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 - 배영달

p15 :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는 사물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 (16)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사물의 기능보다는 오히려 사물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어떤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 소비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하나의 기호/이미지는 또 다른 기호/이미지를 산출하고, (...) 결국 실재와 기호/이미지를 구분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점점 더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초과실재(시뮬라크르)가 생겨나게 된다.

실재가 없는 기호/이미지만이 넘치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시대, 즉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p36 : 프랑스 사회에서는 생산, 노동, 가치의 개념보다는 소비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현상이었다. (37) 따라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소비의 이데올로기이고, 이 소비의 이데올로기는 사물의 기호학을 심화시킨다. (38) 근대사회의 출발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로 시작한다. 그런데 보드리야르는 현대의 소비사회에 대한 우려로서 데카르트의 명제를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변형시킨다.

 

p39 :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의 사물가치론을 비판하면서 사물을 물질적 실체로 보지 않고 기호로 파악했다. (41) 소비사회에서 소비의 진정한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기호의 질서이다.

이제 소비사회에서 사물의 존재나 개인의 존재는 기호의 질서 안에서 흡수되고 소멸된다.

(46) 대중매체의 지배력이 확대될수록 코드의 모든 요소와 미디어의 기술적 조작에 근거하는 인공물인 ‘네오-리얼리티’가 도처에서 현실을 대체하게 된다. (50) 기술의 지배라는 알레고리는 ‘주체의 소멸’과 ‘사물의 승리’라는 보드리야르(51)의 전망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는 시뮬라시옹의 지배와 실재의 소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72) 시뮬라시옹은 기호에 의해 실재보다 우월한 초과실재가 산출되는 과정을 가리키며, 시뮬라크르는 그 시뮬라시옹의 결과이다. (73) 보드리야르는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라는 맥루언의 명제를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미디어 자체가 증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맥루언을 넘어선다.

 

p80 : 그는 정치, 사회적인 것, 계급갈등, 사회변화에 대한 전통적 이론들이 개인, 계급 및 대중을 사회적 행위의 가능태로 가정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뮬라시옹 사회에서, 대중은 오로지 스펙타클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시뮬라시옹의 조작 대상이 되어 버린 대중은 이제 사회와 사회현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82) 이러한 ‘침묵하는 다수’, ‘대중’의 무관심과 더불어, 보드리야르는 사회적인 것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한다. (83) 오늘날 대중의 이 무기력과 무감각은 오히려 지배적인 이미지들에게 의미부여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저항’이 될 수 있다.

보드리야르의 견해에 따르면, 정보는 의사소통과 사회적인 것을 삼켜버린다. 즉 정보는 본래 의사소통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연출만 하면서 소진되는 것이다.

 

p86 : 시뮬라크르의 첫 번째 질서는 보드리야르가 가치의 ‘자연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를 둔 모사의 질서이다. (87) 기호는 모사를 통하여 실재에 관계한다. 우리가 실물로 착각할 만큼 정밀한 묘사화처럼 전형적인 바로크 형태의 치장벽토에서 감탄하는 것은 이 치장벽토가 실재와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재와 근소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두 번째 질서는 산업시대를 지배해왔던 가치의 ‘상업적 법칙’에 근거를 둔 생산의 질서이다. (88) 원본의 복제품으로 간주되는 대신에, 제품들은 두 개 혹은 그 이상 동일한 대상들의 등가요소로 간주된다.

세 번째 질서는 보드리야르가 가치의 ‘구조적’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거를 둔 시뮬라시옹의 질서이다. 시뮬라시옹은 이원적 모델에 따라 제품의 재생산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모델의 전형은 물음과 대답을, 모든 실재를 0과 1 사이의 이원적 대립으로 바꾸어 놓는 컴퓨터에 의해서 읽히는 디지털 코드이다.

(91) 이원적 모델을 통한 재현의 형태는 대상과 기호 사이의 차이, 실재와 실재를 재현하는 모델 사이의 차이를 없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