다. 그러나 에로티즘은 신비 체험이 말할 수 없던 것(말하려고 하면 신비 체험은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을 말한다. 천박한 존재, 공포 존재, 더 나아가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존재…… 등 모든 의미에 있어서의 초월적 신이 아니라면, 그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 신은 엄청남 그 자체이다. 누구든 조금이라도 신의 느낌을 느끼는 사람은 즉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결론

 

결론에서 바타유는 다시 한 번 철학과 언어의 문제를 제시한다. 에로티즘과 신비 체험은 인간 정신의 정상에 위치한다. 그러나 그 영역은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철학은 사유의 총체를 다룰 필요가 있으며, 그 총체를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언어는 총체를 분리된 양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바타유는 이런 언어의 약점을 지적하는 한편 위반을 철학의 근본으로 삼을 것, 언어를 침묵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 “존재의 정상에서 존재를 관조하는 태도. 그러나 언어를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언어가 흐르지 않는 절대적 순간을 드러낼 수 있는 것도 언어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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