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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8.30/문명 속의 불안/지그문트 프로이트/낭만샘

 

1.

프로이트는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은 <영원> 대한 감각, 말하자면 <망망대해 같은 느낌> 같은 것에 있다고 주장하는 로맹 롤랑에 대해, 자신은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으며 다른 사람이 그런 느낌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할 권리는 없지만, 그 느낌을 종교적 욕구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느낌보다는 정신분석적 연구의 성과인 자아 감각에 의존해야한다고 주장한다.(233-4) 사랑에 빠져 있는 상태처럼 자아 감각도 얼마든지 혼란에 빠질 수 있고, 자아의 경계로 변함없이 일정한 것은 아니지만, 자아 감각은 자율성과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여러 단계를 거쳐 발달해 왔을 게 분명하다.(236) 유아는 그에게 흘러들어오는 감각의 원천인 외부 세계와 자신의 자아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다가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여 차츰 외부 세계와 자아를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유아는 자극의 다양한 원천 가운데 일부는 언제든지 그에게 감각을 제공할 수 있는 반면, 다른 원천-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어머니의 젖가슴-은 이따금 그를 피하고, 칭얼대는 소리로 도움을 청해야만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이리하여 유아는 처음으로 <대상>을 자아의 맞은편에 놓게 된다.(237) 원래 자아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나중에 자신한테서 외부 세계를 분리한다.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자아는 위축된 잔해에 불과하지만 원초적 자아 감각에 어울리는 관념적 내용은 무한함과 우주와의 유대감, 말하자면 <망망대해 같은> 느낌일 것이다.(238) 어떤 느낌이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느낌 자체가 강한 욕구의 표현이어야 한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보호를 받고 싶은 욕구보다 더 강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망망대해 같은> 느낌은 무제한한 나르시시즘의 회복 같은 것을 추구할지 모르지만, 그 느낌이 맡고 있는 역할은 뒷전으로 밀려난다.(243) <망망대해 같은> 느낌이 나중에 종교와 연결된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느낌의 관념적 내용을 이루는 <우주와의 합일>은 종교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최초의 시도처럼 보인다.(244)

2.

프로이트가 <환상의 미래>에서 다룬 것은 종교적 감정의 원천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자신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245) 인생의 고난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고통을 가볍게 하거나, 고통을 줄여주는 대리만족을 찾거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드는 마취제가 필요하다.(246) 종교가 이 세 가지 부류들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지는 그렇게 간단히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247) 인생이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도 만족스런 대답을 얻지 못했지만 종교는 거기에 대답할 수 있다. 인생이 목적을 갖는다는 생각이 종교 체계와 운명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248) 인간은 인생에서 무엇을 원할까? 그 대답은 사실 뻔하다. 인간은 행복을 얻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미약한 육체적 조건과 무자비한 파괴력을 지닌 외부 세계와 고통을 수반하는 타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행복하기보다는 고통스러울 가능성이 훨씬 크다.(249) 종교란 결국 그런 고통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 중 하나다. 인류의 종교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집단 망상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망상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망상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254) 종교는 행복을 얻고 고통으로부터 보호 받는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강요하기 때문에, 선택과 적응이 작용할 여지를 제한한다.(258) 종교가 채택하는 방법은 삶의 가치를 끌어내리고 현실 세계의 그림을 망상으로 왜곡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지성에 대한 위협을 의미한다.(259)

3.

프로이트는 문명에 대한 적대적인 요소는 기독교 신앙이 이단 종교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미 작용했으며,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들의 원주민들에 대한 오해에서도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261) 인간은 문명이 성취한 것을 자랑할 자격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다. 전화가 있어서 멀리 떨어진 자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지만 거리를 줄이는 철도가 없다면 자식은 애당초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262)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평균 수명이 늘어났지만 인생이 더 힘들고 기쁨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263) 인간은 처음에는 연약한 동물로 지구상에 등장했다. 인간이 아무리 소망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거나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는 모든 것을 신들의 속성으로 부여했다. 오늘날 인간은 이 이상에 가까이 도달하여, 그 자신이 거의 신이 되었다.(266) 문명의 발달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정의는 모든 사람이 그 제한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271) 자유에 대한 욕망은 문명과 공존관계를 유지할 수도 있지만, 문명의 특정한 형태나 요구에 저항하거나 문명 전체에 저항한다.(272) 본능의 승화는 문명이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이다.(273) 하지만 문명이 본능 억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문명이 강력한 본능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는 간과할 수 없다. 욕구를 단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문명이 맞서 싸워야 하는 적개심의 원인이다.(274)

4.

프로이트는 가족의 형성과 남자의 주기적인 성욕구와의 관련을 고찰한다. 인류의 공동생활은 두 가지 토대, 즉 노동에 대한 강요와 사랑의 힘을 갖고 있었다. 전자는 외적 필요성에 의해 생겨났으며, 후자는 남성으로 하여금 성적 대상인 여성을 빼앗기기 싫어하게 만들고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분신인 자식을 빼앗기기 싫어하게 만들었다.(277) 성애는 새로운 가족 형성으로 이어지고, 목적 달성이 금지된 사랑은 배타성과 같은 성애가 가진 한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 관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는 <우정>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랑과 문명의 균열은 피할 수 없다. 그 균열은 처음에는 개인이 속해 있는 가족과 그보다 더 큰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279) 여자들은 가족과 성생활의 이익을 대변하고, 문명과 관련되는 일은 점점 남자들의 일이 된다. 여성은 문명에의 요구 때문에 자신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깨닫고, 문명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280) 문명은 경제적 필요의 법칙에 복종한다. 문명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사용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대부분 성욕에서 전용해야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명이 성욕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민족이나 계층을 착취해온 민족이나 계층의 태도와 마찬가지다.(281) 문화적 공동체가 유아의 성욕의 발현을 우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당연하지만(유년 시절에 그 기반이 마련되어야하기 때문에) 유아 성욕을 실제로 부인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5.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신경증 환자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바로 성생활의 이런 좌절임을 알 수 있었다. 신경증 환자는 신경증 증세 속에서 스스로 대리 만족을 찾지만, 이런 증세 자체가 고통을 주거나 아니면 그가 속해 있는 주위 환경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어 고통의 원인이 된다.(284) 문명이 성행위에 적개심을 품게 된 골치 아픈요인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이상적 요구가 단서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285) 인간은 강력한 공격 본능을 타고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289) 훈 족의 대이동이나 침입, 칭기스칸과 티무르가 이끄는 몽골족의 침입, 신앙심 깊은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또는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저질러진 잔학 행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견해의 진실 앞에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 상호 적개심 때문에 문명사회는 끊임없이 붕괴 위기를 맡고 있다.(290) 그래서 문명은 동일시와 목적 달성이 금지된 애정 관계를 부추기기 위한 수단을 사용하고, 성생활을 제한한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상적인 명령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명은 지금까지 별로 많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90) 공산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폐지함으로써 인간의 공격 본능을 제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공격 본능은 재산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유아는 자기 배설물에 대한 원초적인 소유권을 포기하기도 전에 이미 공격 본능을 드러낸다. 물적 재산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배제한다고 해도, 성관계에는 여전히 개인의 특권이 존재할 것이다.(292) 문명의 본질 속에는 문명을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 장애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294) -

6.

프로이트는 본능 이론과 관련하여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식욕과 사랑>이라는 실러의 말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식욕은 개체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본능을 대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사랑은 대상을 얻으려 애쓰며, 모든 면에서 자연의 지원을 받고 있는 사랑의 중요 기능은 종족 보존이다.(295) 프로이트가 <리비도>라는 용어를 도입한 것은 오직 대상 본능의 에너지를 지칭하기 위해서였다. 신경증은 자기 보존의 욕구와 리비도의 요구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 투쟁에서 자아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대가로 심한 고통과 욕망 단념을 치러야 했다. 이 견해에 수정할 필요가 생긴 것은 나르시시즘의 개념 때문이다. 즉 리비도에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한 것은 바로 자아 자신이고, 자아는 사실상 리비도의 고향이다. 나르시시즘의 개념은 심적 외상에 따르는 신경증과 정신병만이 아니라 그와 유사한 수많은 질병도 정신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296-7) 프로이트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본능이 모두 같은 종류에 속할 리가 없다는 확신은 남아 있었다. 이후 그는 생물 개체를 보존하려는 본능과는 정반대인 이른바 죽음의 본능에 대해 고찰한다. 이것은 원래의 무기물 상태로 돌려보내는 본능이다. 그 본능의 일부가 외부 세계로 돌려져 공격과 파괴 본능으로 나타난다.(297) 죽음 본능과 에로스의 관계 및 그 본능의 본질을 가장 뚜렷이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사디즘에서다. 사디즘에서는 죽음 본능이 고유한 의미에서의 성적 목적을 왜곡하면서도 성충동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파괴 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전능에 대한 자아의 오랜 원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301)

7.

인간의 친척인 동물들은 왜 그런 문화적 투쟁을 보여주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입장이다. 꿀벌과 개미, 흰개미 같은 몇몇 동물들이 감탄할 정도의 국가 조직과 분업, 개채의 욕망 규제에 도달한 것은 수천 년에 걸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래도 거기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다.(302) 인간 개인의 공격본능은 안으로 돌려져 내면화한다. 자신의 자아로 돌려지는 것이다. 그러면 초자아로서 나머지 자아 위에 적대적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아의 일부가 그것을 인수하여, 이번에는 <양심>의 형태로 자아에 대해 가혹한 공격성을 발휘할 준비를 갖춘다. 자아는 원래 외부의 다른 개체에게 그 공격성을 발산하여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었겠지만, 이제 거꾸로 공격 대상이 된 셈이다. 죄책감은 자기 징벌의 요구로 나타난다. 죄책감의 발생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자들은 다른 심리학자들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303) 인간이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본래부터 타고났다는 주장을 거부할 수도 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의 영향력이다. 개인은 그 외부의 영향력에 복종해야 할 동기를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랑의 상실에서 온 불안이라고 부를 수 있다. 사랑을 상실하기가 두렵기 때문에 사람을 그 위험을 피해야 한다. 이런 심리상태를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부를 가치가 없다. 이것은 사랑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불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304) 그들은 단지 권위자에게 들킬 것을 두려워할 뿐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주로 이런 심리상태를 다루어야 한다. 중대한 변화는 초자아의 확립을 통해 권위자가 내면화할 때에만 나타난다. 초자아에서는 상념조차 감출 수가 없다. 초자아는 죄를 지인 자아를 똑같은 불안감으로 괴롭히고, 외부 세계가 그런 자아를 처벌하게 할 기회를 노린다.(305) 도덕적인 인간일수록, 그의 초자아는 더욱 엄격해지고 의심이 많아진다. 이것은 미덕이 약속된 보상의 일부를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이 잘되어 가는 동안은 양심이 관대해져서, 자아가 온갖 일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러나 불운이 닥치면, 인간은 영혼을 찾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양심의 요구를 높이고, 자제를 선약하고, 속죄 행위로 자신을 징벌한다.(306) 이런 현상이 뚜렷해지는 것은 운명이 엄격하게 종교적 의미에서 <신의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경우다. 미개인은 불운을 당해도 그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게 분명한 주물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자신을 벌하는 대신 그 주물을 채찍질한다.(307) 어린이는 어떤 본능을 단념하도록 강요하던 간에, 최초의(가장 중요한) 만족을 방해하는 권위자에게 상당한 공격 욕구를 품게 되지만 이 보복적인 공격 욕구를 만족시키기를 단념해야 한다. 공격할 수 없는 권위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여 그 권위자를 자기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권위자는 이제 초자아로 변하여, 어린이가 권위자를 상대로 발산하고 싶었던 공격성을 모두 소유하게 된다.(310) 나쁜 짓을 저지른 뒤 그 때문에 죄책감을 갖는다면, 그 감정을 <후회>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인간의 죄책감을 원시 시대의 아버지 살해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도 결국 <후회>에 불과했다. 이 후회는 원시 시대의 아버지에 대한 상반된 감정의 결과였다. 아들들은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사랑하기도 했다. 공격행위를 통해 증오심이 만족되자, 이번에는 사랑이 공격 행위에 대한 후회의 형태로 표면화했다.(313) 문명이 가족에서 인류 전체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발달과정이라면, 양가감정에서 생겨나는 타고난 갈등의 결과, 죄책감의 증대는 문명과 뗄 수 없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315)

8.

프로이트는 죄책감에 대한 논의가 이 논문의 틀을 벗어나 있다는 인상을 독자들이 가지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죄책감이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문명의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는 죄책감의 고조에 따른 행복의 상실임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는 완전히 부합되고 있다고 피력한다.*(316)

 

*<그리하여 양심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햄릿3막 제 1) 오늘날 청소년 교육은 성욕이 그들의 삶에서 맡게 될 역할을 감추고 있지만, 우리가 비난해야 할 청소년 교육의 문제점은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또 다른 잘못은 장차 공격 대상이 될 운명에 놓여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 공격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못된 심리적 예비 교육을 받은 청소년을 인생 속으로 내보내는 것은 북극 탐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여름옷과 이탈리아 호수 지방의 지도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여기서 윤리적 요구가 오용되고 있는 것은 분명해진다. 교육이 <인간이 행복해지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래야 하지만, 사실 인간은 그렇지 않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윤리적 요구의 엄격함은 그렇게 많은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교육을 받은 청소년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윤리적 요구에 충실히 따를 것으로 즉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결한 인간일 것이라고-믿고 있다. 젊음이들도 고결해져야 한다는 윤리적 요구는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원주)

신경증 가운데 하나인 강박 신경증의 경우, 죄책감은 의식 속에서 요란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죄책감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한 변종에 불과하며, 좀더 나중 단계에는 <초자아에 대한 불안>과 완전히 일치한다. 결국 문명의 소산인 죄책감도 죄책감으로 인식되지 않고, 대부분 무의식 상태로 남아 있거나 일종의 <불쾌감>이나 불만으로 나타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람들은 그 동기를 다른 곳에서 찾지만, 그것은 사실상 문명이 낳은 죄책감의 변형이다.(317) 자기 징벌의 욕구는 가학적 초자아의 영향 때문에 피학적이 된 자아의 본능적 발현이다. 죄책감은 외부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의 직접적인 표현이고, 자아와 그 권위자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318) 죄책감은 권위자의 사랑을 얻고 싶은 욕구와 본능을 만족시키고 싶은 욕구 사이의 갈등에서 직접 유래하는 파생물이다. 이 욕구가 금지되면 공격 성향이 나타난다.(319) 신경증 증세는 본질적으로 충족되지 않은 성적 원망의 대리만족이다. 정신분석과정에서 놀랍게도 모든 신경증 환자가 상당량의 무의식적 죄책감을 감추고 있으며, 이 죄책감은 신경증 증세를 징벌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증세를 더욱 강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320) 본능적 경향이 억제되면, 리비도적 요소는 증세가 되고 공격적 요소는 죄책감으로 변하는 것이다.(321) 개인의 발달은 두 가지 욕구, 즉 행복을 얻으려는 욕구와 공동체 안에서 타인들과 결함하려는 욕구의 상호 작용의 산물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전자를 <이기적>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이타적>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표현은 피상적이다.(323) 개인의 발달과정에서는 주로 이기적 욕구가 강조되고, <문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타적> 욕구는 대개 견제적 역할로 만족한다. 하지만 문명 과정의 경우는 개개의 인간을 통합하여 단일 집단을 창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여기에도 행복을 얻으려는 목적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개인의 발달 과정이 인류의 문명 과정과 일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개인의 발달 과정이 공동체와의 결합을 목적으로 삼을 때뿐이다.(323) 개인적 초자아는 엄격한 명령과 금지만 제시할 뿐, 그 명령과 금지에 복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아의 행복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은 인간의 공격 본능을 막는 가장 강력한 억제책이고, 문명적 초자아의 비심리학적 방식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이 명령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그처럼 거대하게 부풀리면 사랑의 가치가 떨어질 뿐, 장애물이 제거되지는 않는다.(326) 인류는 꾸준히 자연력의 도움을 받으면 별 어려움 없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서로를 죽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현대인은 이것을 알고 있고, 그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초조와 불안은 대부분 거기에서 유래한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천상의 권력> 가운데 또 하나인 영원한 에로스가 그와 똑같이 불멸적인 존재인 적수와의 투쟁에서 열심히 버티어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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