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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잉크 /이택광 / 연두 / 2018년 11월 출간 /19.01.17 아카이브기록


p36 : 홉스의 주장은 반지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에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홉스가 지식과 경험을 대립하면서 후자에 우위를 부여했을 때 반지성주의는 도그마주의에 대항하는 진보적 의제로 자리매김한다. 지식이 학습능력에 좌우되는 것과 달리 경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작용한다. 절대적 진리 따위는 존재하지 앟고 경험에 근거한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는 이런 인식은 정치의 문제가 쾌락주의로 귀결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 쾌락주의야말로 반지성주의의 토대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p39 : 반지성주의는 겉으로 보기에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성의 역량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지식의 무기력화를 시도한다. 호프스태터가 지적했듯 오늘날 목격할 수 있는 반지성주의는 상당 부분 권력 엘리트에 대항하는 중간 계급의 '자수성가' 내러티브와 무관하지 않다.  


p40 : 이 반지성주의의 목표는 다른 무엇도 아닌 "너도 즐기는 것만큼 나도 즐겨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규범을 정립하는 것이다. 


p65 : 쾌락주의는 정치의 이념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제 아무리 자유주의가 자신을 '정치철학'이나 '정치학'이라고 부르더라도 그 그저에 놓인 것은 쾌락주의의 아포리아다. 


p68 :  로크는 정부라는 분할장치를 통해 종교적 광신을 제거하고 정치를 안정화하고자 했지만, 언제나 대중의 정치는 루소의 '일반의지'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대의제에 저항하는 대중의 정치를 '포퓰리즘'이나 '반지성주의'라고 규정하고 제어하고자 하는 입장은 정치를 안정화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런 정치는 정치라기보다 경찰의 역할에 가깝다. 


p69 : 시민권은 '계약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해 개인의 독립성이 보장되면서 부여된다고 볼 수 있다. 촛불이 요구한 것은 이 시민권의 보장이었다. 이런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국가야말로 한국적 진보주의라는 맥락에서 '정상 국가'라고 할 수 있다. 


p95 : '고체 근대'는 엘리트가 대중을 감시하는 시대였다면, 지금은 반대로 대중이 엘리트를 예의주시하는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96) 바우만에 따르면 '액체 근대'에서 해방된 개인을 기다리는 것은 '소비주의'다. 이 소비주의는 자유라기보다 또 다른 구속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비주의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97) 개별 소비자가 원하는 것은 다양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기보다 아예 선택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가격비교'없이 단번에 사고 싶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야말로 갑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택의 자유 역시 특권적이라고 할 수 있다. (101) 민족은 명백하게 '액체 근대'에 대비되는 '고체 근대'의 귀환처럼 보인다. 


p128 : 냉소주의는 담순히 염세주의가 아니다. 냉소주의는 이 현실과 다른 절대적 실재, 다시 말해 '자연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 태도다. (129) 흙수저론의 냉소주의가 바로 그렇다. '요즘 세대'가 철이 없어서 세상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정의를 너무도 믿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개탄하는 것이다.

(129) 과거세대가 현실의 어려움을 감내하면 찬란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면, 요즘 세대는 현실을 참고 노력하더라도 장밋빛 미래는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비트코인에 매달리는 것이다. (130) 비트코인 신드롬은 신분차별을 벗어나기 위한 열망의 표현이라는 진실이다. (132) 열심히 노력하면 값진 대가가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이제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부의 유무가 신분으로 고착된 한국의 오늘은 자본주의 자체의 자기 해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p142 :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가 후진적이어서 발생했다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장주의의 극단을 실현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p147 : 일베는 보통의 한국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극단적으로 희화화해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p149 : 남성 중심주의가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근본 원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남혐'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p162 : 경멸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문제라고 한다면, 역겨움은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관용에 대한 저항이다. 


p164 : 과거의 기준으로 본다면 '지적 대화'와 '넓고 얇은 지식'은 별반 관계없고, 오히려 정반대에 놓여야 할 조합이다. 한때 앎이란 것은 실존이나 구조 같은 거대한 문제의식을 놓고 겨루는 사상적 거인들의 각축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엇인가를 아는 문제는 '지적 대화'를 위한 수단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 


p166 : 시장주의가 표방하는 관용은 극단주의의 저항에 부딪힌다. 미국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지적했듯 관용은 일상의 차원과 정치의 차원으로 나뉜다. 결과적으로 후자가 전자를 질식하게 하려는 것이 최근에 두드러진 양상이다. 정치(167)의 차원에서 관용이라는 것은 시장주의의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이들을 관용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이렇게 정치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관용의 이중성을 은폐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혐오의 감정 중 하나인 바로 역겨움이다. 


p170 : '우리 안의 이명박'은 없었다. 사실 있던 것은 이명박이라는 기표로 향하는 욕망을 다른 곳으로 이끌지 못한 내용없는 민주주의였다. 

p180 :  지난 촛불 역시 랑시에르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문제라기보다 촛불 자체의 출현이 중요하다. (181) 오히려 근본적 변화가 오려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현실의 계기들을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p197 :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실패 아래에 감춰진 것은 더 왼쪽에 있는 좌파의 패배다. 한마디로 더 왼쪽에 있는 좌파가 대의를 상실했다는 의미다. 

 계급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동성애자의 권리나 낙태 문제 같은 정체성 정치에 매몰돼 있다. 오늘날 진정으로 좌파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의가 있는가. 좌파에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다는 것이 실패의 궁극적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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